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셰
Cliché
글은 의미를 담고 표현하는 수단이지만 글의 모든 부분이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에 충실하게 복무하는 것은 아니다. 한 문장에도 실사(實辭)와 허사(虛辭)가 있듯이 문장들이 모여 이루는 글에도 내용과 관련이 없고 사실상 아무런 뜻도 없는 부분이 있다. 왜 이런 부분이 있을까?
편지를 쓰든 책을 쓰든 글을 쓰든 사람은 어떤 메시지를 담고자 한다. 하지만 메시지를 올바르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문법을 준수해야 하고 표현과 수식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이렇게 메시지 자체와 관계가 먼 요소들이 작용하기 때문에 글은 항상 지은이의 의도를 완벽하게 담아내지 못한다. 아무리 긴급한 용건이 있다 해도 그 용건만으로 글의 전부를 구성할 수는 없다.
글에는 드러난 것과 숨은 것이 있다. 드러난 것이 메시지라면, 숨은 것은 메시지와는 무관하지만 글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필요한 부분이다. 예를 들면 편지의 처음과 끝에 사용하는 “안녕하십니까?”와 “그럼 이만 줄입니다” 같은 표현은 그저 인사치레라는 것 이외에 메시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비즈니스 서신에서 흔히 쓰는 “댁내 무고하신지요?”라든가 “지난 번에 폐를 끼쳤습니다” 같은 어구(語句)도 실제로 상대방의 가정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거나 지난번 만남에서 결례를 했다는 뜻이 아니라 메시지를 전개하기 위한 상투적인 표현에 불과하다. 선거 유세나 자기소개서에 흔히 쓰는 “뽑아만 주신다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같은 문구는 너무도 당연한 말이기에 오히려 무의미하고 진부하다. 이런 문구들을 클리셰라고 부른다.
클리셰란 원래 서적을 인쇄할 때 사용하는 연판(鉛版)을 가리키는 프랑스어인데, 말 그대로 판에 박은 문구라는 뜻이다. 영어의 스테레오타이프(stereotype)와 어원이나 의미가 똑같다. 문장보다는 주로 두세 개의 짧은 단어들로 이루어지는 어구가 클리셰의 주종이다.
클리셰로 분류되는 진부한 표현들도 원래부터 클리셰였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유의미한 실사의 역할을 했던 문구도 자주 사용되고 표현이 관례화되면서 본래의 뜻을 잃고 의례적인 용도로만 남게 되었다. 어떤 문구가 클리셰인지 아닌지는 그것을 다른 문구로 바꿔놓고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편지의 서두에 사용하는 “댁내 무고하신지요?”라는 인사말을 전혀 뜻이 다른 “오랜만에 연락을 드립니다”로 바꿔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런 의례적인 문구는 그것을 구성하는 텍스트와는 무관하고 텍스트를 둘러싼 맥락, 즉 콘텍스트에 의해 의미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속담이나 관용어의 형식을 취하는 클리셰도 있지만, 속담과 관용어는 생겨난 시기나 기원이 불분명한 반면 클리셰는 출처가 확실하고 특정한 개인이 지어낸 경우가 많다. 정치적 구호나 광고 문구도 널리 알려지면 클리셰가 된다.
클리셰는 일상용어만이 아니라 문학용어로도 사용되는데, 뜻은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신선했던 문학적 표현도 지나치게 많이 사용되어 진부해지면 클리셰로 분류된다. 특히 상상력과 창의성이 빈곤하고 허세와 멋만 부릴 줄 아는 시인이나 작가들이 클리셰를 많이 사용한다. 여성의 아름다움을 “이슬처럼 영롱한 두 눈”, “파란 정맥이 드러나 보일 정도로 투명한 피부” 등으로 묘사하거나 분단과 통일 문제를 다룬 작품에 자주 사용되는 “한라에서 백두까지” 같은 표현들이 그런 예다.
하지만 클리셰도 적절히 사용하면 좋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처럼 위대한 문호도 클리셰를 적절히 활용하는 데 능했다. “약 모르고 오용 말고 약 좋다고 남용 말라”는 말처럼 오용과 남용의 중간을 취하면 클리셰도 좋은 수사적 표현이 된다. 이 말도 클리셰가 된 광고 문구이지만.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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