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Partizan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다. 역사는 사건들의 객관적인 나열이 아니라 기록자의 사관(史觀)에 의해 해석되고 서술되기 때문에 승자의 관점이 더 반영되게 마련이다. 이를 두고 영국의 역사학자인 E. H. 카는 이렇게 말했다.
“흔히 사실(史實)은 스스로 말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사실은 역사가가 사실에게 말을 걸 때에만 말을 하는 것이다. 어떠한 사실에 어떠한 순서, 어떠한 문맥으로 발언을 허용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역사가의 몫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이렇게 역사가의 역사 해석이 중요하다면 역사가가 보는 시각에 따라 역사적 사건의 비중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며, 심지어 역사가의 눈에 사소하게 보이는 사건은 얼마든지 생략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전쟁 시기에 남한과 북한 양쪽 모두에서 버림을 받은 남한 빨치산의 역사가 바로 그런 경우다.
빨치산은 원래 ‘당파(黨派)’를 뜻하는 파르티(parti)라는 프랑스어에서 나온 말인데, 전쟁에서 비정규적으로 활동하는 ‘유격대(遊擊隊)’를 뜻한다【흔히 게릴라와 착각하지만 스페인어인 게릴라는 소규모 전쟁이라는 뜻이므로 유격대가 아니라 유격전을 가리키는 용어다】, 역사적으로 가장 크게 이름을 떨친 빨치산은 유고슬라비아 유격대였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독일과 이탈리아가 발칸 일대를 점령하자 유고슬라비아의 공산당 지도자인 티토(Josip Broz Tito, 1892~1980)는 80만 명의 빨치산 병력을 이끌고 파시즘에 저항하는 유격전을 활발하게 펼쳤다. 비록 정규군이 아닌 탓에 정식 전쟁에 참여하지는 못했으나 빨치산 부대는 철도와 통신망을 파괴하고 비행장을 습격하는 등 적이 점령한 지구에서 교란 작전을 벌였다. 이런 활동으로 전후 연합국은 유고슬라비아 빨치산의 업적을 인정하고 정부 수립을 지원했으며, 티토는 초대 대통령이 되어 무려 30년 가까이 재임했다.
우리나라의 빨치산은 일제강점기에 만주를 무대로 활발한 무장투쟁을 벌였다. 그 핵심 세력은 해방 후 북한의 정권을 차지했으나 그 뒤에 생겨난 빨치산은 그렇게 운이 좋지 못했다. 해방 직후부터 극심했던 좌우 이념의 대립이 한국전쟁으로 이어지자 남한의 좌익은 지리산 일대에 모여 빨치산 투쟁을 전개했다. 이들이 한창 세력을 떨칠 무렵에는 “낮에는 국군, 밤에는 빨치산이 지배한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 정도였다.
그러나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든 1952년부터 제 코가 석자인 북한은 남한의 빨치산에 아무런 지원도 하지 않았으며, 때를 같이해 남한 정권은 대대적인 빨치산 토벌에 나섰다. 결국 1950년대 후반 빨치산 부대는 괴멸되었고 살아남은 부대원들은 붙잡혀 수십 년씩 감옥에 갇혀 사는 장기수가 되었다. 이들은 남과 북의 정권 모두에게서 외면을 당하고 역사상의 좌표마저 부여받지 못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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