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기(玄錡, 1809 순조9~1860 철종11, 자 信汝, 호 希菴)는 역관 출신이지만 시작(詩作)에 뛰어나 당시의 사람들이 시신(詩神)이라 불렀다. 그는 출신신분 때문에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길이 없자 가난과 음주와 시작으로 평생을 보냈으며, 서로 세한붕(歲寒朋)으로 일컫던 정지윤(鄭芝潤) 이 죽자 풍악산에 들어가 스스로 추담선자(秋潭禪子)라 하고 선문(禪門)에 의탁하였다. 많지 않은 그의 시작들이 문하생 김석준(金奭準)에 의해 수집되어, 현재 『희암시략(希菴詩略)』에 34수가 전하고 있다.
현기의 시세계는, 스스로 ‘기(奇)’를 좇지 않았지만 시상이 기발한 것이 특색이다. 「차동파운시매은(次東坡韻示梅隱)」을 보기로 한다.
飢時噉飯飽時眠 | 배고플 때 밥먹고 배부르면 잠드니 |
一粟人間寄渺然 | 창해에 좁쌀 같은 인간 아득함에 붙였네. |
踪跡閒雲空出峀 | 구름같은 종적은 부질없이 산동굴에서 나오고 |
性情枯木已爲禪 | 고목같은 성정은 이미 선(禪)이 되었네. |
千秋滾滾非還是 | 흐르는 천 년 세월에 비(非)가 도리어 시(是)가 되고 |
萬象紛紛醜更好 | 어지러운 만상은 추(醜)가 연(姸)이 되네.. |
滿眼梅花今負汝 | 눈에 가득한 매화가 지금 너를 저버려 |
淸香不與入詩篇 | 맑은 향기 시편속에 넣지 못하네. |
이 시는 동파시를 차운한 것이지만, 내용은 고백적인 자신의 삶을 노래한 것이다. 동파(東坡)의 「적벽부(赤壁賦)」에서 “기부유어천지 묘창해지일속(寄蜉蝣於天地, 渺滄海之一粟)”을 빌려 스스로 한 인간으로 태어난 자신의 약점을 확인하고, 세상(매화)으로 부터 버림받아 시업(詩業)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회한을 “만안매화금부여 청향불여입시편(滿眼梅花今負汝, 淸香不與入詩篇)”으로 토로하고 있다. 위항인(委巷人)의 불평음(不平音)을 완곡하게 드러내 보인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그러나 시어(詩語)를 단련한 흔적은 없지만, 이 미련(尾聯)에서 보여준 기발한 발상은 범용한 시인으로서는 감히 바라볼 수 없는 높은 경지의 것임에 틀림없다.
이외에도 현기의 시작 중에는 선자적인 생활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 많다. 5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의 삶은 줄곧 세상과 등지고 있었으며, 스스로 승복을 입고 산문(山門)에 몸을 던지기도 했다. “향사르며 선대 쪽으로 가서, 이로부터 번뇌의 뿌리를 끊고자 하네[焚香欲向禪臺去, 從此斷除煩惱根 『玄菴詩略』 「偶題」].”라든가, “황금으로 고운 꽃도장 만들려 하나, 색과 상이 어찌 다르랴 헛되고 헛되어라[黃金欲鑄芳菲印, 色相奈他空復空 『玄菴詩略』, 「落花」].” 등이 이러한 삶의 부분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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