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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한시사, 서설(序說) - 2. 자료의 선택 문제: 『기아(箕雅)』와 절충론②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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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한시사, 서설(序說) - 2. 자료의 선택 문제: 『기아(箕雅)』와 절충론②

건방진방랑자 2021. 12. 19.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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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전편(全篇)을 보면, 동문선(東文選)이나 청구풍아(靑丘風雅)에 비해 고시(古詩)와 배율(排律)이 금체(今體)의 율시(律詩)보다 상대적으로 적으며 잡체시(雜體詩)는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한시(漢詩)가 중국에 비하여 고조장편(古調長篇)에서 뒤떨어지고 있으며 절구(絶句)가 모자라는 것이 사실이지마는,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곧 시()에 있어서 그 소상(所尙)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고 있음을 단적(端的)으로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시()의 내질(內質)에 있어서 더욱 그러하다.

 

남용익(南龍翼) 자신이 지은 호곡시화(壺谷詩話)에서도 이는 사실로 확인된다. 그는 역대의 시가(詩家)를 논함에 있어, 고려시대의 경우에는 색()ㆍ성률(聲律)ㆍ기력(氣力)을 시품(詩品)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반면에, 조선시대에 있어서는 격조(格調)ㆍ정경(情境)ㆍ체제(體制)를 설정하고 있다. 이는 곧 고려중기부터 송시학(宋詩學)의 영향권에 있었던 우리나라 한시(漢詩)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학당(學唐)으로 경도(傾倒)하게 된 시사(詩史)의 의미를 사실대로 간취(看取)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보면 이 책에서 남용익(南龍翼)은 찬자(撰者)의 취향이나 편집(偏執)에 사로잡히기 쉬운 선시사(選詩者)이기보다는 시대의 풍상(風尙)과 시가(詩家)의 소장(所長)을 사실 그대로 인정한 편집자로서의 임무에 충실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러나 조선초기의 대표적인 시문집(詩文集)동문선(東文選)을 편찬한 서거정(徐居正)에 의하여 동인시화(東人詩話)가 제작되었으며, 조선중기 시학(詩學)의 높은 수준을 과시한 허균(許筠)이 또 한 성수시화(惺叟詩話)국조시산(國朝詩刪)의 찬자(撰者)라는 사실에서 보면,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시선집(詩選集)을 편찬한 남용익(南龍翼)의 시학(詩學) 또한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그가 저작한 호곡만필(壺谷漫筆)3에 수록된 시화(詩話) 부분을 따로 뽑아 부르고 있는 호곡시화(壺谷詩話)는 우리나라 역대의 시가(詩家) 비평에 있어 가장 다양한 시품(詩品)을 제시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의 문집 15()은 대부분이 시()로써 채워져 있으며 특히 고시(古詩)와 배율(排律)에 있어서는 수십(數十), 수백(數百)을 일필(一筆)에 구사하는 장편(長篇)의 능력을 과시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기아(箕雅)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배율(排律)이나 고체(古體)는 세전(世傳)하는 시선집(詩選集) 중에서 선발(選拔)하고 있을 뿐, 증선(增選)하는 노력은 거의 보여주지 않았다. 기아(箕雅)의 찬집(撰輯) 의도가 처음부터 편집자로서의 임무수행에 주안(主眼)이 있었음을 확인케 한다.

 

남용익(南龍翼)은 소년(少年) 등제(登第)하여 40년 동안 관로(官路)에 있으면서 문형(文衡)의 영관(榮官)에까지 올랐지만, 그러나 공여(公餘)에는 항상 시주(詩酒)를 즐겼을 뿐, 요로(要路)와의 절충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대제학(大提學)의 현직(現職)에 있으면서 기아(箕雅)를 편찬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그의 체질과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인용

목차

서사한시

한시미학

16~17세기 한시사

존당파ㆍ존송파의 평론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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