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말의 의미는 타자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는 장자가 언어를 부정하고 있다는 성급한 판단을 이제 비판할 수 있게 되었다. 발제 원문의 시작 부분부터 장자는 다음과 같이 분명히 말하고 있다. ‘언어는 숨을 쉬는 것이 아니다[言非吹也].’ 왜냐하면 언어라는 것은 말하려는 것, 또는 의미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장자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논의를 더욱더 심화시킨다. ‘이런 말하려는 것 또는 의미하는 것이 있다고 해도, 만약 우리가 말하려고 한 것의 의미가 확정되지 않았다면,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여기서 한 가지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문이 생긴다. 주체가 언어를 통해 무엇인가를 의미하고 있지만 그가 의미하려는 것이 확정되지 않았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분명 주체 입장에서 의미는 이미 확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질문은 불가피한 것이다. 그래서 ‘의미가 확정되지 않았다면[其所言者特未定也].’이라는 장자의 진술은 무척 중요하다. 왜냐하면 지금 장자는 언어를 숙고하기 위해서 타자를 도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장자는 지금 다음과 같은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 만일 주체가 언어를 통해서 자신이 의미하려는 것을 확정하였지만 타자가 그런 주체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면, 주체가 사용한 언어는 언어일 수 있겠는가?
말하려는 사람에게는 분명 전달하려는 의도나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에게 말과 의미 사이에는 확정된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문제는 말을 듣는 상대방(= 타자)의 지위다. 의미는 항상 타자와의 역동적인 관계에서, 즉 타자에 의해 결정되기 마련이다. 만약 어떤 강사가 진지한 말을 할 때 청중이 웃는다면 그의 강의는 농담이 될 것이고, 반대로 농담을 했는데 청중이 진지한 표정을 보인다면 그의 강의는 진부한 강의가 될 것이다. 이처럼 듣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의 말을 결정할 힘을 가지고 있다. 어떤 특정한 전언을 전달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의 의미는 항상 타자에 의해 결정되기 마련이다. 물론 이 강사는 자신이 모든 것을 다 말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강사는 나중에 그들의 보고서나 시험 답안지를 보고서 자신의 이야기가 전혀 다르게 이해되었고 나아가 다른 식으로 전개되는 경험을 곧 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상대방이 말하는 사람과 같은 공동체에 속하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의 여부다. 일인칭적으로는 말과 그것의 의미 사이에는 확정된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타자를 도입하게 되면 이 확정된 관계는 동요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언어 규칙이 상이한 이방인에게 말을 건넸지만 그 이방인은 우리가 한 말의 의미를 전혀 모를 때, 우리가 한 말은 과연 말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 경우 우리 입강에서는 분명히 말을 한 것이지만, 이방인의 입장에서는 분명 말을 하지 않은 것과 다름이 없다. 역으로 우리가 말하려고 하는 것이 확정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예를 들어 우리와 같은 공동체에 속한 사람이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의미 있는 행동을 했을 때를 생각해 보자. 이 경우 우리 입장에서도 상대방의 입장에서도 분명 말은 의미 있게 작동한 것이다. 이처럼 말과 말하려는 것, 언어와 의미 대상 사이에는 직접적인 필연성이 없다. 왜냐하면 언어와 그 의미는 항상 말을 듣는 타자와 관계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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