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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사, 라말려초시의 성격과 만당의 영향 - 1. 라말려초시의 일반적 성격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사, 라말려초시의 성격과 만당의 영향 - 1. 라말려초시의 일반적 성격

건방진방랑자 2021. 12. 20. 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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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라말려초시(羅末麗初詩)의 성격과 만당(晚唐)의 영향

 

 

1. 라말려초시(羅末麗初詩)의 일반적 성격

 

 

나말여초는 왕조사(王朝史)에서도 서로 겹치는 기간이 18년이나 되지만, 문학사의 현실에 있어서도 상당한 부분 그 성격을 같이 하고 있다. 우선 우리나라 한시문학(漢詩文學)이 본격적으로 중국을 배운 역사 단계라는 점에서 한 데 묶여질 수 있는 공통성을 가진다. 신라말에 당()에 들어가 직접 중국시를 체험하게 되는 고려 초기 일군의 시인들이 당시의 풍상(風尙)만당(晩唐)을 배운 것이 이 시기 한시의 특징으로 지적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김종직(金宗直)이 그의 동문선서(東文選序)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어 사실을 확인케 해주며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를 읽어보면 그 격률(格律)이 무려 세 번이나 변()했다. 신라말ㆍ고려초는 오로지 만당(晩唐)을 답습했으며 고려(高麗) 중엽(中葉)에는 오로지 동파(東坡)를 배웠다. 그 말세(末世)에 이르러 익재(益齋) 등 여러분이 구습(舊習)을 조금 바꾸어 아정(雅正)하게 재단(裁斷)함으로써 조선조의 문명(文明)에 이르러서도 그 궤도(軌道)를 그대로 따랐다.

得吾東人詩而讀之, 其格律無慮三變. 羅季及麗初, 專習晚唐, 麗之中葉, 專學東坡. 迨其叔世, 益齋諸公, 稍變舊習, 裁以雅正, 以迄于盛朝之文明, 猶循其軌轍焉.

 

 

나말의 유학생들이 대량으로 중국에 들어갈 당시에 당()도 이미 국세(國勢)가 쇠미해진 당말(唐末)이었으므로 이들이 만당(晩唐)을 배운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들은 정작 당()을 배우면서도 바로 앞 시기의 격조 높은 성당(盛唐)을 뛰어넘어 오히려 기려(綺麗)한 육조시(六朝詩)에 관심을 보이었으며 그들의 시작(詩作)에도 육조풍(六朝風)이 농후하다.

 

물론 육조 시대의 모범 문장집이라 할 수 있는 문선(文選)이 태학(太學)의 교재로서 또는 과시(科試)의 과목으로 채택되고 있었으므로 문선(文選)이 당시 문학 수업의 교과서로 행세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산문(散文)에 있어서는,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이 그의 답인논청구문장원류(答人論靑丘文章源流)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적 삼국시대(三國時代) 중엽 이후에는 공용문서(公用文書)가 다 문선(文選)을 모방하였는데 임강수(任强首)최치원(崔致遠) 같은 이가 그 가운데서 두드러진 자다. 고려초에 이르러서도 그러하였으나 명신(名臣)들의 장주(章奏)와 비문(碑文) 가운데는 왕왕 양한(兩漢)의 기미(氣味)가 있어 후세 사람들의 미칠 바가 아니다. 그 말세에 이르러 익재(益齋)가정(稼亭)목은(牧隱) 등 여러분이 고문(古文) 신사(新辭)를 창도하여 세상에 크게 울렸다.

在昔, 三國中葉以後, 公用文書, 皆放文選, 如任强首崔文昌, 其顯者也. 至麗初猶然而名臣章奏及碑版之作, 往往有兩漢氣味, 非後世所及. 及其季世, 益齋稼亭牧隱諸公, 倡爲古文新辭, 大鳴於世.

 

 

모두 문선(文選)의 문체(文體)를 익히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전하고 있는 최치원(崔致遠)의 산문문장(散文文章)이 대부분 변려문(騈儷文)으로 채워져 있는 사실이 전적으로 이를 뒷받침해 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시()를 대하는 시인의 관심과 취향(趣向)의 소재다. 최치원(崔致遠)은 그의 대표작 등윤주자화사(登潤州慈和寺)()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登臨暫隔路岐塵 높은 곳에 올라서 잠깐 동안 속세와 멀어지는가 싶더니
吟想興亡恨益新 흥망을 되씹어 보니 한이 더욱 새롭구나.
畫角聲中朝暮浪 아침 저녁 화각(畵角) 소리에 물결은 흘러만 가고
靑山影裏古今人 푸른 산 그림자 속에 옛 사람도 있고 지금 사람도 있네
霜摧玉樹花無主 옥수(玉樹)에 서리 치니 꽃은 임자 없고
風暖金陵草自春 금릉(金陵) 땅 따뜻하니 풀은 혼자 봄이로다.
賴有謝家餘境在 사씨가(謝氏家)의 남은 경치 그대로 살아있어
長敎詩客爽精神 오래도록 시객(詩客)으로 하여금 정신 상쾌하게 하네.

 

봄을 맞는 금릉(金陵) 땅의 서정을 사조(謝眺)로 대표되는 사씨일가(謝氏一家)의 여경(餘景)에다 접속시키고 있다.

 

최승우(崔承祐)도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송진책선배부빈주막(送陳策先輩赴邠州幕)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禰衡詞賦陸機文 예형(禰衡)의 사부(詞賦)와 육기(陸機)의 문()으로
再捷名高已不群 두 번이나 급제하여 이름 이미 높았도다.
珠淚遠辭裴吏部 구슬 같은 눈물로 배리부(裵吏部)를 떠나와
玳筵今奉竇將軍 대연(玳筵)에서 오늘은 두장군(竇將軍)을 받들겠도다.
尊前有雪吟京洛 술독 앞에 눈 있을 땐 서울에서 시()를 읊었는데
馬上無山入塞雲 말에 올랐을 땐 산이 없어 변방의 구름 속으로 들어가네.
從此幕中聲價重 이로부터 막중(幕中)에는 명성이 무거울지니
紅蓮丹桂共芳芬 문무(文武)가 같이 만나 방향(芳香)을 함께 하리라.

 

예형(禰衡)의 사부(詞賦)와 육기(陸機) 같은 문장(文章)의 솜씨로 두번씩이나 진책(陳策) 선배가 과거에 급제한 사실을 칭송하고 있다. 이밖에도 최치원(崔致遠)은 고병(高騈)에게 올려 바친 칠언기덕시(七言記德詩) 30수중 설영(雪詠)과 같은 작품에서는 다음과 같이 썼다.

 

五色毫編六出花 오색(五色)붓으로 눈을 그려
三冬吟徹四方誇 삼동(三冬)에 읊어대어 사방(四方)에 자랑했네.
始知絶句勝聯句 비로소 알겠거니 절구(絶句)가 연구(聯句)보다 더 나은 것을
從此芳名掩謝家 이로부터 꽃다운 이름 사씨가(謝氏家)를 무색케 하리라.

 

고병(高騈)의 시()를 추어 올리는 헌시(獻詩)에서조차도 그 기준이 사씨일가(謝氏一家)와 대비되고 있음을 본다.

 

그리고 또 그는 초투헌태위계(初投獻太尉啓)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이제 잠깐 일위(一尉)를 그만두고 삼편(三篇)으로 응시(應詩)하려 하였습니다. 다시 공부하기를 원했으며 또 은거하기를 꾀하여 홀로 산림(山林)에 의지하여 다시 옛글을 열람하였습니다. 날마다 시()를 익혔으므로 우눌(虞訥)의 꾸짖음에도 피하지 않았으며 몇년 동안이나 부()를 지었으므로 육기(陸機)의 비웃음도 무엇이 부끄럽겠습니까? 부지런히 공부하고 학업을 닦아, 탁마(琢磨)하여 그릇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렸습니다……

…… 今者乍離一尉, 欲應三篇. 更願進修, 且謀退縮, 獨依林藪, 再閱丘墳. 課日攻詩, 虞訥之𧥮訶无避, 積年著賦, 陸機之哂笑何慙, 候其敦閱致功, 琢磨成器……

 

 

스스로 육기(陸機)의 비웃음도 개의치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여기서도 육기(陸機)의 시()를 의식하고 있는 것이 사실로 드러난다. 육기(陸機)는 그의 문부(文賦)에서 여러가지 문학이론을 배합하고 있거니와 ()는 정()을 추구하여 무늬 놓인 비단처럼 정교해야 한다[詩緣情而綺靡].’로 요약되는 그의 지론은 정서와 심미적 성격을 함께 드러내 보인 문학론의 압권(壓卷)이다.

 

이로써 보면 기려(綺麗)한 육조시(六朝詩)가 나말여초의 시인들에게 숭상의 대상이 되고 있었던 사실을 감출 수 없다. 우리나라 한시가 본격적으로 중국을 배운 것이 당말(唐末)이기 때문에 당시의 풍상(風尙)만당(晚唐)을 받아들인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며, 육조(六朝)의 기려(綺麗)만당(晩唐)의 기미(綺靡)가 사실상 가까운 거리에 있기 때문에, 수사기교에 용공(用工)할 수 밖에 없는 습작과정의 입당(入唐) 유학생들이 육조(六朝)의 장식미에 쉽게 영합될 수 있었던 것은 생각하기 어렵지 않다. 더욱이 초기의 습작 과정에서부터 격조 높은 성당(盛唐)을 배우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이후의 시작(詩作)에 있어서도 대체로 그러하다 또 시()를 숭상하는 경향에 있어서도 바로 전시기(前時期)의 것을 거부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뿐만 아니라 시()의 내질(內質) 역시 만당(晩唐)과 그 이전의 당시(唐詩)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두보(杜甫)한유(韓愈)백거이(白居易) 등의 시대까지도 이들은 정치력으로 나라를 구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것이 그들의 시()에도 반영되고 있지만, 만당(晩唐)의 시인들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큰 뜻이란 생각조차 하기 어려웠으며 분명한 것은 시를 짓는 즐거움 그것만이 그들의 것이었다. 그러므로 만당(晩唐)을 배운 당시의 시인들이 성당(盛唐)을 건너 뛰고 스스로 육조시(六朝詩)에 근접하고 있는 까닭을 여기서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시형(詩型)의 선택에 있어서는 대체로 칠언(七言)이 우세하며 특히 율시(律詩)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두드러진 현상이다. 최치원(崔致遠)의 경우에도 작품의 전체에서 보면 칠언절구가 압도적으로 우세하지만 명편(名篇)으로 알려진 작품 가운데는 칠언율시가 많다. 우리나라 한시가 일반적으로 절구(絶句)보다는 율시(律詩), 남용익(南龍翼) 편찬(編纂)기아(箕雅)서문(序文)을 참조해보면 오언(五言)보다는 칠언(七言)에 명작(名作)이 많은 것과 동궤(同軌)의 현상이다[七言多於五言者 詩家用功極於七字律 而五字絶則工者絶無故也].

 

물론 만당(晩唐)의 명편(名篇) 가운데는 절구가 많다. 특히 만당(晩唐)의 풍류를 한 눈으로 읽게 하는 두목(杜牧)의 시작(詩作)을 비롯하여, 정곡(鄭谷)ㆍ고병(高騈)ㆍ온정균(溫庭均)ㆍ위장(韋莊)ㆍ나은(羅隱)ㆍ장비(張泌) 등에게 있어서도 같은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나라와 시가 함께 쇠미해진 만당(晩唐)에서 장편(長篇)을 뽑아낼 저력이나 여유를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때문에 만당(晩唐)의 섬교(纖巧)가 단형(短型)의 절구를 즐겨 선택한 것도 오히려 자연한 추세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에 있어서는, 현존하는 나말여초시의 대부분이 입당유학생들의 초기작이거나 또는 그 기반 위에서 성립된 여조시(麗朝詩)의 창시자들의 것이고 보면, 시를 익히는 습작과정에서 직절(直截)한 절구 형식으로 명편(名篇)을 제작하기란 결코 용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용에 있어서도 대체로 뜻을 이루지 못한 작자 자신을 회한(悔恨)하고 있거나 회고적(懷古的)인 감상(感傷)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강개(康槪)와 비수(悲愁)를 섬세한 미감으로 표현하려는 고심(苦心)을 읽을 수 있으나 시에 몰입함에 있어 대체로 시야가 좁아 미소(微小)한 부분 묘사에서 화미(華美)를 보여 줄 뿐이다. 전편(全篇)을 통하여 전고(典故)를 과다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 두드러진 현상이기도 하지만, 의사(意思)를 운반하는 기력이 섬약(纖弱)하여 처음의 긴장이 중도에서 파쇄(破碎)되고 있는 것들이 많다. 때문에 용공(用功)한 흔적은 역력하지만 형식과 내용이 긴절(緊切)하게 연결되지 못하고 있어, 염려(艶麗)한 서정을 노래한 작품에서는 특히 성공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에 대해서는 개별 작품을 검증하는 과정에서 다시 언급될 것이다.

 

 

 

 

인용

목차 / 略史

우리 한시 / 서사한시

한시미학 / 고려ㆍ조선

眞詩 / 16~17세기 / 존당파ㆍ존송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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