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관계로 파악하되 동일성을 놓지 않았던 중국철학
앞에서 우리는 서양 철학과 달리 중국 철학은 관계를 강조한다고 말한 바 있다. 중국 철학에서의 관계 논리를 대대(待對)의 논리라고 부르도록 하자. 여기서 대대라는 말은, ‘의존한다’는 뜻의 대(待)라는 말과 ‘짝한다’라는 뜻의 대(對)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서로 의존하면서 짝한다’는 의미다. 『도덕경』 2장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있음과 없음은 서로를 낳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를 이루고, 깊과 짧음은 서로를 드러나게 한다[有無相性, 難易相成, 長短相較].” 한 유한자는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다. 이 말은 역설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현상에 대한 규정이 항상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관찰된다. 예를 들면 계란은 수박과 있으면 작다는 규정을 받지만, 콩과 있으면 크다는 규정을 받는다. 관계를 떠나서는 그다. 작다라는 식의 규정은 거의 의미가 없는 것이다.
어떤 유한자 X는 Y와의 관계 하에서 개념 쌍[대대개념]의 규정을 수용한다. 만약 X가 ‘크다/길다/있다(大/長/有)’는 규정을 받으면, 이 X와 조우한 Y는 ‘작다/짧다/없다(小/短/無)’라는 규정을 받게 된다. 흔한 이해에 따르면 노자의 사상은 ‘언어로는 실재를 기술할 수 없다’는 언어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서양의 개념적 논리에 입각해서 바라본 견해일 뿐이다. 만약 누군가가 노자에게 ‘계란은 크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이런 식의 진술에 대해서는 부정적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계란은 콩보다 크다’라고 한다면, 노자는 이 진술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노자를 포함해서 중국 철학 전통에서 진술에 등장하는 크다라는 술어는 플라톤 식으로 큼 자체(the large itself)와 같은 개념의 동일성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중국 철학 전통에서 개념적 규정은 항상 대대의 논리에 따라 진행된다. 다시 말해 어떤 것에 크다는 규정이 부여되면, 그것과 관계하는 다른 것에는 이미 작다는 규정이 부여된다는 것이다.
만일 어떤 개별자가 두 개의 다른 개별자와 동시에 관계하고 있다면, 그 개별자는 동시에 작다와 크다로 규정될 수 있다. 이런 예로는 사과가 딸기와 수박과 동시에 관계하고 있다면, 이 사과는 작다와 크다고 동시에 규정될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선생님과 관계하면 제자로 규정되고, 학생들을 만나면 선생님으로 규정된다. 또 나는 나의 아버지와 만나면 자식으로 규정되고, 내 자식과 만나면 아버지라고 규정된다. 이처럼 자식이라는 규정은 아버지라는 규정과 분리불가능하게 상호의존되어 있는 규정이고, 선생님이라는 규정도 이와 마찬가지로 제자라는 규정과 대대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태극 무늬도 음과 양이라는 상이한 규정을 동시에 품고 있게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중국 전통의 윤리 중 유명한 삼강오륜(三綱五倫)도 바로 이런 대대의 논리를 전제로 하고 있다. 삼강은 군위신강(君爲臣綱)ㆍ부위자(父爲子綱)ㆍ부위부강(夫爲婦綱)을 말하는데, 이것은 글자 그대로 임금과 신하, 어버이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다. 또 오륜은 오상(五常) 또는 오전(五典)이라고도 하는데, 부자유친(父子有親)ㆍ군신유의(君臣有義)ㆍ부부유별(夫婦有別)ㆍ장유유서(長幼有序)ㆍ붕우유신(朋友有信)의 다섯 가지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도(道)는 친애함(親愛)에 있으며, 임금과 신하의 도리는 의리에 있고, 부부 사이에는 서로 침범치 못할 구별이 있으며,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는 차례와 질서가 있어야 하며, 벗 사이의 도리는 믿음에 있음을 뜻한다. 이처럼 삼강오륜도 기본적으로 대대의 논리로 점철되어 있다. 군신, 부자, 부부, 장유, 친구 사이는 기본적으로 사회에서 가능한 관계를 모두 망라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중국 철학의 모든 개념 규정은 대대 관계에 있는 다른 개념과 하나의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의미를 갖고 작동하는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이런 대대 관계는 공자, 노자, 『주역』 모두에 공통된 전제다. 표면적으로 서양 철학에서는 모순을 근원적으로 해소해서 동일성을 추구했다면, 중국 철학은 이것을 근본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중국 철학도 명확하게 동일성을 추구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중국 철학도 가능성[潛ㆍ隱ㆍ陰]과 현실성[顯ㆍ陽]의 논리를 도입해서 모순을 대대의 논리로 배치해 해소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모순을 배제하려는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이런 가능성과 현실성의 논리는 출현될 수 없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어떤사람이 지금 아버지를 만났을 때 자식이라는 규정과 동시에 아버지라는 규정을 동시에 실현해서는 안 된다. 이 경우에는 아버지라는 규정은 가능성의 층위에만 머물러 있어야 한다.
결국 중국 철학 일반의 고유성을 규정한 제자백가들도 서양 철학 일반의 고유성을 규정한 그리스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모순을 피하려고 했다고 말할 수 있다. 단지 서양 철학자들과 중국 철학자들 사이에는 모순을 피하려는 해법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예를 들면 어느 한 시점에서 장미가 붉다고 할 때, 그리스 철학자들은 붉은 장미꽃은 붉을 뿐이지 노랄 수 없다는 것에 만족한다. 반면 선진(先秦) 철학자들은 붉은 장미꽃도 언젠가 시들어 노랗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따라서 이들은 붉은 장미에게서 노랑은 다만 숨어 있다[潛]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장미꽃이 동시에 노랗거나 붉다는 모순을 중국 철학자들도 수용하지는 않는다. 이 점에서 이들 중국 철학의 철학자들은, 서양 철학의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동일성을 추구했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