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Media
정보고속도로라는 말처럼 인터넷은 도로와 같은 역할을 하는 매체, 즉 미디어다. 한자어의 매체(媒體)나 영어의 미디어(media, medium의 복수형)는 둘 다 뭔가를 매개한다는 뜻이다. 도로는 가족이 여름휴가를 가거나 화물차가 물자를 수송할 때 사용하듯이 어떻게 쓰는가가 중요할 뿐 도로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인터넷도 역시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도로와 같은 기능을 한다. 이게 일반적인 상식이다. 그러나 캐나다의 미디어 비평가인 맥루한(Marshall McLuhan, 1911~1980)의 생각은 다르다.
맥루한은 미디어를 매체로만 보는 기존의 견해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미디어는 메시지가 오가는 도로에 불과한 게 아니라 메시지 자체다. 그래서 맥루한은 미디어는 곧 메시지라고 말한다. 미디어는 메시지를 담는 그릇이라기보다 그 자체로 독자적인 메시지를 이룬다는 이야기다.
신문이나 라디오, 텔레비전 같은 전형적인 미디어는 말할 것도 없고 그밖에도 인간이 생존과 생활을 위해 필요로 하는 거의 모든 것이 미디어적인 속성을 띤다. 예를 들어 자동차와 비행기 역시 하나의 미디어다. 이것은 인간의 신체에 없는 기능을 새로이 창조한 게 아니라 인간이 본래적으로 갖고 있던 기능(즉 이동할 수 있는 기능)을 확대하고 강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석탄, 솜, 석유 등의 원료나 천연자원은 기술적 미디어다. 이것들은 사회를 형성하는 요소인 동시에 사회적 제약이기도 하다. 솜이나 석유는 라디오나 텔레비전과 마찬가지로 해당 사회의 정신생활 전체의 기본요금이 되어 있다. -맥루한, 『미디어의 이해』”
고통과 쾌락의 차이는 미묘하다. 고통과 쾌락은 각기 고유한 의미가 있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고통이 없는 게 쾌락이고 쾌락이 없는 게 고통인 경우가 많다. 과학ㆍ기술의 산물 역시 마찬가지다. 자동차, 전화 등은 처음에 생겨날 때에는 인간의 생활을 편리하게 해주는 것이었으나(쾌락의 증대), 전 사회가 점차 자동차와 전화를 중심으로 하여 재편되면서 이제는 오히려 없으면 불편한 측면(고통의 감소)이 더 커지게 되었다. 즉 처음에는 생활을 여유롭게 만들고 더 즐기기 위한 추가 요금이었으나 이제는 그 사회에서 살기 위한 기본요금으로 변한 것이다.
전통적인 미디어(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등)도 기술적 미디어와 전혀 다를 게 없다. 기존의 미디어 이론가들은 미디어에 담기는 내용만을 문제 삼았을 뿐 미디어 자체는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미디어가 필수적인 것으로 자리 잡은 현대 사회에서 그런 견해는 엄청난 착각이다.
맥루한은 텔레비전이라는 전혀 새로운 미디어 - 그의 시대에는 그랬다 - 가 등장한 것에 주목했다. 기존의 미디어관에서 보면 텔레비전은 매체일 뿐이므로 그 자체로는 중요하지 않다. 이런 입장에서는 텔레비전으로 폭력물이나 음란물을 방송하면 폭력 범죄나 성 범죄를 조장할 수 있다는 견해가 쉽게 도출된다. 하지만 얼핏 그럴듯해 보여도 실상 그런 견해는 이론적으로만이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무력하다. 텔레비전의 방송 내용을 순화시킨다고 해서 범죄율이 줄어들지는 않으니까【사실 범죄를 유발하는 요소는 사회 내에 이미 존재하는 것이고 텔레비전은 그런 사회를 반영하고 있을 따름이다】.
맥루한은 인터넷이 중시되는 디지털 문명의 시대로 접어들기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지금 살아 있다면 인터넷에 관해서도 어떤 이야기를 했을지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아마 인터넷이 단지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로의 역할만이 아니라 그 자체로 메시지를 이룬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맥루한은 곧 다가올 디지털 문명의 세상을 충분히 예견하고 있었던 셈이다.
맥루한은 신문으로 대표되는 언론 미디어를 핫(hot) 미디어로, 텔레비전을 쿨(cool) 미디어로 규정한다. 신문과 책 등 활자화된 정보는 이미 논리적으로 말끔히 정리되고 완결되어 있는 정보라는 뜻에서 핫 미디어다. 그러나 텔레비전은 그보다 훨씬 엉성한 정보를 제공하지만 그만큼 수용자의 참여도를 유발한다는 점에서 쿨 미디어가 된다【‘핫’과 ‘쿨’은 정보의 조밀도가 높으냐, 낮으냐에 따라 구분된다】. 쉽게 말해서 활자는 읽는 사람이 그 내용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만, 영상은 수용자가 훨씬 더 적극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다. 책에 대한 논평은 전문가가 담당하지만 텔레비전에 대한 논평은 어지간한 시청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게 그 반증이다.
텔레비전의 사회적 폐해가 드러나기 시작한 시대에【우리나라의 경우 1970년대에 텔레비전을 ‘바보상자’라고 부르는 현상이 생겼다】 맥루한은 과감하게 텔레비전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나섰다. 그에 따르면 텔레비전은 활자 미디어의 제약에 갇혀 있었던 인간이 처음으로 얻게 된 전(全) 감각적인 미디어다. 그래서 맥루한은 자신의 책인 『미디어의 이해』의 부제를 ‘인간의 확장’이라고 이름 지었다.
핫 미디어의 세상은 가고 쿨 미디어의 세상이 왔다. 맥루한은 텔레비전의 혁명적 파급력을 중시했으나 지금 우리는 그것을 인터넷이 가져온 디지털 문명에 대입시켜 사고할 수 있다. 지금의 인터넷이 1960년대의 텔레비전보다 훨씬 ‘쿨’하다는 것은 맥루한도 틀림없이 인정할 것이다. 인터넷의 정보는 텔레비전의 정보보다 훨씬 ‘쿨’할뿐더러 네티즌도 텔레비전 시청자보다 훨씬 적극적인 참여자다. 그러나 인터넷을 바라보는 기성세대의 시선은 전통적인 미디어를 보는 관점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맥루한의 주장은 여전히 유효하며 지금도 다시 숙고할 필요가 있다. 미디어는 메시지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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