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삶에 조우할 수밖에 없는 타자를 사유하다
장주로 기록된 우화들 가운데 장자철학이 지닌 문제의식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조릉(雕陵)이라는 사냥터에서 장자가 경험했던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산목(山水)」편에 나오는 다음 이야기다.
장주(莊周)가 조릉의 울타리 안에서 노닐고 있을 때, 그는 남쪽에서 온, 날개의 폭이 일곱 자이고 눈의 크기가 한 치나 되는 이상한 까치를 보았다. 그 까치는 장주의 이마를 스치고 지나가 밤나무 숲에 앉았다.
莊周游於雕陵之樊, 睹一異鵲自南方來者. 翼廣七尺, 目大運寸, 感周之顙, 而集於栗林.
장주는 말했다. “이 새는 무슨 새인가? 그렇게 큰 날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날아가지 못하고, 그렇게 큰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를) 보지도 못하는구나.”
莊周曰: “此何鳥哉! 翼殷不逝, 目大不睹.”
장주는 자신의 치마를 걷어올리고 걸음을 재촉하면서, 석궁을 들고 그 새를 겨냥했다. 그때 그는 한 마리의 매미를 보았다. 그 매미는 방금 아름다운 그늘을 발견해서 그 자신[其身]을 잊고 있었다. 나뭇잎 뒤에 숨어 있던 사마귀 한 마리가 (자신이 얻을) 이익 때문에 자신이 노출되었다는 것을 잊고서 그 매미를 낚아챘다. (장자가 잡기 위해 석궁으로 겨냥하고 있던) 그 이상한 까치도 (자신이 얻을) 이익 때문에 자신의 생명[其形]을 잊고서 사마귀를 잡으려는 중이었다.
蹇裳躩步, 執彈而留之. 睹一蟬方得美蔭而忘其身. 螳螂執翳而搏之, 見得而忘形. 異鵲從而利之, 見利而忘其眞.
장자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말했다. “아! 사물들은 본질적으로 서로에게 연루되어 있고, 하나의 종류가 다른 종류를 부르는구나!”
莊周怵然曰: “噫! 物固相累, 二類相召也.”
아니나 다를까 그가 자신의 석궁을 던지고 숲으로부터 달려 나왔을 때, 사냥터지기가 그에게 욕을 하면서 달려왔다. 장주는 집으로 돌아와서 3개월 동안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인저(藺且)가 물었다. “선생님께서 무엇 때문에 요사이 밖으로 나오시지 않으십니까?”
捐彈而反走, 虞人逐而誶之. 莊周反入, 三日不庭. 藺且從而問之, “夫子何爲頃間甚不庭乎?”
그러자 장주가 대답했다. “지금까지 나는 외부로 드러나는 것[形]만을 지켰지 나 자신을 잊고 있었다. 나는 혼탁한 물로 비추어 보았을 뿐 맑은 연못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게다가 나는 선생님으로부터 이미 ‘다른 풍속에 들어가서는, 그곳에서 통용되는 규칙을 따르라’고 하신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얼마 전 내가 조릉에서 놀고 있을 때, 나는 내 자신을 잊었다. 이상한 까치가 나의 이마를 스치고 날아갈 때 나는 밤나무 숲을 헤매면서 나의 생명을 잊었고, 밤나무 숲의 사냥터지기는 나를 범죄자로 여겼다. 이것이 내가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는 이유다.”
莊周曰: “吾守形而忘身, 觀於濁水而迷於淸淵. 且吾聞諸夫子曰: ‘入其俗, 從其令.’ 今吾游於雕陵而忘吾身, 異鵲感吾顙, 游於栗林而忘眞. 栗林虞人以吾爲戮, 吾所以不庭也.”
매미를 노리는 사마귀, 그 사마귀를 노리는 이상한 까치, 그리고 그 까치를 노리는 장자. 장자는 이런 연쇄적 과정에 깜짝 놀라 석궁을 버리고 그 자리를 피해 되돌아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그도 그곳을 지키던 사냥터지기의 노림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장자는 조릉에서 각 개체들이 타자와 연루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깨달음의 귀결로 장자는 타자와의 연루됨을 끊어 버리려고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끊어버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이런 연루됨은, 서로를 죽이는 것과 같은 좋지 않은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살리는 것과 같은 좋은 관계로 전화되어야만 한다. 장자는 유일하게 이름이 알려져 있는 제자인 인저에게 ‘자신은 혼탁한 물로 세계를 비추어 보았지, 맑고 깨끗한 연못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음[觀於濁水而迷於淸淵]‘을 토로한다. 여기서 혼탁한 물[濁水]이 선입견의 은유라면, 맑은 연못[淸淵]은 그런 고착된 자의식과 선입견이 제거된 맑은 마음을 상징한다. 결국 장자는 타자와 연루되어 살아가는 삶이 만약 맑은 연못과 같은 마음으로 이루어진다면, 결코 자신의 삶을 파괴하지 않을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그는 자신의 스승에게 들은 말, 즉 ‘다른 풍속 속에 들어가면, (자신이 살던 곳의 풍속을 버리고) 그 풍속의 규칙을 따르라[入其俗, 從其令]‘라는 말을 언급한다. 고요하고 맑은 물이어야 섬세하게 자신에게 비치는 모든 것을 그대로 비출 수 있듯이, 다른 풍속에 들어가서도 맑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그 풍속의 규칙을 따를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장자의 깨우침이 함의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그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거리가 있다. 통속적인 장자 이해에 따르면 그는 일체의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초탈한 자유를 우리에게 권고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유한성을 생각해볼 때, 일체의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초탈한 자유는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다. 또 그것이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단지 관념적으로만 그럴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기억해야만 하는 것은 장자의 시선에는 다른 풍속과 그 풍속을 지배하는 다른 규칙이 들어와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가 결코 정신적인 자유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조우할 수밖에 는 타자를 사유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