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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XI. 의미와 자유 - 1. 의미란 무엇인가?, 철학적 성찰에 따라 사람의 의미는 변한다 본문

고전/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XI. 의미와 자유 - 1. 의미란 무엇인가?, 철학적 성찰에 따라 사람의 의미는 변한다

건방진방랑자 2021. 7. 4.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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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철학적 성찰에 따라 사람의 의미는 변한다

 

 

전통 유가사회에서 여성은 삼종지도(三從之道)를 따라야만 한다고 의미 부여된 존재였다. 다시 말해 여성은 결혼하기 전에는 아버지의 말을 따라야만 하고 결혼해서는 남편의 말을 따라야만 하고 남편이 죽은 후에는 아들의 말을 따라야만 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여성은 남자의 말에 복종해야만 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결국 남자와 여자 사이를 매개하는 의미는 명령과 복종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지금 이런 고전적인 의미는 와해되어 가고 있다. 현대를 살고 있는 어떤 젊은 여성도 스스로에게 자신은 남자에게 복종하는 존재라는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정은 그 반대여서, 현대 여성들은 스스로를 남자와 마찬가지로 자율적인 인격체라고 의미부여한다. 이런 현대의 여성이 시집을 가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결혼을 하게 되면 현대의 여성은 시어머니라는 여성과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고부간의 갈등이다. 물론 이 말은 이전 시대에도 고부 간의 갈등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현대의 고부간의 갈등은 이전의 그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왜 시어머니나 갓 결혼한 새댁이 동일한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갈등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시어머니가 현대 여성과 마찬가지로 생물학적으로는 동일한 여성성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 현대 여성과는 완전히 다른 여성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시어머니가 여성에 부여한 의미와 갓 결혼한 새댁이 여성에 부여한 의미가 상이하기 때문에, 고부간의 갈등은 자연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모든 갈등은 상이한 의미들 간의 충돌이라고 규정될 수도 있겠다.

 

역사는 의미의 변화가 아니라면 아무 것도 아니다. 고정된 의미 속에서 역사는 증발해버리고 만다. 태어나는 모든 인간이 자신의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동일한 의미들을 공유한다면, 역사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역사란 의미의 단절이 가능해야 존립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생물학적으로는 유사한 부모와 자식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부모와 자식 사이를 매개하는 의미가 변하지 않는다면 역사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아침에 일어나 부모님에게 문안 인사를 올리는 것이 부모님이 조부모님에게 했던 것을 반복하고 있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어떤 역사도 기대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의미가 주체와 대상에 내용을 부여하듯이, 의미의 변화는 주체의 실존양식의 변화와 대상의 경험양식의 변화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만약 누군가가 역사를 변화시키려고 한다면, 혹은 현존하는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한다면, 그 사람은 의미를 총체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역사적이라는 수식어는 그래서 함부로 붙여서는 안 되는 말이다. 역사적 사건이란 표현은 새로운 의미를 도래하게 한 사건에 대해서만 사용되어야 하고, 또 역사적 인물이란 표현은 새로운 의미를 도래하게 한 인물에 대해서만 사용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는 역사적 인물이고 그의 자본론은 역사적인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해 마르크스와 자본론이전의 노동자와 그 이후의 노동자는 전혀 다른 노동자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와 자본론을 통해서 노동자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 주체로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이전의 노동자가 어떤 착취에도 불구하고 노동을 해서 임금을 받을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본가의 착취와 탄압을 달게 견디어 냈다면, 자본론이후의 노동자는 자신들의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요구했으며 자신도 자본가와 마찬가지로 동등한 인권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 스스로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마르크스와 자본론이 전적으로 새로운 노동자와 노동의 의미를 생산하였기 때문이다. 철학은 결국 주체에 대한 것도 또는 대상에 대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철학은 주체와 대상을 분절시키는 의미의 층위에서만 자신의 존재 이유를 갖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철학이, 마르크스나 장자 또는 수많은 비판적 철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기존의 의미를 반성해서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인용

목차

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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