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위(申緯)의 시세계는 그 기조(基調)가 사실적(寫實的)이라는 사실 외에 한마디로 말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하다. 그는 교유관계에 있어서도 신분계층이나 당색(黨色)을 초월하여 광범하게 사람을 사귀고 있어 이것이 묘하게도 그의 시세계와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신위(申緯)는 그렇게 다양한 경향을 보이면서 그토록 많은 시편을 제작하고서도 정작 자신의 시관(詩觀)을 밝히는 마땅한 산문저술을 남기지 않았다. 다만 「신자하시집서(申紫霞詩集序)」에서 김택영(金澤榮)이 진술한 기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염려(豔麗)할 수 있고 소야(疎野)할 수 있으며 변환(變幻)할 수 있고 돈실(敦實)할 수 있으며 졸박(拙樸)할 수 있고 호방(豪放)할 수 있으며 평이(平易)할 수 있고 기험(崎險)할 수 있으며 천만 가지 정상을 마음대로 구사하여 활발하고 생동하지 않음이 없어 눈앞에 가득 펼쳐졌다. 이에 독자에게 눈이 어지럽고 정신이 취하도록 하게 함이 마치 만무(萬舞)가 펼쳐지고 오제(五齊)가 무르익은 듯하니, 광세(曠世)의 특별한 재능을 갖추고 일대(一代)의 지극한 변화를 다하여 마음껏 기량을 떨친 말기의 대가라고 말할 만하니
能豔能野, 能幻能實, 能拙能豪, 能平能險, 千情萬狀, 隨意牢籠, 無不活動, 森在目前. 使讀者目眩神醉, 如萬舞之方張, 五齊之方醲, 可謂具曠世之奇才, 窮一代之極變, 而翩翩乎其衰晩之大家者矣.
이 신위(申緯)의 시세계가 얼마나 다양했던가를 명증하고 있을 뿐이다.
신위(申緯)의 시는 스스로 중체(衆體)를 구비하여 일대(一代)의 극변(極變)을 다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시의 제재를 선택함에 있어서도 그는 시인 자신의 술회를 토로한 것에서부터 타인의 시에 차운한 시, 타인의 시를 의방한 시, 사회를 풍자한 시, 그리고 시를 통해 시인과 시를 논한 시, 민간의 풍속을 그려낸 시 등이 그에 해당한다. 즉 타인의 시를 의방한 것으로는 왕사정의 「추류시(秋柳詩)」를 따라 지은 「후추류시(後秋柳詩)」를 비롯하여, 남옥(南玉)의 오언고시(五言古詩) 「맥풍(貊風)」을 칠언절구(七言絶句)로 개작한 「맥풍십이장(貊風十二章)」 등을 들 수 있고, 사회를 풍자한 시로는 「잡서(雜書)」 50수를 거론할 수 있다. 또 전래의 시조를 7언절구로 한역한 소악부(小樂府) 40수가 있는가 하면, 당시 민간에서 유행하던 배우(倡優)들의 연희를 보고서 지은 「관극절구(觀劇絶句)」 12수가 남아 있고, 시흥(始興)의 자하산장(紫霞山莊)에 머물면서 그곳의 풍속을 읊은 「시흥잡절(始興雜絶)」 20수가 전하는 바, 그의 민간 풍속에 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뿐만 아니라 작은 한시사라 할 수 있는 ‘시로 시를 논하다[以詩論詩]’의 「동인논시절구(東人論詩絶句)」 35수는 최치원(崔致遠)으로부터 김상헌(金尙憲)에 이르는 51명의 작품과 특성을 논평한 귀중한 작품이다. 그러나 신위(申緯) 시의 사실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의 「화남우촌유서시(和南雨村柳絮詩)」를 읽어야 한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