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자의식은 버리고 무매개적으로 소통하라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 장자는 비어 있는 마음을 의미하는 허심(虛心)을 강조하고 있다. ‘심재 이야기’에서도 잘 드러나 있는 것처럼 허심은 기본적으로 나는 나라는 인칭적인 자의식이 작동하지 않는 비인칭적인 마음의 상태다. 그런데 이런 마음의 상태에서는 사유나 판단이라는 지적인 작용이나 희노애락의 정서적 교감과 같은 인칭적 수준에서의 작용은 지워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지적인 작용이나 정서적인 작용은 모두 선이해나 선감정을 전제로 해서만, 따라서 과거의식에 의거해서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장자가 권고하는 소통은, 기본적으로 과거 의식에 사로잡힌 고착된 자의식을 비운 마음에서 무매개적으로 일어난다는 점에서, 지적인 이해나 정서적 교감보다 더 근본적인 실존적 사태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지적인 이해나 정서적 교감은 특정한 소통의 사태를 전제로 해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허심의 회복 또는 확보는 타자와 조우하기 이전의 수양론이라는 함축만을 가지고 있다. 만약 허심으로 소통이 저절로 발생한다고 본다면, 이런 이해는 기본적으로 수양론적 공간과 현실적인 삶의 공간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장자에게 허심은 그 자체로 추구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타자와 소통한다는 목적에 종속되는 것이다. 이런 장자의 정신은 「양생주」편에 나오는 ‘포정 이야기’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포정이 칼을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 자체로 추구된 것이 아니라 소를 잘 자르기 위해서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음을 수양해서 인칭적 자의식을 제거하려는 노력도 타자와 잘 소통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아쉽게도 장자 이후 이 점은 항상 망각되고 잊혀져 버렸다. 도대체 왜 마음을 수양하는지 망각한 채 마음만을 수양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마치 자신이 왜 칼을 가는지 망각한 사람이 그저 칼을 날카롭게 갈아 그렇게 날이 선 칼을 집 장식장에 넣어두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타자와 관계하지 않는 허심이나 소를 자르지 않는 날카로운 칼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것은 단지 편집증에 지나지 않는 자기도착의 결과물에 불과한 것이다.
19년이란 시간 동안 소를 잘 자르게 된 포정의 칼은 이제 소와 너무나 잘 소통하게 되어서 날이 방금 숫돌에서 갈려 나온 것처럼 날카롭고 새롭다. 이것은 포정이 허심을 가지고 소와 잘 소통했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정은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비록 그렇게 제가 소통을 한다고 할지라도, 저는 매번 살과 뼈가 엉켜 있는 곳에 이르러 그 자르기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雖然, 每至於族, 吾見其難爲].” 이 말은, 비록 허심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매번 전혀 예기치 않은 ‘그만 두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는[不得已]’ 사태와 조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 포정은, 이전에 소를 자르면서 체인하게 된 기술[技]을 버리고 그 자르기 힘든 부분[族]을 자르기 위해, 다시 마음을 집중해야만 한다. 이처럼 삶의 공간은 우리가 매번 예기치 않던 타자의 타자성과 마주치게 되는 공간이다. 이 점에서 삶의 공간은 수양의 공간과는 반드시 구별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한편 수양의 공간은 삶의 공간을 위해서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 이 두 공간은 모두 연속적인 것으로 사유될 필요가 있다. 장자가 우리에게 권고하는 양행(兩行)도 바로 이 두 공간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에 기초해 있으며, 우리에게 수양과 삶을 동시에 성공적으로 이루어야 한다는 전언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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