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난, 널, 사랑하지 않아……
내 귀는 네 마음속에 있다.
그러니 어찌 네가 편할 것인가.
그리고 내게
네 마음밖에 그 무엇이 들리겠는가.
-황인숙, 『슬픔이 나를 깨운다』, 「응시」, 문학과지성사, 1994, 109쪽.
사랑하면, 굳이 청진기를 갖다 대지 않아도 그의 심장박동 소리가 들리고, 사랑하면, 굳이 녹음기를 틀지 않아도 그의 목소리를 재생할 수 있다. 스카일라의 귀도 윌의 마음 안에 있다. 늘 아무렇지 않은 듯 건들거리며 농담 따먹기를 일삼는 윌의 표정 뒤에 숨은 두려움을, 그녀는 듣는다. 윌도 편하지 않다. 그녀의 귀가 내 마음에 자리했으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든 그녀에게 낱낱이 들키게 되어 있다. 그토록 감추고 또 감췄건만, 그녀는 내 두려움을 듣기 시작했다. 이제는 함께, 그 두려움의 터널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그들은 처음으로 그 두려움의 실체를 마주한다.
스카일라: 뭐가 그렇게 두려워?
윌: 뭐가 두렵냐고?
스카일라: 두려워하지 않는 게 있기나 해? 아무도 도전하지 않는 안전한 세계에 살면서 자신이 변하게 될까 봐 아무것도 못하잖아!
윌: 내 세계가 어떤지 뭘 안다고 그래? 어차피 난 네게 출신 천한 장난감일 뿐일 텐데. 결국엔 부모님들이 좋아하는 부자 놈과 결혼해서 친구들에게 재미 삼아 내 얘길 하게 되겠지.
스카일라: 왜 그런 잔인한 말을? 돈에 왜 그리 집착해? 내가 13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유산을 상속받았어.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가능하다면 그 돈을 돌려주고 싶었어……. 당장이라도 말야. 아버지와 하루라도 더 함께 있을 수 있다면 말야. 두려워하는 건 너 자신이면서 괜히 내게 퍼붓지 마!
윌: 두려워 해? 대체 내가 뭘 두려워한단 거야?
스카일라: 날 두려워하잖아. 내가 사랑해주지 않을까 봐서! 하지만 나도 두려워! 하지만 노력은 해보고 싶어. 적어도 너에겐 정직하고 싶다고!
윌: 그럼 난 정직하지 못하단 거야?
스카일라: 형제가 열둘이란 거 정말이야? (당황한 윌은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숨길 수 없자 아직 그들이 나눈 사랑의 온기가 식지 않은 스카일라의 방을 나가버리려 한다) 어딜 가는 거야? 가지 마!
윌: 알고 싶은 게 뭐야? 형제가 없다는 거? 내가 빌어먹을 고아라는 거? 까놓고 얘기할까? 어렸을 때 양부가 담뱃불로 피부를 지졌어. 이건 뭔 줄 알아? 수술 자국이 아니라 놈이 칼로 찌른 상처야! 정말 이따위 것들을 알고 싶어?
스카일라: (그녀는 어느새 흐느끼고 있다) 돕고 싶어서 그래!
윌: 돕겠다고? 내가 언제 도와달라고 한 적 있어? 내가 불쌍해 보여?
스카일라: 널 사랑하니까 함께 있고 싶을 뿐이야!
윌: 헛소리 집어 치워!
스카일라: 널 사랑해…….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렇다고 말해줘. 그러면 다시는 전화도 안 하고 영원히 사라져줄게…….
윌: 난, 널, 사랑하지 않아!
윌의 마음에 잠긴 스카일라의 귀가 조금만 더 예민했다면, 그녀는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지금 윌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너를 사랑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이분법적 판단이 아니다. 윌 자신이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회복하지 않는 한, 그들의 사랑은 지속될 수 없다. 그의 마음속으로 들어간 그녀의 귀가 조금만 더 밝았다면, ‘널 사랑하지 않는다’는 결의에 찬 고백이 곧 처음 만나는 사랑 때문에 너무 고통스러워진 윌의 반어법이었음을 감지했을 것이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토록 괴로워할 이유도 없을 테니까. 사랑하지 않는다면, 온몸에 난 끔찍한 상처를 보여주기 싫어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해야 하는 자신의 내면을, 자신도 모르게 폭로해버릴 필요도 없을 테니까.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보며 ‘난 널 사랑하지 않아’라고 마치 자기 자신을 향해 저주를 내리듯 뇌까릴 필요가 없을 테니까. 그녀는 무방비상태에서 윌의 상처 속으로 돌진하다가 스스로 이마를 부딪쳐 치명상을 입고 만다.
스카일라와 숀과의 만남으로 서광이 비쳤던 윌의 삶에는 다시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다. 윌을 세상 밖으로 꺼낸 램보 교수는 윌에게 멋진 일자리를 주선해주지만 윌은 그 소중한 기회를 날려버린다. 맥닐 사의 면접 당일에 친구 처키를 대신 보낸 윌의 만행(!)을 알고 천하의 모범생 램보 교수는 분노한다. “네 시간엔 뭐를 하든 상관 않겠다. 하지만 내가 주선하는 자리에 나타나지 않으면 내 신용까지 영향받게 돼.” 윌은 또 다시 반항기 가득한 표정으로 건들거리며 말한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주선하지 마세요.” 램보는 당혹스럽다. 윌을 감옥에서 꺼내준 것도, 숀과 만나게 해준 것도, 모두 램보 자신인데, 램보를 바라보는 윌의 눈길은 경멸로 가득하다. 더 이상 윌의 눈빛을 참기 힘든 램보도 히스테리컬하게 반응한다. “조금은 감사해야 하는 거 아냐?”
윌은 감사는커녕 지겹다는 듯이 램보를 밀어붙인다. 윌이 누워서 떡 먹는 기분으로 쉽게 푼 문제를 램보가 풀지 못했다는 사실을 교활하게 이용한다. “감사요? 내게 이런 건 너무 쉬워서 장난 같다구요! 그걸 교수님이 못 풀다니 정말 안됐군요!” 윌은 자신이 푼 문제의 풀이과정을 적은 종이를 보란 듯이 태워버리고, 램보는 그동안 쌓아왔던 완벽한 젠틀맨의 이미지를 형편없이 구기며, 훨훨 타오르는 종이를 살려내느라 자신도 모르게 바닥에 슬라이딩을 한다. 램보는 타버린 종이를 붙들고, 더 없이 비애로 가득 찬 표정으로 고백한다. “네 말이 맞아. 난 이걸 증명할 수 없다. 하지만 넌 재능이 있어. 솔직히 말하면 그걸 눈치 챌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몇 안 된다. 널 차라리 못 만났더라면 할 때도 있어. 그럼 밤에 잠 못 이루지도, 세상엔 너 같은 인재들이 많을 거란 생각도, 안 했겠지. 재능을 헛되이 쓰는 걸 보지 않아도 되고 말야…….”
램보는 질투와 연민과 애정으로 난마처럼 얽혀 있던 자신의 마음을 그제야 고백하지만 윌은 여전히 냉혹한 시선으로 램보를 쏘아보다 떠나버린다. 이제 모두가 깨달았다. 사랑스럽지만 두려운, 윌에 대한 연민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아무리 윌에게 진심을 보여준다 해도 윌이 스스로 위악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않는 한, 진심 어린 사랑 또한 윌의 마음에 가 닿지 못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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