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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과 연암을 찾아 떠나는 실학캠프 참가기 - 4. 정약용이 여유당이라 호를 지은 이유 본문

연재/여행 속에 답이 있다

다산과 연암을 찾아 떠나는 실학캠프 참가기 - 4. 정약용이 여유당이라 호를 지은 이유

건방진방랑자 2019. 10. 22.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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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재에 도착한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통성명을 하며 친해지기 시작했다. 이럴 때 보면 사람은 어색한 상황을 어떻게든 정리하려 노력하는 게 보인다. 그러니 멋쩍을지라도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친해지니 말이다. 그 덕에 나도 두 명의 친구가 한 순간에 생겼고 어색한 사람들과 어떻게 34일 동안 지내지라는 우려는 말끔히 사라졌다.

 

 

마재에서 다산을 만났다. 그의 얘기를 들어보자.

 

 

 

마재엔 다산 인생의 시작과 끝이 담겨있다

 

마재는 다산(1762~1836)이 나서 15년 동안 자란 곳이자, 12년의 공직 생활을 끝내고 1년간 머물다가 유배 후에 돌아와 18년을 살았던 곳이다. 마재에서만 34년을 산 것이니, 다산의 시작과 끝이 오롯이 담겨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다산의 생애는 1800년을 기점으로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진다고 볼 수 있다. 1800년도 이전의 생애는 탕평책으로 정조의 비호를 받으며 관료로서 승승장구하던 때이다. 정조라고 하면 당연히 떠오르는 수원화성은 다산과도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수원화성을 만들 때 사용한 거중기를 다산이 고안하여 발명한 것으로 성곽축조 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게 했으며, 정조가 1795년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겸하여 화성행궁에 행차할 때 한강을 건널 수 있도록 배다리를 만들어 그 장엄한 광경이 한강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도록 했다. 실제로 다산 유적지 입구에 들어서면 마당에 기념탑과 함께 거중기가 떡하니 있을 정도이니, 이쯤 되면 공직자 다산의 대표작이라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런 그에게 엄청난 핍박이 닥쳐온다. 남인들은 탕평책으로 혜택을 받기도 했지만, 어찌 보면 고졸 취업 늘어나라는 기사의 제목처럼 극소수의 남인이 대우받았을 뿐 차별은 여전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문제는 단순히 차별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미 기득권 세력인 노론 벽파의 심기를 매우 많이 거슬려서 언제고 제거 당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나마 남인세력의 절대적인 지지자인 정조가 두 눈 부릅뜨고 살아 있기에 태풍 전야는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수원화성은 노론의 심기를 무척이나 건드렸다. 지금으로보면 수도 이전과 같은 느낌이기 때문에 기득권층의 반발을 샀던 것이다.

 

 

그러던 1800년에 정조는 의문의 죽음(정조의 죽음에 대해선 독살에 의한 것이라는 둥, 홧병에 의한 것이라는 둥 다양한 얘기들이 있지만, 지금의 세월호 사건에도 수많은 의문들이 따르듯 그 당시에도 백성들은 그 죽음에 수많은 의문들을 덧붙였다)을 당하게 되자, 노론은 절호의 기회라도 잡은 듯 남인들의 약점인 천주교 문제를 빌미삼아 마침내 피의 복수(신유박해辛酉迫害)를 감행한다.

 

 

정조는 천주교는 사교이기에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거라 봐서 박해를 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순조 때부터 박해의 역사는 시작된다.

 

 

그 여파로 남인세력은 완전히 쑥대밭이 됐고, 다산의 가문은 풍비박산이 나고 만다. 조선 최초의 자발적 천주교 영세자이자, 다산의 자형인 이승훈(1756~1801)과 셋째 형인 정약종(17601801)은 마지막까지 배교를 하지 않아 사형을 당했고, 둘째 형인 정약전丁若銓(1758~1816, 자산어보玆山魚譜라는 흑산도의 수산물을 기록한 책이 있음)과 막내인 다산은 신유박해 이전에 이미 배교를 했기에 사형이 아닌 유배형을 당하게 된다.

한참 잘 나가던 관료에서, 이젠 비빌 언덕조차 없는 역적으로 인생은 한 순간에 뒤바뀌었다. 이쯤 되면 영화 타짜에서 나도 인생의 단맛 쓴맛 똥맛까지 다 본 사람이야라는 고니의 말이 다산의 말처럼 들리기까지 한다. 이때 다산은 그런 울분을 다방면의 서적을 편찬하고 후진을 양성하며 풀어낸다.

 

 

   ▲  다산은 근엄하다. 그가 좀 더 친근한 어조로 말한다면, 아마도 고니처럼 감정 팍팍 담아서 표현하지 않았을까.

 

 

 

여유당, 그기 뭐꼬?

 

1800년에 공직생활을 끝내고 마재로 돌아온 다산은 여유당與猶堂이라는 당호를 짓는다. 정조가 승하하면서 대대적인 남인 핍박이 펼쳐질 것을 걱정하며 그런 심정을 당호에 담은 것이다. 이 당호야말로 그 당시 다산이 얼마나 심적인 고통을 겪었는지, 앞날에 닥칠 우환을 얼마나 걱정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가 그런 당호를 짓게 된 경위는 여유당기與猶堂記에 적혀 있으니, 지금부턴 그 내용을 살펴보며 그때의 심정을 유추해보도록 하자.

 

 

어려서부터 세상에 제멋대로 돌아다니며 의심할 줄을 몰랐고, 커서는 과거공부에만 빠져 돌아볼 줄을 몰랐으며, 30살이 되어서는 지난 일을 깊이 후회하면서도 두려워하지를 않았다.

이 때문에 선을 좋아하여 싫어하지 않았으나, 비방은 홀로 많이도 받았다. ! 이것 또한 운명이라 할 수 있을까? 아니다, 이것은 나의 성품에 따른 것이니, 내가 또한 어찌 감히 운명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是故方幼眇時, 嘗馳騖方外而不疑也; 旣壯, 陷於科擧而不顧也; 旣立, 深陳旣往之悔而不懼也.

是故樂善無厭而負謗獨多. 嗟呼! 其亦命也. 有性焉, 余又何敢言命哉. -丁若鏞, 與猶堂記

 

 

여유당에 걸려 있는 편액. 과연 이 당호는 어떻게 지어진 걸까? 

 

 

마재로 돌아온 다산은 지금까지 정신없이 살아오느라 놓쳤던 것들을 떠올리며 일생의 일 막을 정리하고 있었던가 보다. 계속 될 것만 같던 관료 생활이 끝나고 폭풍의 전야 속에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만감이 교차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때 다산은 자신의 과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보다 자신이 놓쳐온 것들(不疑, 不顧, 不懼)을 돌아봤고, 그 때문에 많은 비방을 받게 됐다고 평가했다. 박노해 시인이 말한 인생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건너뛴 / 본질적인 것들은 결코 사리지지 않는다 / 담요에 싸서 버리고 떠난 핏덩이처럼 / 건너뛴 시간만큼 장성하여 돌아와 / 어느 날 내 앞에 무서운 얼굴로 선다(건너 뛴 삶)’이라는 시처럼, 과거의 질곡은 사라지지 않고 현재의 아픔으로 재탄생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운명이라기보다, 성품 때문이라고 한 부분이 눈에 띈다. 그건 선천적인 문제라서 어쩔 수 없다기보다, 자기 성향에 따른 문제이기에 삶의 태도가 바뀌면 달라질 수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여기서 우린 운명론자가 아닌 실존의 철학자인 다산의 면모를 볼 수 있다.

 

 

다산은 마재에서 나고 자랐으며,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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