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시인으로서의 다산(茶山)은 그 평가 기준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으로 비칠 수 있다. 『대동시선』에 선발된 그의 작품으로는 「적중송죽리김학사리교귀경(謫中送竹里金學士履喬歸京)」, 「능허대(凌虛臺)」, 「우중양기(雨中兩妓)」(이상 七律), 「강천반청도(江天半晴圖)」, 「적성촌사(積城村舍)」(이상 七古)가 있지만, 여기서는 경세가(經世家)와 시인(詩人)의 면모를 함께 찾아볼 수 있는 「탐진농가(耽津農歌)」 넷째 수를 보인다.
穮蔉從來不用鋤 | 김매고 북돋우기 호미를 쓰지 않고 |
手搴稂莠亦須除 | 잡초도 두 손으로 잠깐동안 뽑아내네. |
那將赤脚蜞鍼血 | 어떻게 맨다리에 거머리가 빨아낸 피로 |
添繪銀臺遞奏書 | 그림을 그려서 은대에 보낼까. |
「탐진농가(耽津農歌)」는 정약용(丁若鏞)이 1801년 신유교난(辛酉敎難)에 연루되어 강진(康津)에 유배되었을 때 지은 작품으로, 탐진은 강진의 옛 이름이다. 「탐진농가(耽津農歌)」는 「탐진촌요(耽津村謠)」, 「탐진농가(耽津農歌)」, 「탐진어가(耽津漁歌)」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탐진농가(耽津農歌)」 10수【원래 12수였는데 10수만 남아 전함】는 1804년에 지었다고 한다. 농촌 백성의 소박한 생활상이나 고난에 찬 삶을 진솔하게 그리기 위하여 제명(題名)을 ‘악부(樂府)’라 한 것으로 보인다. 위의 시에서 “맨 다리로 논에서 일을 하다가 거머리에게 물어 뜯긴 피로 그림을 그려 은대(銀臺)에 상주문(上奏文)을 보낸다”고 한 바깥짝의 제조 솜씨는 어려운 농촌 사정을 핍진(逼眞)하게 드러내는 데는 성공하고 있지만, 4ㆍ3 또는 2ㆍ2ㆍ3의 조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칠언시(七言詩)의 구성원리에서 보면 다듬어진 것이 되지 못한다. 물론 이는 풍인주(諷人主)를 위하여 당대 조선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조선시(朝鮮詩)의 변모 양상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도 있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