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원환의 중심을 얻어라
갓난아이들은 결코 물을 물로 대상화하지 않는다. 이 말은 갓난아이들이 ‘나는 나다’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갓난아이들은 조우하는 타자에 맞게 자신을 조절할 수 있는 것이다. 조우하는 타자에 맞게 자신을 조절할 수 있기 위해서, 주체는 기본적으로 유동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장자가 생각하는 우리의 본래적 마음은 바로 타자와 소통할 수 있는 유동성을 가지고 있는 자기조절의 역량이라고 할 수 있다. 물은 네모난 그릇에 담기면 네모난 모양으로 드러나게 되고, 둥근 그릇에 담기면 둥근 모양으로 드러난다. 또 물은 도저히 묘사하기 힘든 복잡한 모양의 그릇이라고 해도 그 그릇에 담기면 그 복잡한 모양으로 그대로 드러난다. 아이의 마음이 이처럼 유동적인 물과 같다면 어른들의 마음은 어떤가? 그들의 마음은 마치 물이 둥근 그릇에 담긴 뒤 얼어서 둥근 모양을 계속 띠고 있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이 둥근 얼음은 네모난 그릇을 만나게 되면 갈등과 좌절을 겪을 수밖에 없다. 자신의 둥긂을 자기 동일성으로 생각하고 있는 얼음에게 네모난 그릇은 자신의 동일성을 파괴하려고 하는 공포의 대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이런 타자에 대한 공포는 둥근 얼음이 자신의 동일성이 둥긁에 있다고 착각하는 데서 기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둥근 얼음의 둥긁은 이전의 타자와 조우해서 생겼던 흔적이 굳어져서 생긴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른들이 물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들이 육지와 소통했던 흔적이 굳어져서 고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른들이 갖는 ‘나는 나고 물은 물이다’라는 자의식의 내용 중 ‘나는 나다’라는 규정은 사실 ‘나는 육지에서 걷는 사람이다’라는 내용으로 풀이될 수 있다. 이처럼 자시(自是)하는 마음은 기본적으로 유동적 자기조절 역량이 굳어져 버린 흔적에 다름 아니다. 장자가 자피(自彼)하는 의식, 즉 무대의 마음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어른으로서 우리가 갓난아이와 같은 유동성을 회복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관건은 고착된 자의식, 즉 자시(自是)하는 마음을 버리는 데 있다. 장자는 이런 마음을 자피(自彼)하는 마음이라고 혹은 도추(道樞)라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장자가 권고하는 ‘원환의 중심을 얻은 것[得環中]’ 또는 비움[虛]이 일종의 정적주의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런 고요함이 역동성의 이면이라는 것, 비움이 타자와의 민감한 소통과 동시적 사태일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장자는 무대의 마음이 무한한 것에 대응할[應無窮]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무한[無窮]은 마음 밖의 타자의 복수성과 다양성을 함축하는 무한이다. 이런 타자의 복수성과 다양성에 기인하는 무한성을 현실적 무한성(actual infinity)이라고 부르도록 하자. 마음이 이런 타자의 무한성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이라면 마음도 당연히 무한성을 담보하게 되는데, 우리는 이런 무한성을 잠재적 무한성(virtual infinity)이라고 부를 수 있다. 거울을 비유로 들어보자. 거울 자체의 밝게 비출 수 있는 역량이 잠재적 무한성을 비유한 것이라면, 거울 바깥의 다양하고 복수적인 타자들이 현실적 무한성을 비유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정한 거울의 상, 즉 사과를 비치고 있는 거울의 상은 거울 자체의 밝게 비출 수 있는 역량과 거울 바깥의 사과로 규정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수영을 잘 하는 갓난아이의 마음은 자기 조절의 역량과 이 갓난아이 바깥의 물로 동시에 규정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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