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자체
Ding an sich
모든 사물은 보편성과 특수성이라는 두 가지 존재의 측면을 가진다. 축구공은 공으로서의 보편성과 더불어 축구를 할 때 사용하는 공이라는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 보편성의 측면을 보편자라고 부르며, 특수성의 측면을 개별자라고 부른다. 보편자와 개별자의 문제는 중세에 중요한 철학적 쟁점이었다.
나무의 개별자는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버스 정류장 앞에 서 있는 플라타너스라는 구체적인 나무다. 나무의 보편자는 개별자와 다른 차원의 존재다. 나무에는 플라타너스만이 아니라 물푸레나무, 떡갈나무, 감나무 등 수많은 종류가 있다. 이 각기 다른 나무들을 나무라는 말로 총칭하는 이유는 나무의 보편자가 있기 때문이다. 나무 같은 자연 존재만 그런 게 아니다. <왕의 남자〉, 〈괴물〉 같은 많은 영화들을 영화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이유도 영화의 보편자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편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입장을 실재론(實在論, Realism)이라고 부른다. 반면에 보편자란 이름만 있는 것일 뿐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고 오로지 개별자만 존재한다고 보는 입장은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이라고 부른다. 이 실재론과 유명론의 대립은 신에 관한 논증과 더불어 중세 철학의 양대 쟁점을 이루었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가 근대 철학의 문을 연 이래 합리론과 경험론으로 나뉘어 전개되던 철학적 인식론은 칸트(Immanuel Kant,1724~1804)에 이르러 종합을 이루었으나(→ 경험 /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보편자의 문제만큼은 칸트도 어쩌지 못했다. 사물의 일반적인 본질 같은 게 정말 있는 걸까? 없다고 하기에는 뭔가 아쉽고, 있다고 말하면 그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부담이 따른다. 고민 끝에 칸트는 그것을 물자체(物自體)라는 개념으로 부르고 물자체는 인식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물자체란 ‘사물 자체’라는 뜻인데, 서양 철학의 개념들이 도입되던 초기에 먼저 일본어로 번역된 탓에 우리말로 읽으면 낯설게 느껴지는 개념이 되었다. 플라톤의 이데아, 중세의 보편자와 비슷한 의미의 개념으로 보면 된다.
칸트는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는 것은 사물에서 비롯된 감각 자료 혹은 관념일 뿐 사물의 본질은 아니라고 보았다. 우리는 사물의 전체를 아는 게 아니라 사물이 우리의 정신에 드러내 주는 현상만을 가지고 인식의 내용을 구성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의 인식은 현상계로 국한된다.
그럼 그 너머의 세계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칸트는 물자체가 속한 세계를 예지계(叡智界)라고 부르며 인식의 한계를 넘어선 세계라고 분명한 선을 그었다. 현상을 넘어서는 물자체에 관해서 우리의 정신은 어떠한 경험도, 지각도, 인식도 가질 수 없다. 물자체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또 과연 필요한 개념인지에 관해서는 칸트 이후의 철학에서 숱한 논란을 낳았으나, 물자체의 개념이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로부터 시작된 근대 인식론의 한계를 뜻한다는 것은 철학자들의 공통적인 견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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