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
Experience
한자 성어와 영어 숙어의 뜻과 형태가 비슷한 드문 사례가 있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과 믿는 대로 보는 것(Seeing is believing). 둘 다 경험만큼 좋은 스승은 없다는 뜻이다.
경험이 앎을 얻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과정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소금이 짜다는 것은 맛을 봐야 알고 승리가 얼마나 달콤한지는 이겨봐야 안다. 경험하지 않고 아는 것은 올바른 앎이 아니며 기껏해야 관념적인 앎일 뿐이다.
그런데 경험을 통한 앞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맛보는 사람에 따라 소금이 짠 정도가 다를 수 있고 승리를 얻기까지 치른 고통에 따라 승리의 쾌감이 달라진다. 즉 경험은 근본적으로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나의 경험을 고스란히 남에게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할뿐더러 나의 경험조차 때와 장소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철학의 역사에서 경험을 바라보는 관점은 크게 둘로 나뉜다. 우선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로부터 시작된 합리론적 전통은 경험의 주관성과 상대성을 비판하면서, 주어진 경험을 해석하고 가공하는 이성적 활동이 인식 과정의 핵심을 이룬다고 보았다. 이성을 지닌 인식 주체가 없으면 경험 자체로는 아무런 지식도 이루지 못한다는 논리다.
이에 반해 영국에서 주로 발달한 경험론은 감각적 경험이 앎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점을 다시금 강조한다. 경험론의 시조인 로크(John Locke, 1632~1704)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외부 대상을 경험함으로써 얻는 관념뿐이라면서 “지식이란 관념들의 연결, 일치 또는 불일치, 대립에 관한 지각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오성론』”라고 말했다. 뒤이어 버클리(George Berkeley, 1685-1753)는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 -『인간 지식의 원리에 관한 연구』”이라는 극단적 경험론을 펼쳤다.
이 두 가지 흐름은 독일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에게서 종합된다. 칸트는 일단 외부 대상에 관한 앎을 얻으려면 감각적 경험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며 경험론의 손을 들어준다. 그러나 칸트는 경험론자들이 감각을 경험과 섣불리 일치시키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본다. 감각은 자료에 불과할 뿐 아직 경험이 아니다. 감각 자료가 경험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이성에 의해 해석되어야 한다. 마치 원료가 공장에서 가공되어 제품으로 만들어지는 것과 같은 원리다. 공장에서 제품을 만들려면 설비가 필요하듯이 우리의 이성은 감성과 오성이라는 ‘설비’를 갖추고 있다. 그 두 가지 기본 형식을 가동해 감각자료를 경험으로 가공하는 과정이 곧 인식이다.
약간 절충이 가미된 종합이지만, 칸트는 경험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 이성의 내부에 경험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장치가 있다고 간주함으로써 경험론과 합리론의 대립을 절묘하게 해소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현상학을 창시한 독일의 철학자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은 칸트가 한 걸음 더 나아가지 못한 것을 아쉬워한다. 칸트는 경험의 과정을 분석하면서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을 분리했지만, 후설은 처음부터 분리되지도 않고 분리될 수도 없는 것을 분리했다고 비판한다. 후설은 “의식은 어떻게 가능한가?”를 묻는다(후설은 인식 대신 의식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경험을 경험이도록 해주는 것, 경험을 참된 의식으로 만들어주는 것, 이것을 후설은 ‘우주에서 가장 큰 수수께끼’라고 말했다.
칸트는 인식 주체가 대상을 인식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내장하고 있다고 보는 것으로 인식 과정을 설명했지만, 후설은 주체가 지향성(志向性)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식이 이루어진다고 본다. 인식 주체는 고정된 실체와 같은 것이 아니라 빈 그릇처럼 항상 뭔가를 채우려 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지향성이다. 칸트는 주체와 대상을 악수하도록 만드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주체를 대상처럼 실체화시킴으로써 주체-대상의 분리를 극복하지는 못했다. 후설의 현상학적 인식론은 이후 이성적 주체의 존재를 부정하고 전통적 형이상학을 해체하려는 현대 철학의 경향으로 이어지게 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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