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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사, 조선후기의 황량과 조선시의 자각 - 4. 위항인의 선명(조수삼)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사, 조선후기의 황량과 조선시의 자각 - 4. 위항인의 선명(조수삼)

건방진방랑자 2021. 12. 21.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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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위항인(委巷人)의 선명(善鳴)

 

 

서울의 서대문 밖 인왕산 옥계 기슭에 천수경(千壽慶)차좌일(車佐一)최북(崔北)장혼(張混)ㆍ왕태(王太) 등이 모여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글씨로 송석원(松石園)이란 편액을 걸고 시회를 결성하였다. 이 시사에서 삼사십명 때로는 백여명 씩 모여서 시를 읊었다고 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실로 위항문학의 전성기라 해도 좋을 것 같다.

 

이 송석원시사는 1786년 여름부터 1820년 무렵까지 30여년 존속하면서 당시의 사대부 문단 못지 않은 시문활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이들은 자연을 벗삼아 세속에 물들지 않음을 자부하면서 자신들의 문학을 사대부의 문학과 구별하여 경외(境外)의 사림(詞林)’이라 자존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활동했던 위항시인으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조수삼(趙秀三)이다.

 

조수삼(趙秀三, 1762 영조38~1849 철종1, 芝園子翼, 秋齋經畹)은 한미한 중인 출신이나 그의 시재를 아끼는 사대부들의 도움으로 83세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오위장(五衛將)ㆍ첨중추(僉中樞)의 벼슬을 받았다. 그는 조희룡(趙熙龍)정지윤(鄭芝潤)천수경(千壽慶) 등 위항시인들과의 교유, 김정희(金正喜)ㆍ김명희(金命喜) 등과의 친분, 여러 차례 북경을 내왕함에 따라 오숭량(吳嵩梁)ㆍ주문한(朱文翰) 등의 중국 문사들과의 교유를 통하여 그 어떤 위항시인들 보다 다양한 시세계를 이룩할 수 있었다.

 

조수삼(趙秀三)은 시문 뿐만이 아니라 의학, 약학, 바둑 등 여러 분야에서 재능을 보였다고 하는데, 이는 그의 시에서 나타나고 있는 다양한 제재와도 긴밀한 연관을 맺는다. 조국의 수려한 경승, 그 속에 담긴 백성들의 삶의 질곡이 빚어내는 미묘한 정서, 농민의 생활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 민란에 관한 시적 감수성, 옛 사적과 문물에 대한 깊은 조예, 개인 신변사에 대한 낭만적 필치 등 그가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이 시작(詩作)의 제재가 되고 있다.

 

추재집(秋齋集)8권에 이르는 거질(巨帙)이거니와 이 가운데서도 일곱 권이 시편으로 되어 있다. 그는 여섯 차례나 연행사(燕行使)를 따라 중국(中國)을 다녀왔으며, 국내에서도 관서(關西)ㆍ관북(關北)ㆍ영남(嶺南) 등 전국 각지를 여행하면서 가는 곳마다 시를 남겨 시집(詩集) 일곱 권 가운데서도 여섯 권이 기행시로 채워져 있다. 북행백절(北行百絶)(五絶)도 그러한 것 중의 하나다. 특히 그의 시세계에서 후대인의 주목을 받게된 것은 고려궁사(高麗宮詞)(22), 기이(紀異)(71), 외이죽지사(外夷竹枝詞)(81) 등이다. 그는 일찍부터 죽지사(竹枝詞)에 관심을 보여 상원죽지사((上元竹枝詞)(15)를 비롯하여 지방의 풍물(風物)을 시로써 읊고 있는 것이 많거니와 특히 외이죽지사(外夷竹枝詞)는 외국(外國)의 풍물을 시화(詩化)한 것으로 유명하다.

 

 

여기서는 조수삼(趙秀三)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초기작 선죽교(善竹橋)를 보인다.

 

波咽橋根幽草沒 물결은 다리에 부딛혀 울고 풀들은 물 속에 잠기는데
先生於此乃成仁 선생은 이곳에서 인()을 이루셨다.
乾坤弊盡丹心在 세상은 다하여도 단심(丹心)은 남아있고
風雨磨來碧血新 비바람 몰아쳐도 선혈(鮮血)은 새롭다.
縱道武王扶義士 무왕(武王)이 의사(義士)를 부축하였다 말들하지만
未聞文相作遺民 문상(文相)이 유민(遺民) 되었단 말 듣지 못했네.
無情有恨荒碑濕 무정(無情)한 한()은 거친 비석에 젖어있어
不待龜頭墮淚人 비석 앞에서 굳이 눈물 흘릴 필요 없다네.

 

선죽교는 고려의 충신 정몽주(鄭夢周)가 죽임을 당한 곳으로 알려진 유명한 사적이다. 조수삼(趙秀三)은 이 선죽교를 지나며 정몽주(鄭夢周)의 충절을 회상하고 있다. () 무왕(武王)이 상중(喪中)에 은() 주왕(紂王)을 정벌하려 할 때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불가(不可)함을 간하다가 죽음을 당할 뻔 했으나 이들은 의사(義上)라 살아날 수 있었다. 그러나 남송(南宋)의 문천상(文天祥, 文山, 右相)은 원()에 대항했다가 포로가 되어 참수(斬首) 당함에 따라 유민(遺民)으로 살아남지 못했다. 그러므로 나라가 망할 때의 충신은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이 이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인용

목차 / 略史

우리 한시 / 서사한시

한시미학 / 고려ㆍ조선

眞詩 / 16~17세기 / 존당파ㆍ존송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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