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광(李睟光, 1563 명종18~1628 인조6, 자 潤卿, 호 芝峰)은 조선중기의 학자이자 문장가로 아들 민구(敏求)와 더불어 문명을 날렸다. 그는 역대 제가(諸家)들의 경세책과 문장을 광범위하게 수렴하여 독특한 세계를 구축하였다. 역대 여러 경전과 제가서(諸子書)에 두루 밝았을 뿐 아니라 성운(聲韻)에도 조예가 깊어 그의 시는 종종 성당(盛唐)의 유풍(遺風)이 있다고 평가되어 왔다.
『지봉유설(芝峰類說)』 시28에서 스스로 “나는 오경 외에 『장자(莊子)』와 사마천(司馬遷)을 좋아하였고 시는 건안(建安)으로부터 초당(初唐)ㆍ성당(盛唐)까지 좋아하였다. 그러나 중당(中唐)과 만당(晩唐) 이하의 것은 그 경구만을 취하였을 따름이다[余於五經, 好莊子司馬子長, 詩好建安以至始唐盛唐, 而中晚以下, 則唯取其驚句而已]”라고 한 언급에서 그의 문학관의 일단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자구(字句)나 사조(辭藻)의 정련(精鍊)에 진력하지 않고 언의(言意)가 간심(簡深)한 데에 주력하였다. 자유분방한 필치로 많은 작품을 남겼기 때문에 고려시대의 이규보와 비견되기도 하였다. 진위사(陳慰使)로 중국에 수차례 가서 많은 창화시(唱和詩)를 남기기도 하였는데 그 중에서 안남(安南) 사신 풍극관(馮克寬)과의 창화시집인 「안남사신창화록(安南使臣唱和錄)」은 그의 문명을 중국 및 베트남에까지 떨치게 하였다.
이수광(李睟光)은 스스로 시작(詩作)에 작위(作爲)의 뜻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한가롭게 거처할 때 경물을 보고 마음 속에 감흥이 촉발되면 그것을 읊조릴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시어가 반드시 공교롭지는 않았다고 진술하였다. 그러나 그의 시작(詩作)의 실상은 반드시 그러하지 않았다. 자연스러운 감정의 유출과 함께 대구 등의 형식적 요건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지봉유설(芝峰類說)』 권13에서 자신의 시 가운데 대구가 잘 이루어진 작품을 따로 선발하여 제시하기도 하였다.
다음 작품이 이수광(李睟光)의 시세계를 설명하는 데 좋은 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岸柳迎人舞 林鶯和客吟 | 언덕 버들은 사람 맞아 춤추고 수풀 속의 꾀꼬리는 길손 보고 지저귀네. |
雨晴山活態 風暖草生心 | 비가 개니 산은 활기를 띠고 바람 따뜻해 풀이 싹을 틔운다. |
景入詩中畫 泉鳴譜外琴 | 풍경은 시 속에 그림으로 들어오고 냇물은 악보 밖의 거문고 소리 울리네. |
路長行不盡 西日破遙岑 | 길은 길어 가도 가도 다함이 없는데 지는 해는 먼 산봉우리에 깨어지고 있구나. |
위의 「도중(途中)」은 「속조천록(續朝天錄)」에 수록된 작품이다. 연경에 사신가는 도중, 경물에 촉발된 감흥을 구태여 조탁에 힘쓰지 않고 자연스럽게 읊조린 것이다. 그러나 시인의 감흥을 회화적으로 드러내고 있을 뿐 아니라 대구 등의 수사적 기교에도 공을 들이고 있는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다.
다음은 이수광(李睟光)의 「동헌(東軒)」이란 작품이다.
檻外池光染綠苔 | 난간 밖의 못물 빛은 푸른 이끼 물들이고 |
一簾微雨欲黃梅 | 주렴 가득 가랑비에 매실이 익으려 하네. |
衙居寂寞門長掩 | 관청이 적막하여 문은 늘 잠겨있고 |
公退尋常印不開 | 공무 끝나면 늘상 도장함을 열지 않네. |
盧橘香邊山鹿睡 | 귤나무 향기 가에 산사슴이 잠들고 |
石榴花下怪禽來 | 석류꽃 아래에 바다새 찾아오네.. |
軒窓盡日淸如水 | 동헌 창문 종일토록 맑기가 물과 같아 |
輸與騷翁晝夢回 | 시 짓는 시인에게 낮잠을 보내주네. |
『대동시선(大東詩選)』에는 「순천동헌(順天東軒)」으로 되어 있다. 수련(首聯)의 ‘황매우(黃梅雨)’와 같은 것은 고인(古人)들에 의하여 흔하게 쓰여온 시어이지만, 이 작품 역시 정치한 수사 기교가 엿보인다. 더욱이 작자는 미련(尾聯)에서 자신이 목민관이란 사실도 잊은 채 스스로 시인임을 자처하고 있어 학자들의 시작(詩作)과는 먼 거리를 느끼게 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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