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Ⅳ. 말과 길 - 3. “사물들은 우리가 그렇게 불러서 그런 것처럼 보인다[物謂之而然].”, 『자본론』 이전과 이후의 노동자 본문

고전/장자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Ⅳ. 말과 길 - 3. “사물들은 우리가 그렇게 불러서 그런 것처럼 보인다[物謂之而然].”, 『자본론』 이전과 이후의 노동자

건방진방랑자 2021. 7. 3. 12:55
728x90
반응형

3. “사물들은 우리가 그렇게 불러서 그런 것처럼 보인다[物謂之而然].”

 

 

1. 자본론이전과 이후의 노동자

 

 

다음으로 언어의 의미 계열이 무엇을 함의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장자는 외물들은 우리가 그렇게 불러서 그런 것처럼 보인다[物謂之而然]”라고 말하고 있다. 장자에 따르면 우리 앞에 분절되고 구분되어 현상하는 어떤 대상[]도 그런 분절과 구분을 본질적으로 자신의 본성으로 가지고 있지는 않다. 단지 대대(待對)의 논리로 작동하는 언어가 특정 공동체나 이로부터 구성된 자의식에 의해 사용됨으로써 그 대상은 그런 논리에 의해 분절되어 현상하는 것일 뿐이다. 이 말은 우리가 어떤 타자에 대해 이러저러하다고 부여한 이름이나 속성은 본질적으로 그 타자와는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을 함축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과일을 석류라고 부른다[]고 하자. 이제 석류라는 이름은 이 과일을 지시하는 개념이 된다. 이렇게 어떤 사물에 명칭을 부가해서 부르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깊게 우리의 몸에 각인된다. 그 증거로 우리는 자신이 석류라는 이름만 들어도 입에 침이 고이게 된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 쉽게 석류라는 개념의 자의성을 망각하게 된다. 다른 문명권의 사람들도 과연 석류라는 음성을 들었을 때, 우리와 같은 반응을 보일까?? 그렇지 않다. 그들은 예를 들면 석류가 아닌 파머그래닛(pomegranate)이라고 들었을 때에만 그런 반응을 보일 것이다.

 

우리는 단지 자신이 명명한 것에서 다시 그 이름을 재발견하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언어를 매개로 하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타자와 자의적인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일체의 매개도 거부하고 동시에 우리와 전적으로 무관한 타자 자체는 칸트의 말을 빌리면 초월적 가상에 불과한 것이다. 여기서 타자와 맺는 자의적 관계란 우리가 타자와 아무렇게나 관계를 맺어도 된다는 것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사정은 그 반대인데, 왜냐하면 이 자의성은 공동체의 규칙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언어의 자의성은 공동체의 수준에서만 말해질 수 있는 것이다. 특정 공동체에 태어나서 맹목적으로 언어의 규칙을 배운 우리에게 언어는 결코 회피할 수 없는 실존의 조건들이자 한계로서, 즉 필연적인 것으로서 현상한다. 결국 장자가 외물은 우리가 그렇게 불러서 그런 것처럼 보인다[物謂之而然]”고 할 때, 그는 지금 개체의 수준에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수준에서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언어에 대한 장자의 사유는 이 위()라는 글자에 그 관건을 두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특정 공동체를 벗어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동체 자체를 벗어날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특정한 언어 사용에서 자유로울 수는 있지만 언어 자체를 폐기할 수는 없다. 여기에 장자가 언어는 우리가 어디에 있든 부정될 수 있겠는가[言惡乎存而不可]?”라고 말한 의미가 있다. 장자는 지금 무조건적으로 언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언어의 불가피성, 공동체의 규칙이라는 우리의 실존적 조건을 기술하고 있다. 이 점에서 장자는 언어의 한계와 그 가능성을 사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언어 사용의 규칙들이나 개념들이 변할 때, 그것들이 조직하는 세계도 우리에게는 다르게 체험된다. (John Searle)은 다음과 같이 말한 적

이 있다.

 

 

세계를 경험할 때, 우리는 경험들 그 자체를 형성하도록 돕는 언어적 범주들을 통해 세계를 경험한다. 세계는 우리에게 대상들과 경험들로 분리된 채 도래하지는 않는다. 대상으로 간주되는 것은 이미 우리의 표상(representation) 체계의 기능이고, 우리가 자신의 경험 속에서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은 그런 재현 체계에 의해 영향 받고 있다. () 실재(reality)라는 우리의 개념은 우리의 언어적 범주들의 문제다.

 

 

이런 생각에 따르면 우리가 자신이 가진 개념적 체계들을 변화시킬 때 우리는 다른 세계를 가지게 될 수도 있다. 이런 예로는 보이지 않은 손에만 의지했던 고전경제학을 비판하면서 마르크스(K.Marx)자본론을 썼을 때, 노동자들은 전혀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다시 말해 자본론이전의 노동자들과 이후의 노동자들은 질적으로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인용

목차

장자

원문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