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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이종묵, 16~17세기 한시사 연구 - 2. 16세기의 강서시풍과 당풍, 3) 삼당시인, 강서시풍 넘어서기 본문

한문놀이터/논문

이종묵, 16~17세기 한시사 연구 - 2. 16세기의 강서시풍과 당풍, 3) 삼당시인, 강서시풍 넘어서기

건방진방랑자 2022. 10. 23.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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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삼당시인, 강서시풍 넘어서기

 

 

절구로 당시의 언어를 그대로 가져다 쓴 당시풍

 

그러나 16세기 말 당시를 추구하였던 인물들은 전대의 대가인 호소지(湖蘇芝)를 극복의 대상으로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기에, 그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정통의 당풍을 구사하려 하였을 것이다. 이들의 목표는 송시(강서시)가 혼효되지 않은 순수한 당시를 쓰고자 하였고, 구체적으로는 그들의 시가 당시와 비슷하게 보이도록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먼저 호소지(湖蘇芝)로 대표되는 송시(강서시)와 다르게 시를 쓰기 위하여, 삼당시인을 위시한 당풍을 추구한 시인들은 율시보다 절구를 선호하였다. 송시, 특히 강서시는 시의 작법을 중시한다. 이 땅에 강서시가 널리 유포되게 된 것은, 강서시파가 천재적 재능이 아니라 학습에 의하여 좋은 시를 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한시의 작법을 연구하고, 전대의 우수한 시를 열심히 읽어 응용할 수 있으면 좋은 시를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시 작법은 주로 율시를 대상으로 한다. 16-17세기경 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이는 일련의 한시작법에 대한 책들이 대부분 율시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강서시가 중시하는 작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할 때 율시는 절로 기피의 대상이 된다. 이때 이들이 주된 양식으로 선택한 것이 절구였다.

 

절구에 힘을 쏟은 삼당시인들은 그들이 제작한 시가 당시와 비슷해 보이기 위한 적극적 노력으로 가장 손쉬운 것이 당시(唐詩)의 언어를 가져다 쓰는 것이었다. 삼당시인들의 시는 그 출처를 조사하면 당시에서 가져온 것이 매우 많다. 표절에 가까울 정도의 것도 상당수 발견된다.

 

이 점은 점화(點化)에 힘을 쏟는 강서시파의 작법과 유사한 면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당풍(唐風)으로 제작된 시는 그 점화(點化)의 원 작품을 확인하지 않더라도 시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은 아니다. 곧 점화(點化)의 목적이 새로움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당풍(唐風)의 익숙한 분위기로 돌아가려 함에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여 강서시파(江西詩派)를 배운 시인들의 작품에서 구사되고 있는 점화(點化)는 기본적으로는 이른바 이고위신(以故爲新)’, 곧 기존의 낡은 것을 통해 자신만의 새로움과 기이함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다. 이 때문에 점화의 대상으로 한 작품과 얼마나 거리가 먼가를 중시하다. 이에 비하여 당시를 추구한 시인들의 작품은, 점화의 대상이 된 작품과 유사해지고자 한다.

 

 

당시와 구분이 불가능하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들의 작품이 당시처럼 보이고자 하였기에, 이들 작품은 당시집(唐詩集) 어디에선가 들어있을 것 같은 익숙함을 지향한다. 권필(權韠)이달(李達)반죽원(斑竹怨)을 두고 이백의 시집에 넣으면 안목을 갖춘 사람이라도 구분할 수 없을 것이라 칭찬한 것이나, 정승지(鄭之升)의 시를 당시집에 넣어두니 아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 것이【『지봉유설(芝峰類說)』 「문장부(文章部)」】 이러한 풍상에서 나온 것이다.

 

이수광(李睟光)이 삼당시인의 시를 두고 당시의 문자를 자주 훔쳐 쓰고 어떤 경우는 전구를 쓰기도 하여 시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당시를 읽는 것처럼 느끼게 하여 이 때문에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한 바 있다【『지봉유설(芝峰類說)9 40b. “당시에 핍진하다.”, 혹은 당시에 넣어도 모자람이 없다는 평어가 이 시기 시화서에 자주 등장한다는 것 자체가 당시를 지향한 시의 모의적 특성을 말한 것이다.

 

 

당시: 소리의 울림에 신경 쓰다

 

이와 함께 삼당시인들이 한시를 지을 때 가장 힘을 들인 것은 소리의 울림이었다. 김득신(金得臣)증귀곡시서(贈龜谷詩序)에서 삼당시인은 향()에만 힘써 그 리()를 알지 못한다고 한 바 있다. 여기서 소리의 울림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내부의 소리고 다른 하나는 외부의 소리다.

 

먼저 외부의 소리는 평측이나 궁상각치우(宮商角徵羽) 오음의 배열 등과 같이 낭송할 때 느낄 수 있는 소리를 가리킨다. 평측을 비틀어 낯설게 하기를 추구하였던 강서시파와는 달리 삼당시인은 유려한 율조가 나오도록 배려하고 있다. 특히 그들의 시를 낭송해보면 침이 튀기지 않고 입안에 침이 고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첩운자나 쌍성자를 효과적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해동강서시파에서 시의 기세를 돋우기 위하여 억색한 율조를 강조한 것과 반대로 부드럽게 읽히도록 외부의 소리에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더욱이, 내부의 소리야말로 삼당시인이 이룩한 높은 성과로 평가할 수 있다. 내부의 소리는 작품 내용에서 소리가 있는 시어를 구사하는 것을 이른다. 삼당시인의 시에는 대부분 소리가 있다. 옥이 올리는 소리, 낙엽이 떨어지는 소리, 바람이 부는 소리, 사람들의 소곤거리는 소리, 말 발굽 소리, 노래 가락 등등. 흔히 당시는 그림을 지향하여 시중유화(詩中有畵)’, ‘무성지화(無聲之畵)’라 하지만, 삼당시인의 시는 시중유성(詩中有聲)’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시에서 노랫가락을 삽입할 때가 많다. 삼당시인(三唐詩人)의 작품에는 특히 결구(結句)나 미련(尾聯)에 이와 같은 소리의 울림이 많다.

 

이처럼 시에 노랫가락을 넣는 것은 삼당시인 이후 더욱 발전하게 된다. 권필(權韠)이안눌(李安訥)정철(鄭澈)장진주사사미인곡을 듣고 지은 과송강묘유감(過松江墓有感), 문가(聞歌)등의 작품에서는 기생이 처연한 노랫가락이 메아리처럼 퍼져나가게 되어 있다. 17세기 한시에서 국문시가를 배경으로 하거나 노래하는 기생을 소재로 한 시가 유난히 많은 것도, 시에서 음악을 중시하는 당시의 스타일을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풍을 추구한 시는 그 미감에서 청신(淸新), 청려(淸麗)와 같은 맑음을 장처로 한다. 이러한 미감을 공유하면서 삼당시인의 유파로 부를 수 있는 사람으로는 이순인(李純仁)을 들 수 있다. 이순인은 삼당시인과 교유하였거니와 만당(晩唐)을 숭상하여 그의 시가 청치(淸致)의 미를 자랑하였다는 점에서 삼당시인과 유사하며, 웅혼한 기상이 적다는 단점에서도(지봉유설(芝峰類說)9 38a) 동질성을 갖고 있다. 17세기 이수광(李睟光), 신유(申濡, 1610-1665) 등도 삼당시인과 유사한 시풍을 지녔다. 정두경(鄭斗卿)신니옹시서(申泥翁詩序)에서 가정 만력 연간(16세기 중반에서 17세기 중반)최경창(崔慶昌), 백광훈(白光勳), 이달(李達)이 당시로 자임하였고 그 후에 이수광(李睟光)이 이어 나왔는데, 그 시는 최경창(崔慶昌)이달(李達)의 체이며, 이수광(李睟光) 이후로는 신유(申濡)가 나왔는데 그 시가 청완(淸婉)한 맛이 있고 이수광(李睟光)과 나란할 만하다고 한 것이 이를 지적한 것이기도 하다.

 

 

 

 

인용

목차 / 지도

1. 서론

2. 16세기의 강서시풍(江西詩風)과 당풍(唐風)

1) 송풍(강서시풍)의 전개 양상

2) 송시에서 당시로의 전환, 그리고 강서시파의 영향력

3) 삼당시인, 강서시풍 넘어서기

3. 16세기말~17세기 복고풍과 그 반발

1) 삼당시인의 한계

2) 만당풍을 극복하기 위해 두보와 한유의 시를 배우다

3) 기세를 높이기 위해 복고풍을 차용하다

4) 명 복고파의 유행: 시경체 한시나 고악부체의 유행

5) 17세기 다양한 시풍을 추구하라(feat. 장유와 이식)

6) 17세기 후반에 등장한 의고주의 비판(feat. 김창협)

7) 17세기 말에 다시 등장한 송시

8) 17세기 후반 조선적 당풍의 대두

4.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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