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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12부 식민지ㆍ해방ㆍ분단 - 3장 항전과 침묵과 암흑의 시기, 홍군 속의 조선군(동북항일연군)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12부 식민지ㆍ해방ㆍ분단 - 3장 항전과 침묵과 암흑의 시기, 홍군 속의 조선군(동북항일연군)

건방진방랑자 2021. 6. 22.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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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장 항전과 침묵과 암흑의 시기

 

 

홍군 속의 조선군

 

 

31운동이 임시정부와 조선공산당을 낳았듯이 중국의 54운동도 중국공산당이라는 새로운 항일운동의 지도부를 탄생시켰다. 다만 중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었고 지식인들이 사회주의의 본산인 소련과 접촉하기가 훨씬 용이했던 탓에 중국공산당은 한반도보다 5년 앞선 1920년에 소련의 지원을 받아서 성립되었다. 그러나 소련은 제국주의 열강의 하나였다가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탈바꿈했고, 중국은 대표적인 식민지ㆍ종속국으로서 반봉건(半封建) 사회였으니, 공산당이라는 이름이 같다고 성격까지 같을 수는 없다. 일단 소련의 권유에 따라 중국공산당은 우익의 국민당과 합작(1차 국공합작)을 이루고 반제국주의 항일투쟁을 전개했으나 곧 합작이 깨지면서 소련 측과도 멀어지게 된다. 그에 따라 초기 지도부를 구성했던 소련 유학파 지식인들이 물러나고 토착 공산주의자들이 당을 장악하게 되는데, 그 중심 인물이 바로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이다.

 

공산당과 국민당이 결별한 이유는 국민당의 지도자인 장제스(蔣介石, 1887~1975)가 어처구니없게도 항일보다 공산당을 탄압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전환했기 때문이다. 국공합작을 주도했던 쑨원이 죽자 장제스는 자신의 독재 권력을 구축하려고 일방적으로 합작을 깬 것이다지독한 권력욕과 타고난 반공주의자라는 점에서 장제스와 똑 닮은 조선인이 있는데, 바로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이라는 자다. 그는 미국에서 빈둥거리면서도 임시정부의 대통령직을 요구했고, 어리석은 임시정부가 그 요구를 들어주었는데도 여전히 외교를 핑계로 미국에 머물렀다. 장제스와 마찬가지로 이승만도 해방 직후의 한반도에서 민족 지도자 김구(金九, 1876~1949)는 물론 미군정까지도 권하는 좌우 합작을 줄기차게 거부하고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하여 마침내 관철시켰다. 항일이라는 민족적 과제보다 자신의 권력을 추구했고 끝내 조국의 분단을 빚은 점에서 장제스와 이승만은 쌍둥이처럼 닮은꼴이다. 나중에 그들이 독재자가 되어 두 나라의 현대사를 얼룩지게 만든 것은 우연의 일치라기보다는 두 나라의 잘못된 역사가 낳은 필연적인 결과다.

 

대적을 앞에 두고 내홍을 빚는 현상은 중화세계의 전매특허라고 해야 할까? 중국 정부의 분열은 당연히 일본에게 호기를 제공한다. 일본은 그 틈을 타서 야금야금 남쪽으로 내려오더니 만주에 이어 화북에도 괴뢰 정권을 수립했다. 마오쩌둥(毛澤東)으로서는 국민당과의 내전도 괴롭지만 어느새 중국 대륙 전체가 일본 제국주의의 타깃이 되었다는 데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그는 193581일 내전을 중지하고 항일민족통일전선을 수립하자는 유명한 81선언을 발표하는데, 이것이 국내외의 커다란 호응을 얻어 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진다. 만주의 조선계 항일무장투쟁 조직들이 중국공산당의 군대인 홍군(紅軍)에 속하게 된 계기는 바로 거기에 있다.

 

 

국적 없는 항일투쟁 나라를 잃은 마당에 새삼 국적을 따질 이유가 없다. 그래서 만주의 조선인 유격대들은 자연스럽게 중국인들과 한몸이 되어 항일투쟁에 나섰다. 사진은 동북항일연군 소속 어느 소부대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왕이면 8로군 소속 조선 유격대와 힘을 합쳐 국적 있는 항일투쟁을 벌였더라면 해방 후 국제적 발언권이 달라졌을 것이다.

 

 

물론 장제스는 여론에 밀려 어쩔 수 없이 따랐겠지만 마오쩌둥의 81선언은 일본의 야욕이 노골화되는 상황에서 대단히 효과적인 적시타였다. 특히 그동안 만주 일대에서 턱없이 부족한 화력과 보급품에 오로지 불굴의 투지만을 불살라가면서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던 조선의 독립군에게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소식이었다. 무엇보다 통일적인 지도부가 생겼으니 이제 치고 빠지는 게릴라전이 아니라 일본군과 정식으로 맞붙어 볼 수도 있다는 게 가장 큰 보람이다. 그래서 선언이 발표된 바로 다음 달인 19359월 만주 지역의 모든 항일 조직들은 한데 뭉쳐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을 이루었다. 모두 3로군으로 구성된 이 조직에서 조선 독립군은 주로 1로군에 편입되었는데, 그들 가운데는 최용건(崔庸健, 1900~76), 김책(金策, 1903~51), 김일성(金日成, 1912~94) 등 나중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즉 북한 정권을 수립하게 되는 주요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통일전선이 위력을 발휘하게 되는 상황은 과연 얼마 안 가서 닥쳐왔다. 19376월 관동군 참모장인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1884~1948)대소련 작전을 준비한다는 입장에서 볼 때 지금 중국을 공격해야 한다고 선언한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것은 한 달 후 또 다시 아무런 예고도 없이 시작된 중일전쟁의 선전포고에 해당하는 발언이었다. 당시 유럽에서도 독일과 이탈리아에 파시스트 정권이 들어서면서 새로운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으니, 2차 세계대전은 이때 이미 시작된 셈이다그런 점에서 1936년부터 시작된 에스파냐 내전과 아시아의 중일전쟁은 2차 대전의 서곡에 해당한다(에스파냐 내전에 관해서는 종횡무진 서양사, 열매 26장 참조), 1차 대전이 선진 제국주의에게 후발 제국주의가 도전한 전쟁이었다면, 2차 대전은 1차 대전에서 패배한 후발 제국주의가 파시즘이라는 신무기로 무장하고 선진 제국주의에게 다시 도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랬기에 1차 대전에서는 연합국 측에 가담했던 박쥐 일본도 이번에는 그 본색을 드러내고 동맹국 측으로 참전하게 된다.

 

침략자 일본이 조선과 중국을 구분하지 않으니 당연히 홍군 속의 조선인들도 굳이 국적을 따질 필요가 없다. 그래서 중일전쟁을 맞아 중국공산당이 홍군을 8로군(八路軍, 화북 담당)과 신4(新四軍, 강남 담당)으로 나누어 재편했을 때 동북항일연군에 참여하지 않은 만주의 조선 유격대들은 대부분 8로군에 속하게 된다. 주시경의 제자로서 한글학자의 길을 걷다가 항일투쟁에 뛰어든 김두봉(金枓奉, 1889~1958)을 비롯해서 최창익(崔昌益, 1896~1957), 무정(武亭, 1905~52, 본명은 김무정) 등 일찍부터 중국공산당과 연계를 맺고 있던 사람들이 당시 8로군으로 소속을 옮긴 조선 전사들이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로 인해 만주에서 활동하던 조선의 무장 조직들은 동북항일연군과 8로군으로 소속을 달리 하게 됐는데, 이 사실이 나중에 북한정권이 수립될 때 권력다툼의 씨앗이 될 줄은 누구도 몰랐으리라.

 

동북항일연군과 8로군에서 조선인 유격대의 활약은 눈부셨다. 특히 19376월 동북항일연군 1로군 소속의 한 부대는 함경도 갑산의 보천보(普天保)를 습격해서 일본 경찰들을 살해하고 이곳을 잠시 동안 점령하는 쾌거를 이루었는데, 이 사건은 나중에 보천보 전투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지게 된다. 만주의 항일 유격대가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까지 진출한 것은 유례없는 일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규모나 성과에 비해 이 전투가 특별히 유명세를 탄 이유는 따로 있다. 그 부대의 지휘관이 바로 김일성이라는 스물 다섯 살의 젊은 조선인 청년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당시 그는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조국이 곧 해방될 것이라는 일장연설을 하고 나서 만주로 돌아갔는데, 꿈같은 연설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슈퍼맨이라도 등장한 것으로 여겼음직하다. 곧이어 이 사건은 동아일보조선일보의 지면을 타고 전국에 퍼졌으며, 특히 한반도 북부에서 김일성 장군이라는 이름이 마치 만주 항일 유격대의 대명사처럼 알려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또한 김일성도 대단치 않은 이 사건을 두고두고 우려먹었다).

 

그러나 중국의 국민당군과 홍군, 거기에다 조선 유격대까지 힘을 합친 거센 항전도 일본의 우수한 화력과 조직적인 공략을 완전히 막아내지는 못했다. 중국의 동해안을 따라 강남까지 남하한 일본군의 집요한 공격으로 중국 정부는 난징에서 우한으로, 다시 우한에서 충칭으로 옮겨가면서 해안을 빼앗기고 연신 내륙 쪽으로 밀려났다(이 과정에서 일본은 무려 20만의 중국인들을 살해하는 난징대학살을 저질렀다). 게다가 때마침 일본의 기세를 더욱 높여주는 사건이 유럽에서 터진다. 1939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2차 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유라시아 대륙 동서 양끝의 파시즘이 서로 만나면서 바야흐로 세계는 인류 역사상 최대의 전란을 맞는다.

 

 

용공 보도? 동아일보가 호외로 다룬 보천보전투에 관한 기사다. 식민지 시대 전체를 통틀어 만주 유격대가 국경을 넘어온 경우는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러나 규모와 성과는 대단치 않았던 이 사건이 대서특필됨으로써 김일성이라는 이름이 한반도 전역에 알려졌으니, 이 보도는 해방 후 북한에 김일성 정권이 들어서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봐야겠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홍군 속의 조선군

모두가 침묵한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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