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연민’의 마지노선을 넘을 수 있을까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대학생 츠네오(츠마부키 사토시)는 낯선 괴짜 할머니의 유모차에 탄 소녀 조제(이케와키 치즈루)를 만난다. 행인의 눈에 띄지 않는 밤, 걷지 못하는 소녀 조제는 할머니가 끄는 낡은 유모차를 타고, 도둑질하듯 은밀하게 세상을 구경한다. 이 소녀에게 뚝딱뚝딱 엉터리 휠체어를 만들어주는 츠네오. 조제는 츠네오가 끄는 휠체어를 타고 처음으로 아름다운 대낮의 풍경을 보게 된다. 평범한 하늘에 뜬 범상한 구름을 보며 마치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저 구름도 집에 가져가고 싶어”라고 속삭이는 조제, 다락방에서 헌책들을 벽돌처럼 쌓아놓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사는 조제. 두 다리로 걷지는 못하지만 상상 속에서 세상 모든 곳을 바지런히 걸어 다니는 조제에게 츠네오는 사랑을 느낀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액자 저편에서 아련하게 미소 짓고 있던 타인의 삶이 처음으로 내 삶의 두터운 각질을 뚫고 침투해 오는 이야기다. 액자를 깨고 들어가 사진 속 그녀의 진짜 삶을 직시하고 그녀를 도울 수 있다고 믿었던 츠네오. 그는 막상 액자 너머로 들어가 만난 ‘진짜 세상’에 단지 ‘그녀의 고통’만이 기다리고 있던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간신히 넘어 들어간 그 아름다운 액자 건너편에는, 그녀를 사랑할 수는 있지만 그녀를 부모님께 도저히 보여드릴 수는 없는 그의 공포가, 그녀와 잠시 동거할 수는 있지만 영원히 함께할 수는 없는 스스로의 불안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의 사랑은 진심이었지만 그의 몸은 ‘연민의 마지노선’을 넘을 수가 없었다. 그는 사랑에 풍덩 빠질 수는 있었지만 그 사랑 속에 끝까지 잠겨 있을 수는 없었다. ‘사랑에 빠지는 것’과 ‘사랑을 짊어지고 삶을 버티는 것’ 사이의 차이를 알아버리고야 말았다. 조제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가 도망치더라도 그를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츠네오가 잠들었을 때 조제는 마치 머지않아 혼자가 될 미래의 자기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듯, 긴 독백을 한다.
“깊고 깊은 바다 속 난 거기서 헤엄쳐 나왔어. 너랑 세상에서 가장 야한 섹스를 하려고. 그곳은 빛도 소리도 없고 바람도 안 불고 비도 안 와. 정적만이 있을 뿐이지. 별로 외롭지도 않아.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냥 천천히, 천천히 시간이 흐를 뿐이지. 난 두 번 다시 거기로 돌아가진 못할 거야. 언젠가 네가 사라지고 나면 난 길 잃은 조개껍질처럼 혼자 깊은 해저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겠지. 그것도 그런대로 나쁘진 않아.”
걷지 못하는 소녀 조제처럼, 타인을 믿지 못하는 소년 윌 또한 스카일라의 사랑이 ‘끝까지’ 갈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는다. 고통의 반복 학습 효과로 인해 윌은 치명적인 피해망상을 앓고 있다. 그러나 윌은 숀이라는 타인의 삶을 엿보면서, 어쩌면, 어쩌면 자신도 사랑이라는 걸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본다. 숀은 아무런 경계심 없이 자신의 아픈 상처를 윌에게 보여준다. 아내가 병상에 누워 있던 6년 동안 직장조차 그만두었고, 아내를 만나기 위해 레드 삭스 팀 역사상 가장 큰 월드 시리즈 게임을 직접 볼 기회를 눈앞에서 놓쳤지만, 아내가 세상을 떠난 지금도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고. 숀이 만약 아내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 역사적 야구경기를 볼 수 있었을 것이고, 정신과 의사로서 ‘경력’을 희생당하지 않고 출세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숀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새로운 여자를 만나고 싶지 않냐는 윌의 질문에, 그저 내 아내는 죽었다고 말한다. 숀이라는 타인의 고통을 사유함으로써, 윌은 전혀 다른 각도에서 자신의 삶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스카일라는 윌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지만 윌은 자신의 방도 자신의 친구도 보여주지 않는다. 자꾸만 숨기고 싶다. 나의 과거를. 선생님처럼 온몸의 모공을 열어 한 여자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 여자가 나의 모든 것을 알면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고, 이 헛똑똑이 천재 소년은 믿는다. 하지만 윌은 “내가 창피한 거야? 아니면 그 반대야?”라는 스카일라의 질문에 더 이상 못 버티고 드디어 윌에게는 가족과도 같은 친구들, 처키(밴 에플렉)와 그 일당들을 보여준다. 친구들도 깜짝 놀란다. 윌이 모르는 사람을 데려온 것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처키는 윌에게 가장 자주 입는 속옷처럼, 언제나 거기 있는 오래된 골동품 가구처럼 편안한 존재다. 윌은 처키의 우정이 자신을 든든히 떠받치고 있는 기둥임을 아직 깨닫지 못한다. 하지만 처키는 늘 걱정하고 있다. 내 친구 윌이, ‘우리’와는 너무 다른 윌이, 자신의 재능을 평생 썩히지나 않을까, 평생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하고 자기만의 방에 갇혀 있을까 하고.
처키와 친구들을 만난 스카일라는 윌을 바라보는 시선이 더욱 따스해진다. 헤어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깊은 사랑에 빠진 여인만이 짓는 농염한 미소를 띠며 스카일라는 말한다. “윌, 나랑 캘리포니아에 함께 가자.” 윌은 놀란다. 그저 여행을 떠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녀가 캘리포니아에 있는 의대에 진학하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눈빛이 농담이 아니라는 사실도. 윌은 스카일라의 품에 안겨서 정신없이 행복해하다가 정색을 하고 묻는다. “그래도 되겠어?” “그럼.” 스카일라의 표정은 이미 결정이 끝난 듯 단호하다.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 “몰라. 그냥 알아.” 스카일라의 눈은 행복과 확신으로 가득하다. 자신의 직관을 믿는 사람, 자신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 사람의 단단한 미소.
윌은 두렵다. 증명할 수 없는, 확신할 수 없는 일에는 발을 들여서는 안 된다. 또다시 버림받을지도 모르니까. 또다시 혼자가 될지 모르니까. “이건 굉장히 심각한 결정이야. 캘리포니아에 함께 갔다가 내게서 네가 싫어하는 점이 있다는 걸 알면, 같이 가자고 했던 말 후회하게 될지도 몰라. 하지만 그때쯤엔 우리 관계도 깊어져서, 취소하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마지못해서 함께 살게 돼.” 윌은 마치 가상의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듯 그들의 미래를 최대한 부정적으로 예측한다. 스카일라는 용기를 내어 사랑 고백을 했다가 일언지하에 거절당한 것처럼, 이미 상처 입은 표정이다. 이제 액자의 프레임을 완전히 떼어내고 사진속의 인물, 그 사람의 날것의 삶에 부딪쳐야 한다. 그들은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 ‘연민의 마지노선’과 ‘사랑의 문턱’ 사이에 놓인 아슬아슬한 경계지대를 탈출할 수 있을까.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