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공동체에서의 삶
1. 비합리적으로 보이던 타공동체의 풍속들
공동체들은 시간적으로 혹은 공간적으로 상이한 가치체계들을 가지고 유지되어 왔다. 봉건시대에서 여자가 재혼하는 것은 악으로 그리고 여자가 정절을 지키는 것은 선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여자의 재혼을 권장하는 것이 선이고, 여자의 재혼을 금지하는 것은 악으로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상이한 규정들과는 달리 모든 공동체들이 기본적으로 선/악이라는 이분법적 구조를 공유하고, 이 구조에서 자신들이 선이라고 부르던 내용을 절대화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모든 공동체들의 규칙은 내용은 상이하다고 할지라도 그 구조는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관념적으로 보면 모든 공동체의 선/악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자의적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어떤가? 우리는 특정 공동체에 살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특정한 규칙을 따를 수밖에 없다. 공동체의 규칙은 엄연한 현실적 물리력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일부일처제라는 것은 하나의 특수한 역사적 현실일 뿐이고, 앞으로도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해보자. 그러나 이 생각을 현실화해서 일부일처제를 어기고 몇 명의 아내를 가진다고 하자. 그러면 우리는 바로 법의 제재를 받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지탄(指彈)의 대상이 되고 말 것이다.
「내편」 「인간세(人間世)」편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많은 연구자들이 분석을 피하고 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그것은 장자가 공자의 입을 빌려서 공동체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말하는 이야기다.
세상에는 지킬 것이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명(命)이고, 다른 하나는 의(義)다.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 것은 명이므로 마음에서 지울 수가 없다.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은 의인데 어디를 가나 임금이 없는 데는 없다. 하늘과 땅 사이 어디를 가도 이 두 가지를 피할 수는 없기에 이를 ‘크게 경계할 것[大戒]’이라 한다. 그러므로 자녀가 언제 어디서나 부모를 편안하게 해드리는 것이 효의 지극함이고, 신하가 언제 어디서나 임금을 편안하게 섬기는 것이 충의 성대함이다. 자기 마음을 부릴 때 슬픔과 기쁨이 눈앞에 나타나게 하지 말고, 불가능한 일을 어쩔 수 없는 일로 여기고 운명으로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덕의 지극함이다. 신하나 자식 된 사람이 부득이한 일을 당하면 사물의 실정에 맞게 행하면서, 자신을 잊어버려야 한다. 삶을 기뻐하고 죽음을 싫어할 겨를이 어디 있겠는가?
天下有大戒二: 其一命也, 其一義也. 子之愛親, 命也, 不可解於心; 臣之事君, 義也, 無適而非君也, 無所逃於天地之間. 是之謂大戒. 是以夫事其親者, 不擇地而安之, 孝之至也; 夫事其君者, 不擇事而安之, 忠之盛也; 自事其心者, 哀樂不易施乎前, 知其不可奈何而安之若命, 德之至也. 爲人臣子者, 固有所不得已. 行事之情而忘其身, 何暇至於悅生而惡死!
분명 장자는 지금 충효(忠孝)라는 유가적 이념을 따를 것을 권고하고 있다. 그래서 모든 세속적인 것들로부터의 초탈과 자유를 강조하는 철학자로 장자를 이해하고 있던 기존의 연구자들은 이 구절을 애써 외면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을 읽으면서 우리는 앞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조릉에서 터득한 장자의 깨달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조릉에서 장자는 “다른 곳의 풍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곳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入其俗, 從其令]”고 깨달았었다. 이런 깨달음은 사실 진부한 것 같지만 그 함축하는 뜻은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 보자. 우리가 다른 공동체에 들어가게 되면 그 공동체의 규칙들이 처음에는 비합리적이고 기이한 것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길러준 공동체의 규칙에 길들여져서 그것만이 자명하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자신의 삶의 형식이 보편적이라고 맹신하면서 살고 있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