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백악시단(白嶽詩壇)과 진시운동(眞詩運動)
17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인왕산(仁旺山)과 북악산(北嶽山) 사이의 산록(山麓, 壯洞)에 시단(詩壇)을 만들고, 새로운 시를 써야 한다고 다짐하는 일군의 시인들이 모여 들면서, 조선후기 시단에 새로운 기풍이 일기 시작했다. 이들이 함께 모인 곳을 백악시단(白嶽詩壇)이라 부르기도 하고 이 새로운 시세계의 지향을 모색하는 움직임을 ‘시운동(詩運動)’이라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김창협(金昌協)과 김창흡(金昌翕) 형제가 중심이 되고, 이들의 문하에서 이병연(李秉淵)ㆍ이하곤(李夏坤)ㆍ김시민(金時敏)ㆍ김시보(金時保)ㆍ유척기(兪拓基)ㆍ홍세태(洪世泰) 등이 호응하여 조선후기 소단(騷壇)에 참신한 충격을 던져주었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화단(畵壇)에서도 겸재(謙齋) 정선(鄭敾)ㆍ관아재(觀我齋) 조영우(趙榮祐)과 같은 화가들이 이들과 교유(交遊)하면서 진경화(眞境畵)의 세계를 구축하여 조선후기 화단에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게 된다.
성정(性情)의 발로에 따라 시를 써야 한다는 유가(儒家)의 상식을 뛰어 넘어 이들은 그들 주변에 있는 자연, 인물, 풍속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때문에 이들에게는 대상 그 자체가 중요할 뿐, 계획된 의도나 꾸밈과 같은 것은 고려하지 않았으며 형(形)과 신(神)이 하나로 어울어지는 시세계를 이상적인 경지로 생각했다. 그래서 이들은 ‘진시(眞詩)’, ‘성정(性情)’의 시(詩), ‘천기(天機)’ 등을 강조하면서 당시(當時)의 풍상(風尙)을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이러한 주장과 실천은 결과적으로 조선중기의 당시풍(唐詩風)이후 송시(宋詩)의 세계에 복귀 또는 근접(近接)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이들의 이러한 노력은 이때까지의 속상(俗尙)을 거부하고 진정한 조선시(朝鮮詩)가 어떤 것인가를 훌륭하게 실험하고 있었으므로 그 성과 역시 중요하게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