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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사, 한시 문학의 종장 - 1. 한말의 사대가(강위)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사, 한시 문학의 종장 - 1. 한말의 사대가(강위)

건방진방랑자 2021. 12. 21.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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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위(姜瑋, 1820 순조20~1884 고종21, 仲武堯章韋玉, 秋琴慈屺聽秋閣古懁堂)의 가계는 조선중기 이후 문관직과 멀어지기 시작하여 그가 태어날 무렵에는 이미 무반신분(武班身分)으로 굳어져 있었다. 그는 벼슬이 차단된 신분적 한계로 말미암아 일찍이 과거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학문과 문학에 전념하게 되었지만, 잠시 과거에 뜻을 두고 공부할 시절에는 영의정을 지냈던 정원용(鄭元容)의 집에 기숙하며 그의 손자였던 건조(健朝)와 함께 수학하였다. 또한 당시 이단으로 지목받던 민노행(閔魯行)을 찾아가 4년간 수학하였으며, 민노행의 유언에 따라 제주도에 귀양가 있던 김정희(金正喜)에게도 5년 남짓을 배웠다. 그러나 민노행과 김정희(金正喜)는 모두 고증학에 매료된 대가였으므로, 강위도 또한 고증학에 대한 식견을 넓힐 수 있었다.

 

김정희(金正喜)가 북청(北淸)의 귀양에서 풀려난 뒤 강위는 방랑생활로 들어갔지만, 그의 시명은 오히려 날로 높아져서 당시 문인들 가운데서 성가(聲價)를 드날리게 되었다. 그러다가 1862년에 삼남지방에서 일어난 민란의 소용돌이에서 탈출한 이후 경사로 되돌아와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게 된 것이 국운의 고비고비에서 남다른 고뇌를 맛보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한편 강위(姜瑋)1873~1874년에 걸친 두 번의 중국여행을 통하여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국제정세를 면밀하게 파악할 수 있었고, 박규수(朴珪壽) 등과 함께 적극적인 개항론자가 되었다. 1862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될 때 전권대신이었던 신헌(申櫶)을 막후에서 보좌하였으며, 1880년에는 서기(書記) 자격으로 일본 수신사인 김홍집(金弘集)을 수행하였고, 귀국 후 황준헌(黃遵憲)조선책략(朝鮮策略)에서 제시했던 연미거아정책(聯美拒俄政策)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게 되었다. 그는 끝내 개화의 역정 속에 쓸쓸한 최후를 맞이하였지만, 그의 친구인 방치요(房致堯)에 의하여 그의 유고(遺稿) 고환당집(古懁堂集)을 남기었다.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이 스스로 강위의 시제자(詩弟子)라 밝힌 바와 같이 강위의 시()는 한말의 창강(滄江)영재(寧齋)매천(梅泉) 등 한말 시인들의 시풍을 열어주는 데 기여한 바 크다

 

 

그는 이건창(李建昌)의 추천에 힘입어 김택영(金澤榮)황현(黃玹)과 함께 한말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꼽히었거니와, 비분과 강개가 서린 격조 높은 율시를 많이 남겼다. 그는 그의 문집 외에도 동문자모분해(東文子母分解), 용학해(庸學解), 손무자주평(孫武子注評)등의 저서를 남기었으며 그의 시작(詩作) 중에는 대동시선(大東詩選)통제영(統制營), 수춘도중(壽春道中), 도중문안유감(道中聞雁有感)(이상 七絶) 희차란루경동위당념운(喜次蘭淚京同韋堂拈韻)(五律), 쌍계방장(雙溪方丈), 경사우림해사(京師遇林海史), 김노포동구요집일범루(金老圃東耈邀集一帆樓), 제주망양정각기정용산건조기주(濟州望洋亭却寄鄭蓉山健朝記注)(이상 七律) 등이 뽑혀 있으며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쌍계방장(雙溪方丈)은 다음과 같다.

 

斜日石門整客襟 해질녘 돌문 앞에 옷깃을 바로 하니
洞中仙靄望沉沉 골짜기 속 아지랑이 볼수록 그윽하다.
雙溪水活孤雲墨 쌍계(雙溪) 물은 고운(孤雲)의 먹물로 살아 있고
二鶴峯靑六祖心 이학(二鶴)의 봉우리는 육조(六祖)의 마음으로 푸르다.
僧縛竹籬防虎密 중이 엮은 대울타리 호랑이 막기에 튼튼하고
寺餐松葉拒人深 절에서 주는 솔잎밥 손님에게 오만함이 심하다.
上方七佛如相見 상방(上方)의 칠불(七佛)은 서로 마주 보면서
許施秪園布地金 지원(祗園)의 포지금(布地金)을 허시(許施)하는도다.

 

수련(首聯)은 쌍계사(雙溪寺) 주변의 승경(勝景)을 묘사하였으며 함련(頷聯)은 절의 역사가 오래 되었음을 서술하였다. 경련(頸聯)에서는 대나무로 울을 쳐서 호환(虎患)을 막는 풍습과 절밥이 거칠어 손님 대접이 오만함을 사실 그대로 진술하였다. 시어의 조탁에 힘쓰지 않고 눈에 보이는 대상을 그대로 읊고 있어 비록 거칠기는 하지만 창신(創新)을 중시한 그의 시세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인용

목차 / 略史

우리 한시 / 서사한시

한시미학 / 고려ㆍ조선

眞詩 / 16~17세기 / 존당파ㆍ존송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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