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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Ⅵ. 꿈과 깨어남 - 1. 공자 사상의 의의, 주체에게 가해지는 폭력 본문

고전/장자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Ⅵ. 꿈과 깨어남 - 1. 공자 사상의 의의, 주체에게 가해지는 폭력

건방진방랑자 2021. 7. 3.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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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체에게 가해지는 폭력

 

 

가장 평화적이고 우호적이어 보이는 서의 원리에 잠재하고 있는 폭력성은 단지 타자에게만 가해지는 것이겠는가? 어쩌면 공자 사상의 핵심에는 폭력이라는 테마가 구조화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공자는 우리가 바람직하게 살려면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라고 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공자의 말대로 산다면, 우리의 내면에 예는 행동과 판단의 기준으로, 프로이트가 말한 초자아(superego)로 자리를 잡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홀로 있어도 이 초자아의 검열을 받게 된다. 예에 맞는 행동을 한 나 자신을 대상화하면서 우리는 기뻐하고, 예에 어긋나게 행동한 나 자신을 대상화하면서 우리는 스스로 부끄러워한다. 공자는 이런 메커니즘을 자신을 이기고 예를 회복(또는 실천)하는(克己復禮) 과정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공자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알게 된다. “나는 그 잘못을 보고 내면에서 스스로 재판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吾未見能見其過而內自訟者也].” 여기서 잘못 또는 허물[]과 재판하다[]라는 개념은 무척 중요하다. 왜냐하면 공자의 반성은 기본적으로 법적인 구조로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판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피고ㆍ검사ㆍ변호인ㆍ재판관ㆍ법조문 등이 필요하다. 이것은 공자가 권고하는 자기반성에도 통용되는 구조다. 결국 스스로 벌이는 재판 놀이로서 자기반성은 자아를 이중삼중으로 분열시키게 된다. 이제 반성하는 나는 피고로서의 나, 검사로서의 나, 변호인으로서의 나, 최종적으로 판단을 내리는 재판관으로서의 나로 산산이 부서진다. 그러나 이런 재판으로서의 반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재판과 판단의 최종 근거로서의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에 맞지 않으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그리고 행동하지도 않는다는 공자의 이야기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이 예는 보편타당한 올바른 법조문일 수 있을까? 공자의 보수성은 바로 진정으로 되물었어야 하는 이런 질문을 결코 제기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표면적으로 공자는 인간의 자기반성적 역량을 긍정하는 것 같지만, 인간의 반성적 역랑은 단지 내면화된 예라는 법조문에 따라 자신을 심판하는 역량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내면화된 예는 결국 주체에게 가해진 폭력에 불과한 것이다. 왜냐하면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행동하지도 않으면서내면화된 예는 결국 삶의 다른 지평들을 부정하고 억압하는 폭력으로 작동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예의 내면화의 과정이 결코 자기 자신에 대한 폭력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왜냐하면 이렇게 예를 내면화한 사람에게는, 이제 다른 사람들도 이 예의 기준에 따라 심판할 수 있는 심판권이 부여되기 때문이다. 공자는 능숙하게 자신을 재판하는 사람만이 타자를 좋아할 수도 미워할 수도 있다[能好人, 能惡人]”고 말한다.

 

이제 나 자신을 재판하던 사람이 타자도 재판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나를 수양하고 남을 다스린다[修己治人]’유학사상의 메커니즘이다. 그러나 결국 이것은 내면화된 예를 타자에게 무차별적으로 적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것은 자신에게 가했던 폭력을 어느 사이엔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타자에게 강요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내면화된 규범(= 초자아)은 타자에 대한 폭력의 원인으로 작동하기 쉽다. 그러나 사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내면화의 메커니즘이 주체 자신의 삶을 부정한다는 데 있다.

 

결국 타자의 삶을 부정하기 위해서 주체는 우선 자신의 삶을 부정해야만 한다. 역으로 주체는 자신의 삶을 긍정하기 위해서 타자의 삶을 긍정해야만 한다. 중요한 것은 내면화된 규범으로서 초자아는 이런 삶의 긍정 속에서는 존속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인용

목차

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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