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전시되는 고통, 소외되는 인간
눈앞에서 끔찍한 현실을 목격했을 때 ‘세상에,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다’고 생각하고, 반대로 영화 속에서 그야말로 ‘리얼한’ 화면을 발견했을 때 ‘정말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데!’라고 감탄하는, 스펙터클의 사회.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전쟁 영화 『라이온 일병 구하기』가 처음 나왔을 때 관객들은 ‘하이퍼리얼리즘의 극치’라며 전투 장면의 현장감을 극찬했다. 그러나 『라이온 일병 구하기』의 숨 막히는 전투 신이 과연 ‘사실적’이어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일까. 사실감이란 본래 ‘현실과 재현 사이의 거리’를 측정한 후 판단되는 감각 아니었는가. 그러나 이 영화를 본 대다수의 관객은 총알이 눈앞에서 난사되고 사람이 피와 내장을 흘리며 죽어가는 실제 전투를 겪어본 적이 없다. 재현은 있지만 현실은 없다. 그러므로 재현과 현실 사이의 ‘거리’ 또한 측정할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영화를 보면서 ‘와, 이건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걸!’이라고 느끼는 바로 이 ‘리얼함’의 감각은 어디서 연원하는 것일까.
2001년 9월 11일 세계무역센터가 공격당했을 때 그 건물에서 간신히 피해 나왔던 사람들이나 근처에서 그 장면을 그대로 봤던 사람들은 처음 그 공습을 설명하면서 “믿을 수 없다”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영화 같다”고 말했다.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어 할리우드 재앙 영화가 만들어진 지 40여 년이 지난 오늘날, 결국 어떤 재앙에서 살아남은 생존자가 자신이 짧은 시간 동안 겪었던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재앙을 “마치 꿈처럼 느껴져요”라는 말 대신에 “마치 영화처럼 느껴져요”라는 말로 표현하는 상황이 닥쳤다.)
-수전 손택, 이재원 역, 『타인의 고통』, 이후, 2004, 43쪽.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거대한 스펙터클로 재창조하여 미디어에 전시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이라크전이 발생했을 때 미국이 전대미문의 ‘충격과 공포’를 자아냈던 방법은 바로 컴퓨터 전쟁 게임 같은 화면을 이라크 현장에서 연출하여 ‘전쟁을 영화같이’ 만든 후 그 편집된 화면을 전 세계에 방영하는 미디어 전략이었다. 현대인은 그렇게 타인의 고통을 볼만한 구경거리, 화려한 스펙터클로 전시한다. 우리는 ‘기아’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소말리아를 비롯한 아프리카 등지에서 뼈만 남은 앙상한 모습으로 커다란 눈망울을 굴리는 아이들의 사진 이미지를 떠올리고, ‘전쟁’ 하면 할리우드 영화나 컴퓨터 3D 전쟁 게임에서 본 ‘스펙터클’을 떠올린다. 미디어가 규격화하여 보여주는 타인의 고통이 우리의 공감(共感) 능력을 규정하고 한계 지운다. 고통의 시뮬레이션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고통이 주는 공포 혹은 ‘내가 저 고통을 겪지 않아서 다행이다’라는 안도감뿐이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리얼’하게 보였던 것은, 전쟁에 대한 우리의 지식 때문이 아니라, 감독이 연출해낸 장면의 ‘자극’이 관객이 느낄 수 있는 감각의 한계를 아슬아슬하게 위협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디어가 훈련시키는 것만큼만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미디어 사이보그가 되어가는 걸까.
윌에게 상처 입은 숀이 깨달은 ‘윌의 허점’도 바로 그것이다. 윌은 모든 것을 다 안다. 그의 천재성은 단지 ‘계산 능력’이 아니라 엄청난 독서량과 기억력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윌은 그림 하나에 얽힌 인간의 심리를 눈앞에서 보듯 생생히 그려낼 정도로 상상력도 뛰어나다. 그러나 윌의 모든 지식은 책이라는 미디어와 머릿속의 상상력을 통한 간접 체험이다. 그는 아름답고 고통스럽고 광기 어린 사랑을 문학작품을 통해서만 경험해본 ‘책상 위의 천재’인 것이다. 이제 숀의 반격이 시작된다.
두 번째 정신과 상담. 윌의 난데없는 선제공격에 고통스러워하던 숀은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숀은 이제 편안해진 표정으로 말한다. 너의 이야기를 들으며 밤새 생각하다가 갑자기 얻은 깨달음이 있다고. 그건 바로 윌, 네가 ‘어린애’라는 것이었다고.
숀: 넌 네가 뭘 지껄이는 건지도 모르고 있어.
윌: 알아줘서 고맙네요.
숀: 당연한 거야. 넌 보스턴을 떠나본 적이 없으니까.
윌: 그렇죠.
숀: 내가 미술에 대해 물으면 넌 온갖 정보를 다 갖다댈걸? 미켈란젤로를 예로 들어볼까? 그에 대해 잘 알 거야. 그의 걸작품이나 정치적 야심, 교황과의 관계, 성적 본능까지도 알 거야, 그치? 하지만 시스티나 성당의 내음이 어떤지는 모를걸? 한 번도 그 성당의 아름다운 천정화를 본 적이 없을 테니까. 난 봤어. 또, 여자에 관해 물으면 네 타입의 여자들에 관해 장황하게 늘어놓겠지. 벌써 여자와 여러 번 잠자리를 했을 수도 있고. 하지만 여인 옆에서 눈뜨며 느끼는 행복이 어떤 건진 모를걸. 전쟁에 관해 묻는다면 셰익스피어의 명언을 인용할 수도 있겠지. 다시 한 번 돌진하세, 친구들이여, 하며!
하지만 넌 상상도 못해. 전우가 도와달라는 눈빛으로 널 바라보며 마지막 숨을 거두는 걸 지켜보는 게 어떤 건지……. 사랑에 관해 물으면 너는 한 수 시까지 읊겠지만, 한 여인에게 완전한 포로가 되어본 적은 없을 걸……. 그녀의 눈빛에 완전히 매료되어 신께서 너만을 위해 보내주신 천사로 착각하게 되지……. 절망의 늪에서 널 구하라고 보내신 천사……. 또한 한 여인의 천사가 되어 사랑을 지키는 것이 어떤 건지, 넌 몰라……. 그 사랑은 어떤 역경도, 암조차도 이겨내지……. 죽어가는 아내의 손을 꼭 잡고 두 달이나 병상을 지킬 땐, 더 이상 환자 면회 시간 따윈 의미가 없어져…….
윌: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생소한 감정에 얼이 빠진 표정으로, 처음으로 잘난 척하지 않으면서 잠자코 듣고만 있다.)
숀: 진정한 상실감이 어떤 건지, 넌 몰라……. 진정한 상실감이란, 타인을 네 자신보다 더 사랑할 때 느끼는 거니까……. 아마 넌 누군가를 그렇게 사랑한 적이 없을 걸?
윌: …….
윌은 숨 돌릴 새 없이 이어지는 숀의 일갈에 허를 찔려 뜨끔하면서도,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모두들 엄마 손에 이끌려 떠난 후 황혼 속에 혼자 남은 아이처럼, 막막하고 슬픈 표정이다.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나만의 고통’에 빠진, 고독한 천재 소년. 윌은 자신의 고통을 말해도 어차피 사람들은 자신의 진짜 내면을 보게 되는 순간 얼굴을 돌려버릴 것을 알았다. 그 또한 오랜 차별과 핍박의 경험이 만들어낸 ‘세상에 대한 지식’이었다. 윌은 ‘천재’로 판단되어 호명되는 순간 천재라는 존재를 길들이는 사회의 호명체계 속에 갇히게 된다. 그의 캐릭터에서 ‘천재 이외의 것’을 보려 하는 사람, 그의 명석한 두뇌 회전의 광휘에 가려 미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상처의 풍경을 본 사람, 그가 바로 숀 맥과이어(로빈 윌리엄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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