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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죽은 시인의 사회 - 18. 인형이 아닌 인간이 되길 희망하다 본문

연재/시네필

죽은 시인의 사회 - 18. 인형이 아닌 인간이 되길 희망하다

건방진방랑자 2019. 10. 21.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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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인형이 아닌 인간이 되길 희망하다

 

닐은 정말 하고 싶은 일이었기에 아버지 몰래 오디션을 봤고 남자주인공이란 배역도 맡게 되었다. 하지만 이 내용을 친구에게 듣게 된 아버지가 다짜고짜 기숙사를 찾아와 영화 초반의 졸업연감 만드는 일을 그만두게 만든 것처럼 화를 내고 있는 상황이다. 영화 초반의 닐이었다면, 마찬가지로 연극도 포기했을 것이다. 아버지의 거부를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킬 각오는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 꿈을 향한 정열의 화신이 되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뭔지를 알게 됐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 앞에선 마지못해 대답을 했지만, 이번에는 관두지 않을 것이다. 단지 아버지와 말을 해봐야 소용이 없기 때문에, 그나마 얘기를 할 수 있는 키팅을 찾아간 것이다. 키팅은 연극을 시작하기 전에 아버지와 결론짓길 바랐지만, 닐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연극무대에 서게 된다.

 

 

닐의 일생에서 가장 찬란한 순간이지 않을까. 꿈 같고, 현실이었으면 좋겠던 바로 그 순간.

 

 

그는 자신의 꿈을 향한 정열의 화신이 되었다. 그런 정열이 혹 한 때의 치기로 비춰질까봐 걱정하며 최선을 다해 연극을 준비했다. 그 결과 모두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연극은 성황리에 끝났고, 그의 명연기를 보던 친구들까지도 닐 훌륭했어라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닐은 연극을 잘 마무리 지은 희열을 느낄 새도 없이 아버지의 손에 이끌어 황급히 연극무대를 빠져 나와야 했고, 집에 와선 당연히 혼나게 된다. 하지만 이때 전혀 뜻밖의 이야기까지 듣게 된다. 지금 다니는 학교를 자퇴시키고, 육군사관학교로 입학시키겠다는 일방적인 통보 말이다. 물론 이땐 처음으로 언성까지 높여가며 그런 아버지에게 화를 내보기도 했지만, 전혀 먹혀들지 않자 곧바로 체념해 버리고 만다. 닐에겐 늘 선택인 것처럼 보이지만, 강제에 불과한 유사선택(김진숙씨 특강 때 표현)’만 있었던 것이다.

 

 

찬란한 그 순간에 듣게 되는 말은, 축복도 아닌 전학의 문제다. 참 말로 할 수 없는 비감이 느껴진다.

 

 

 

정열의 화신 닐, 인형이 아닌 인간이 되다

 

아버지와 잠시의 설전이 오고 갔지만,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닐은 체념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이대로 밤이 지나고 나면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내일부턴 육군사관학교로 옮겨 아버지가 원하는 꼭두각시의 삶을 살아야만 한다.

 

 

아마 닐은 아버지와 자신의 이야기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가 맛본 카르페디엠의 희열은 죽은 시인의 사회란 비밀 동아리에서의 일탈로, 연극을 통해 자신의 끼를 맘껏 드러내던 정열로 드러났다. 하지만 이제 그것 또한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고 아버지가 원하는 삶만을 살아야 한다. 아마도 그런 상황에서 닐은 앞날이 답답하고 짜증스럽게 느껴졌을 것이다. 더 이상 아버지의 인형이 아닌 내 의지대로 살아가는 인간이 되고 싶었지만, 여전히 주위 환경과 상황은 그 자신이 인형이길 바라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그대로 아무렇지 않게 넘긴다면 그건 아버지가 원하는 꼭두각시의 삶을 승인해주는 꼴이다. 지금까지 그래왔으니, 앞으로도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가? 닐은 여태껏 하지 못했던 결단을 이 순간엔 내리고 만다. ‘인형이 아닌 인간이 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연극이 끝난 희열을 만끽하기도 전에, 그는 새벽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인간이 되는 머나먼 길을 떠나고 만다.

 

 

이 장면은 묘하게 예수의 십자가 수난과 겹친다. 예수는 인류의 죄를 사했고, 닐은 꼭두각시 인생의 삶을 버렸다.

 

 

 

하나의 문제는 많은 문제를 포괄하고 있다

 

닐의 여행은 파문을 낳는다. 명백한 증거들이 있음에도, 학교 관계자들은 스스로 반성해보거나 부모에게 책임을 묻기보다 키팅 선생에게 모든 문제를 덮어 씌웠으니 말이다. 희생양 또는 배후자를 키팅으로 지목하며 근본적인 문제를 덮어 버린 것이다. 이에 대해 책에선 토드의 감상평이 실려 있다.

 

 

닐의 죽음은 본인의 적성이나 꿈은 무시하고 억지로 갈 길을 강요했던 그의 아버지와 학교 공통의 책임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반성은커녕 책임을 떠넘길 사람을 물색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는 것이다. 그건 닐 혼자만의 문제로 덮어둘 수는 없는, 어쩌면 그들 모두의 문제이기도 했기에 더욱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죽은 시인의 사회, H클라인바움 저, 한은주 역, 서교출판사, 2004, pp 258

 

 

▲  토드는 어찌 보면 본질을 더 잘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피해자가 우리 모두라는 것도 말이다.

 

 

최근에 한국 최고의 이과 대학인 카이스트에서 자살하는 학생들이 비약적으로 늘고 있다고 한다. 누가 보면 자살한 학생들이 심신이 미약하여 문제가 많아서 그런 것 같지만, 여기에도 장학금으로 경쟁을 유도하는 시스템의 부조리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처럼 닐 또한 교육 시스템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자살을 사회적 타살이라 부르는 것이다.

한국 청소년들의 자살률이 세계 제1라고 한다. 이건 어찌 보면 한국의 교육이 청소년들에게 엄청난 정신적인 스트레스와 공포감을 조장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러함에도 학교는 더욱 더 경쟁 일변도로, 소수의 성공을 위해 다수를 들러리로 세우는 형태로 고착화되어 가고 있다. 그러니 이 시대에도 여전히 닐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에게 자살했다가 몰아붙일 수 있을까? 그들을 몰아세운 건 우리가 아닐까?

 

 

더 이상 땜질식의 처방이 아닌, 근본적인 처방이 필요한 시기다. 그래야 우울하게 죽어가는 수많은 이 시대의 닐들을 살릴 수 있고, 교학상장의 교육을 꿈꿀 수 있으니 말이다.

원랜 이번 후기에서 끝맺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다음 편까지 늘어나게 되었다. 글 또한 써지는 순간에 별도의 생명력을 부여받나 보다. 어디까지 어떻게 확장되고, 어떻게 끝맺게 될지 쓰는 사람조차 종잡을 수 없으니 말이다. 다음 편에서 사랑의 화신인 녹스의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다. 덧붙여 한국 땅의 수많은 닐들이여 미안하다!

 

 

한국 땅의 수많은 닐이여, 떠난 곳에서 행복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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