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타자를 만나고 나서야 내가 속한 공동체가 드러난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물고기가 물 속에서는 물이나 자신이 물고기라는 사실도 의식하지 않지만, 물 바깥에 나와서는 물을 의식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물이 없으면 살 수 없는 물고기라는 것을 의식한다는 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자신의 공동체의 규칙을 의식하기 위해서는 다른 공동체와 조우해야만 한다. 문제는 다른 공동체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공동체의 규칙에 병적으로 집착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데 있다. 우스갯소리로 외국에 가봐야 애국자가 된다는 말의 의미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런 애국자가 다른 나라에 대해 배타적인 경향을 보인다는 점을 우리는 쉽게 간과하고 있다. 사실 애국자와 다른 나라를 미워하는 것은 동시적인 사태다.
조선말기에 우리나라에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려고 들어온 적이 있다. 그들은 조선 사람들의 삶의 규칙인 제사를 금기시했고, 기독교적인 삶의 규칙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이들 선교사들과 기독교도들은 조선정부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죽임을 당했다. 지금 우리는 선교사들의 이런 죽음을 순교라고, 혹은 아름다운 희생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서구화된 결과로 인해 이런 사후적인 평가가 가능하게 된 것이지, 만약 우리가 유교사회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면 이들은 여전히 죽어 마땅한 금수들로서 간주되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죽은 선교사들과 구별되는 사람이 바로 중국에 선교사로 들어왔었던 마테오 리치(Matteo Ricci)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중국의 유교적 삶의 규칙을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중국에 들어오기 전 마카오에서 오랫동안 중국어를 배웠고, 중국문화를 익혔다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사람은 그가 누구든지 간에 갓 태어난 어린아이가 아니라면 어떤 특정 공동체에 속해 있는 사람일 것이다. 만약 그 사람이 어려서 늑대 곁에서 자랐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늑대라는 공동체의 삶의 규칙에 속한 사람일 것이다. 이 경우 우리는 자신이 인간공동체에 속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따라서 공동체의 경계는 항상 유동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어디서나 타자와 만날 수 있고 그럴 때마다 공동체를 상이하게 의식하게 된다. 왜냐하면 공동체는 단지 타자와의 차이를 통해서 사후에 확인되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공동체는 크게는 인간과 동물 사이, 문화와 문화 사이, 철학과 물리학 사이, 가족과 가족 사이의 차이에서 사후적으로만 규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동물과 만나게 될 때 우리는 인간 공동체에 속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고, 미국문화와 만나게 될 때 우리는 한국 문화에 속해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고, 전라도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자신이 경상도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고, 물리학자와 만나게 될 때 우리는 철학자 공동체에 속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는 말이다. 결국 우리가 속한다고 자임하는 공동체는 항상 우리가 어떤 타자와 만나느냐에 의해 사후에 결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1806년 어느 프랑스 화가의 판화 작품으로, 제목은 「한국의 남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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