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불라 라사
Tabula Rasa
사람의 체질이나 성격을 결정하는 요소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타고난 것, 즉 유전적 요소이고 다른 하나는 환경이다. 이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아마 개인마다 편차가 있을지도 모른다. 유럽 대륙에서 합리론이 발달하고 영국에서 경험론이 발달할 무렵에도 그와 비슷한 쟁점이 있었다. 인식 과정에는 주체와 대상이 관여된다. 주체를 강조하면 인간 내부의 인식 기능을 부각시키게 되고, 대상을 강조하면 외적인 경험을 중시하게 된다. 둘 중에서 어느 것이 인식에서 더 중요한 기능을 할까?
근대 철학의 포문을 연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는 인간에게는 타고난【구체적으로 말하면 신이 부여한】 본유관념(本有觀念, innate idea)이라는 일종의 장치가 있어 대상을 인식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경험론자들은 그런 게 있을 리 없다고 반박했다. 특히 경험론의 시조인 로크(John Locke, 1632~1704)는 인간의 정신에는 원래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마음을 아무 글자도 없고 아무 생각도 담겨 있지 않은 백지라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채울까? 이에 대한 대답은 하나다. 그것은 경험이다. -『인간오성론』”
여기서 나온 말이 바로 타불라 라사, 즉 ‘흰색의 서판’이다.
로크는 인간이 백지 상태로 태어난다고 보았다【어찌 보면 ‘백치 상태’와 비슷하다고 할 수도 있다】. 인간은 어떤 생각이나 관념을 머릿속에 지니고 태어나는 게 아니라 백지처럼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머리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뜻이다.
사실 데카르트가 본유관념이라는 개념을 상정하게 된 것은 나름대로 고심한 결과였다. 예를 들어 “2+3=5” 같은 지식은 누구나 다 옳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이런 종류의 지식은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게 아니다. 경험은 하는 사람마다 다르게 마련이고, 심지어 내가 하는 경험조차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절대적인 지식을 주지는 못한다.
그런데 로크의 생각은 반대였다. 인간은 경험을 통해서만 사고할 수 있으며, 경험이 없으면 아무런 사고도 불가능하다는 게 그의 이론이었다. 인간은 타불라 라사만을 가지고 태어나며, 경험이 그 빈 서판에 글이나 그림을 남기는 것이다. 그 글이나 그림이 바로 인간의 사고이고 판단이다.
인간의 정신을 빈 서판에 비유한 원조는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322)였다. 그는 인간의 정신이란 수동적인 것이므로 밖에서부터 어떤 자극이 주어져야만 정신의 속이 채워진다고 믿었다. 감각을 통해 얻는 자극을 인식함으로써 비로소 인간의 정신은 능동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또한 로마시대의 스토아 학파도 감각을 통한 경험이 있기 전까지는 정신활동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로크는 우리가 외부 대상을 직접 경험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외부 대상에 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 대상의 본질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마음속에 불러일으킨 관념이다. 또한 그 대상의 관념은 외부 대상이 우리 마음속에 반영되어 저절로 형성되는 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외부 대상을 감각해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렇게 인식 과정에 능동성을 부여한 점에서 로크는 유연한 경험론자였다. 로크의 타불라 라사를 극단적인 경험론의 상징으로 몰아간 것은 오히려 후대의 철학자들이다.
만약 메모리만 갖춰진 백지 상태의 컴퓨터라면 그저 입력되는 자료를 기억이나 할 뿐 더 이상의 기능은 수행하지 못할 것이다. 정보를 처리하고 계산하는 중앙처리장치가 내장되어 있어야 컴퓨터는 효율적인 기능을 할 수 있다. 이 점을 감안한다면 로크의 타불라 라사보다는 데카르트의 본유관념 쪽에 힘이 더 실린다. 경험론의 상징인 타불라 라사와 합리론의 상징인 본유관념은 훗날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에게서 종합된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인용
'어휘놀이터 > 개념어사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개념어 사전 - 파시즘(Fascism) (0) | 2021.12.18 |
---|---|
개념어 사전 - 트라우마(Trauma) (0) | 2021.12.18 |
개념어 사전 - 키치(Kitsch) (0) | 2021.12.18 |
개념어 사전 - 클리셰(Cliché) (0) | 2021.12.18 |
개념어 사전 - 콤플렉스(Complex) (0) | 2021.1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