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최치원(崔致遠)과 라말(羅末)의 유학생들
최치원(崔致遠)이 당(唐)에 유학할 당시에는 이미 유학생의 수가 수백명에 이르렀다고 하지만 이 가운데서 후세까지 이름을 전하고 있는 것은 불과 10여인이며 이들 가운데서도 시문(詩文)으로 이름이 알려진 것은 최치원(崔致遠)ㆍ최광유(崔匡裕)ㆍ최승우(崔承祐)ㆍ박인범(朴仁範)ㆍ최언위(崔彦撝, 仁滾) 등이 있을 뿐이다. 특히 최언위(崔彦撝)는 최치원(崔致遠)ㆍ최승우(崔承祐)와 더불어 ‘삼최(三崔)’로 불리운 문장가로서 고려가 건국한 뒤에도 문한(文翰)의 임(任)을 도맡아 궁전 누각의 액호(額號)를 모두 그가 선정하였다고 하지만 그러한 문자들 중 전하고 있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고려 충숙왕(忠肅王) 6년(1337)에 간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십초록(十鈔錄)』(『夾注名賢十鈔詩』)에 그들의 시편을 전하고 있는 최광유(崔匡裕)ㆍ최승우(崔承祐)ㆍ박인범(朴仁範) 등이 최치원(崔致遠)과 더불어 우리나라 시사(詩史)에 중요하게 기여하고 있을 뿐이다. 이들은 대부분 고려초까지도 생존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최승우(崔承祐)가 여초(麗初)에 문장으로 그의 행적을 남기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여조(麗朝)에서의 발자취는 찾아볼 수가 없다.
최치원(崔致遠, 857 憲安王 1~?, 호 孤雲ㆍ海雲)의 생애를 알 수 있는 자료로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이상의 것이 없지만, 자신이 쓴 여러 편의 문장을 통하여 보다 상세한 이력을 알 수 있다. 그의 가계는 성골(聖骨)ㆍ진골(眞骨) 다음의 귀족계급인 육두품(六頭品) 출신이며 아버지 견일(肩逸)과 종제(從弟) 언위(彦撝), 종질(從姪) 광윤(光胤, 彦撝의 子) 등이 모두 당대의 문장가였던 것을 보면 최치원(崔致遠)은 문장가(文章家)의 가문에서 또 문장(文章)이 나온 셈이다. 그는 12세에 입당(入唐)하여 18세에 빈공(賓貢)으로 급제하고 이로부터 10년뒤 28세 되던 해에 환국(還國)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것들은 모두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 「최치원(崔致遠)」 권46에 실린 동년(同年) 고운(顧雲)의 “十二乘船渡海來, 文章感動中華國, 十八橫行戰詞苑, 一箭射破金門策.”이란 「증별시(贈別詩)」와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 권중(卷中) 20번을 따른 것이다】. 현재까지 추적된 그의 마지막 행적은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를 쓴 것으로 알려진 천우(天祐) 오년(五年, 孝恭王 12년, 908)까지이며 이는 그의 나이 52세 때다. 김혜숙(金惠淑)이 쓴 「최치원(崔致遠)의 시문(詩文) 연구(研究)」에는 53세로 정리되고 있어 1년의 차이가 있다.
최치원(崔致遠)의 저작은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과 환국(還國) 이후에 저술한 약간의 시문(詩文)이 현재까지 전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의 저작은 대부분 재당(在唐)시절에 이루어진 것이며 현존하는 『계원필경(桂苑筆耕)』도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계원필경(桂苑筆耕)』의 서문에 따르면 그가 고병(高騈)의 필연(筆硯)을 담당한 4년 동안에 지은 글만 해도 1만여수가 넘는다고 하였으며 그 이전의 수학기간에도 각체(各體)의 시작(詩作)이 수권(數卷)에 이르렀다고 진술하고 있다. 이로써 보면 습작기의 시문(詩文)은 대부분 폐기하고 그 정화(精華)만 모은 것이 『계원필경(桂苑筆耕)』임을 알 수 있다.
근년에 이르러 여러 차례 최치원(崔致遠)의 문집이 간행되어 국내외 문헌에 산재(散在)해 있는 유문(遺文)의 수습이 일단 마무리된 듯하다. 이 가운데서 가장 많은 시문(詩文)을 수록하고 있는 『국역고운선생문집(國譯孤雲先生文集)』에 따르면 현전하는 최치원(崔致遠)의 시문은 시(詩) 115수, 문(文) 353편으로 집계된다. 우리나라 문집의 대부분이 시로써 채워져 있는 사실에서 보면, 최치원(崔致遠)의 경우는 이와 달리 문(文)이 시(詩)보다 압도적으로 우세하며 그가 재능을 발휘한 것도 산문(散文)이었던 것 같다. 이규보(李奎報)가 그의 『백운소설(白雲小說)』 3번에서 다음과 같이 쓰며 문장(文章) 쪽을 높이 산 것이다
최치원(崔致遠)은 천황(天荒)을 깨치는 큰 공(功)이 있었으므로 우리나라 학자들이 모두 종장(宗匠)으로 삼았다 …… 「황소격(黃巢檄)」과 같은 것은 비록 중국의 서적에 등재(謄載)되지 않았지만 …… 귀신을 울리고 놀라게 한 솜씨가 아니고서는 어찌 이런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 시(詩)는 그렇게 높지 않으니 어찌 그 중국에 들어간 것이 만당(晩唐) 이후이기 때문에 그러하겠는가?
崔致遠孤雲, 有破天荒之大功, 故東方學者, 皆以爲宗 …… 如黃巢檄一篇, 雖不載於中國書籍 …… 如非泣鬼驚神之手, 何能至此? 然其詩不甚高, 豈其入中國, 在於晩唐後故歟?
이밖에도 최치원(崔致遠)의 시문평(詩文評)은 대체로 부정적인 측면이 강하지만 시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성현(成俔)은 그의 『용재총화(傭齋叢話)』 1권 2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나라 문장은 최치원(崔致遠)에서부터 처음으로 발휘되었다. 비록 시구(詩句)에 능하지만 뜻이 정밀(精密)하지 못하며 비록 사육문(四六文)에 공교하지만 말이 정제되지 않았다.
我國文章, 始發揮於崔致遠, 雖能詩句, 意不精, 雖工四六, 而語不整.
그의 시문이 수식에 치중하고 있음을 간접으로 시사하고 있거니와 그의 붓 끝에 완전한 시인이나 문인이 일찍이 있은 일이 없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조선중기의 허균(許筠)은 『성수시화(惺叟詩話)』 1번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최고운(崔孤雲) 학사(學士)의 시(詩)는 당말(唐末)에 있어서도 또한 정곡(鄭谷)ㆍ한악(韓偓)과 동류(同流)라 대체로 천박(淺薄)하여 중후(重厚)하지 아니하다.
崔孤雲學士之詩, 在唐末亦鄭谷韓偓之流, 率佻淺不厚.
그의 시를 만당(晩唐)의 부박(浮薄)과 동류(同流)의 것으로 단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시는 『동문선(東文選)』을 비롯하여 『청구풍아(靑丘風雅)』ㆍ『기아(箕雅)』ㆍ『대동시선(大東詩選)』 등 역대의 중요 시선집에 29수나 선발되고 있어 개산시조(開山始祖)로서의 면모가 약연(躍然)하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그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추야우중(秋夜雨中)」(五絶)을 비롯하여 「임경대(臨鏡臺)」(七絶), 「증금천사주인(贈金川寺主人)」(七絶), 「우강역정(芋江驛亭)」(七絶), 「증지광상인(贈智光上人)」(五律), 「야증악관(夜贈樂官)」(五律), 「수양섬수재(酬楊瞻秀才)」(七律), 「화장교(和張喬)」(七律), 「강남녀(江南女)」(五古) 등은 대부분 20대 재당(在唐) 시절의 작품이지만 전기(前記) 시선집(詩選集)에서 모두 뽑아주고 있으며, 이밖에도 「등윤주자화사(登潤州慈和寺)」(七律), 「제가야산(題伽倻山)」(七絶)이 『청구풍아(靑丘風雅)』에서는 외면을 당했지만 국내외에서 자주 화제에 올랐던 작품이다.
「추야우중(秋夜雨中)」ㆍ「등윤주자화사(登潤州慈和寺)」ㆍ「제가야산(題伽倻山)」을 차례로 보이면 다음과 같다.
「추야우중(秋夜雨中)」은 다음과 같다.
秋風唯苦吟 世路少知音 | 가을바람에 이렇게 힘들여 읊고 있건만 세상 어디에도 알아 주는 이 없네. |
窓外三更雨 燈前萬里心 | 창밖엔 깊은 밤비 내리는데 등불 아래 천만리 떠나간 마음. |
한시에서는 흔히 제목을 먼저 읽으라고 한다. 이 시는 바로 이러한 교훈을 다시 확인케 하는 작품이다. 가을과 밤과 비의 만남이 포개어져 화려한 꿈과 같은 것은 처음부터 거세되고 있다. 때문에 그가 힘들여 익혀온 부화(浮華)한 수사의 솜씨도 엄두 낼 필요가 없게 되었다. 허균(許筠)이 『성수시화(惺叟詩話)』 1번에서 이 시를 가장 마음에 들어한 것도 이 시의 아려(雅麗)를 높이 산 것인지 모른다[一絶最好].
창과 등불이 어울리어 한적한 추야장(秋夜長)의 분위기를 끌어냄직도 하지만 그러나 ‘만리심(萬里心)’에 이르러 시인의 모든 것은 끝나고 황량만이 있을 뿐이다. 흔히 절구(絶句)의 ‘등전만리심(燈前萬里心)’에 끌리어 만리나 떨어진 타국에서 고국을 그린 작품이라고도 하지만, 그러나 그가 환국할 무렵의 신라는 진성여왕(眞聖女王)의 난정(亂政)으로 국운이 이미 기울어지고 있을 때였으므로 그에게 구국에의 의지나 현실에 대한 미련 같은 것은 이미 문제 밖에 있었다.
정작 그가 장안여사(長安旅舍)에서 지은 「장안여사여우신미장관접린유기(長安旅舍與于愼微長官接隣有寄)」에서는, 알아주는 이 없는 이국생활의 외로움을 ‘타향소지기(他鄕少知己)’로 나타내고 있다. 장차 고려가 일어날 것을 짐작하고 ‘계림황엽 곡령청송(鷄林黃葉, 鵠嶺靑松)’을 예언했다는 전언(傳言)도 방증자료로서는 충분한 것이다. 『계원필경(桂苑筆耕)』에도 이 「추야우중(秋夜雨中)」은 들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이 작품에서 예료(豫料)되는 주제도 작자의 온포(蘊抱)를 용납해 줄 세상을 만나지 못한 현실에 대한 회한(悔恨)이라 할 수 있다. ‘지음(知音)’은 지기지우(知己之友)지만 바로 이 현실을 두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추야우중(秋夜雨中)」과 흡사한 분위기를 읽을 수 있는 그의 작품으로 「우정야우(郵亭夜雨)」가 있다. 이 작품 역시 『계원필경(桂苑筆耕)』에는 빠져 있으며 『동문선(東文選)』과 『최문창후전집(崔文昌侯全集)』에 수록되어 있다.
旅館窮秋雨 寒窓靜夜燈 | 나그네 집에는 깊은 가을비 내리고 차가운 창문에는 고요한 밤 등불 비치네. |
自憐愁裏坐 眞箇定中僧 | 가엾게도 시름 속에 앉아 있노라니 이야말로 진정 참선하는 중이로구나. |
나그네가 된 자신의 처지를 참선(參禪)하는 승려에다 비기고 있는 것이 다를 뿐 전체적인 분위기는 마찬가지다.
「등윤주자화사(登潤州慈和寺)」는 다음과 같다.
登臨暫隔路岐塵 | 높은 곳에 올라서 잠깐 동안 속세와 멀어지는가 싶더니 |
吟想興亡恨益新 | 흥망을 되씹어 보니 한이 더욱 새롭구나. |
畫角聲中朝暮浪 | 아침 저녁 화각(畵角) 소리에 물결은 흘러만 가고 |
靑山影裏古今人 | 푸른 산 그림자 속에 옛 사람도 있고 지금 사람도 있네 |
霜摧玉樹花無主 | 옥수(玉樹)에 서리 치니 꽃은 임자 없고 |
風暖金陵草自春 | 금릉(金陵) 땅 따뜻하니 풀은 혼자 봄이로다. |
賴有謝家餘境在 | 사씨가(謝氏家)의 남은 경치 그대로 살아있어 |
長敎詩客爽精神 | 오래도록 시객(詩客)으로 하여금 정신 상쾌하게 하네. |
흔히 「등윤주자화시(潤州慈和詩)」로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경물시(景物詩)는 대개 사경(寫景)을 먼저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반하여 이 시는 수련(首聯)에서부터 촉급하게 정(情)을 앞세워 회고적인 감상에 흐르고 있다. 수사에도 용공(用工)하고 있는 흔적이 역력하다. 함련(頷聯)에 이르러 서완(徐緩)하게 풀어 주면서 이 작품에서 가장 높은 곳을 보여준다. 시간과 공간을 대응시키면서 무상(無常)을 읊조리고 있다. 시간을 알려주는 화각(畵角) 소리 울리는 가운데 아침저녁 흐르는 물은 다함이 없고 푸른 산 그늘 속에는 옛 사람의 자취도 있고 지금 사람의 자취도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함련(頷聯)이 너무 높아 다시 경련(頸聯)과 미련(尾聯)을 이어나가기에는 이미 기력이 쇠진하고 있는 느낌이다.
『전당시일권(全唐詩逸卷)』에도 이 함련(頷聯)이 등재(謄載)되어 있고 이규보(李奎報)의 『백운소설(白雲小說)』 5번이나 서거정(徐居正)의 『동인시화(東人詩話)』 상권 2번에서 유독 이 함련(頷聯)만을 적시(摘示)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인지 모른다.
「제가야산(題伽倻山)」은 다음과 같다.
狂奔疊石吼重巒 | 미친 물 바위를 치며 산봉우리 울리어 |
人語難分咫尺間 | 사람들 하는 말 지척에서도 분간하기 어렵네. |
常恐是非聲到耳 | 세상의 시비소리 귀에 들릴까 두려워 |
故敎流水盡籠山 | 일부러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둘러 막았네. |
「제가야산(題伽倻山)」, 「가야산옥류동(伽倻山玉流洞)」으로 불리기도 하며 가야산 은거 이후에 썼을 것이라는 짐작 때문에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광분첩석(狂奔疊石)’의 ‘분(奔)’은 『파한집(破閑集)』 권중 20번 이후 ‘분(噴)’으로 널리 알려져 이 시에서 소재가 되고 있는 물의 의미가 부각되어 왔다. ‘진롱산(盡籠山)’의 ‘롱(籠)’이 ‘롱(聾)’으로 된 시화서(詩話書)도 있지만 이는 잘못이다.
기구(起句)의 ‘광분첩석후중만(狂奔疊石吼重巒)’은 호흡의 불편을 느낄 정도로 억색(臆塞)한 곳이기도 하지만 이것이 장쾌미(壯快味)를 보태어 전체적인 분위기는 고고(孤高)와 장쾌(壯快)를 함께 읽게 한다. 「추야우중(秋夜雨中)」과 더불어 세상을 멀리 하려는 최치원(崔致遠) 자신의 독백을 거듭 확인케하는 작품이다.
승구(承句)의 ‘인어난분지척간(人語難分咫尺間)’은 바깥세상에서 들끓고 있는 시비성(是非聲)의 강도를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세상의 소리가 너무 시끄럽기 때문에 물소리의 강도도 그 만큼 높인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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