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시네필 다이어리, 굿 윌 헌팅과 수전 손택(Susan Sontag)[편집되는 고통, 유통되는 슬픔을 넘어] - 9. 나는 두렵다, 진짜 나 자신을, 만나게 될까 봐…… 본문

책/철학(哲學)

시네필 다이어리, 굿 윌 헌팅과 수전 손택(Susan Sontag)[편집되는 고통, 유통되는 슬픔을 넘어] - 9. 나는 두렵다, 진짜 나 자신을, 만나게 될까 봐……

건방진방랑자 2021. 7. 22. 09:40
728x90
반응형

9. 나는 두렵다, 진짜 나 자신을, 만나게 될까 봐……

 

 

연민은 고통 받고 있는 타자아직 멀쩡한 자신을 가르는 분계선이다. 연민은 고통 받는 타자를 바라볼 때 주체가 무의식적으로 선택하는, 매우 편안한 안전장치다. 연민은 정치적으로 수동적인 혹은 보수적인 자신의 현상태를 은폐하며 나는 여기에 있고, 너는 거기에 있다는 괴리감을 심화시킨다. 그리하여 우리는 함께할 수 없다는 판단을 공고화한다. 나의 행복이 너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최악의 가능성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심리, 거기서 연민이 탄생한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보는 것, 그래서 (……)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수전 손택, 이재원 역, 타인의 고통, 이후, 2004, 154.

 

 

램보도 스카일라도 윌에 대한 연민을 멈추지 않는 한 그와 진정으로 대화할 수 없다. 윌은 스카일라의 사랑을 연민으로 오해하고, 그녀의 사랑이 지금은 진실일지라도, 언젠가는 연민으로 변질될까 봐 두려워한다. 램보는 윌의 천재적 두뇌가 세상에 유익하게 쓰여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숀의 입장은 다르다. 숀은 스승이 제자에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할 수는 있지만 조작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안다. 지금 윌에게 필요한 것은 연민의 함정을 뛰어넘어 타인과 당당한 관계를 맺는 것이며, 지식을 어디에 쓸 것인가보다 어떻게 쓸까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을, 램보는 인정하지 않는다.

 

 

: 이봐, 내 말 잘 들어. 윌이 왜 현실을 회피하고 왜 아무도 못 믿을까? 그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버림받았기 때문이야.

램보: 젠장! 프로이드 타령 그만 해!

: 그 애가 어떤 앤 줄 아나? 사람들이 자길 떠나기 전에 먼저 떠나게 만들고 있어. 바로 방어 심리라구, 알아? 그 때문에 20년이나 외롭게 산 애야. 지금 자네가 그 앨 몰아치면 또 그 악순환이 반복돼.

 

 

램보는 빨리, 더 늦기 전에, 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인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숀은 아직 윌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알지 못하며, 스스로 길을 찾도록 기다려야 한다고 말한다. 램보는 윌이 인생에서 실패할까 봐 두려워하지만, 숀은 윌이 진정한 사랑을 찾지 못할까 봐 두려워한다. 이제 숀은 더 이상 에둘러가지 않고, 윌의 상처의 뿌리에 다다를 직선주로를 찾는다.

 

 

: 세상에 너 혼자 있는 것 같니?

: ?

: 영혼의 짝이 있어?

: 무슨 뜻이죠?

: 널 북돋아주는 사람 말야.

: (약점을 들켜 뜨끔한 듯, 그러나 별로 망설이지 않는 척) 처키요.

: 처키는 널 위해 목숨도 내놓을 가족 같은 애지. 그런데 영혼의 짝이란 네 마음을 열고 영감을 주는 존재야.

: (당황한 눈치지만 대수롭지 않은 듯) 그런 친군 많아요.

: 이름을 대봐.

: 셰익스피어, 니체, 프로스트, 칸트, 교황님, 로크 등!

: 모두 죽은 사람들이잖아.

: 제겐 아니에요.

: 하지만 대화를 할 수 없잖니. 서로 교감할 수가 없어.

: (시니컬한 표정으로) 뼈다귀만 남아 있겠죠.

: 내 말이 바로 그거야. 네가 먼저 다가서지 않으면 평생 그런 친구는 사귀지 못해. (……) 넌 무엇에 열정을 갖고 있지? 원하는 게 뭐야? 평생 벽돌공으로 산 사람들도 자식만큼은 너와 같은 기회를 얻길 바라고 있어.

: 제가 원한 건 아니에요.

: 그래, 타고났지. 그러니까 원치 않았다는 말로 빠져나갈 생각 마.

: 빠져나가다니요? 게다가 벽돌공이 어때서요? 딴 사람의 집을 짓는 일은 고귀한 거라고요.

: 알아, 우리 아버지도 벽돌공이었어. 날 교육시키려고 허리가 끊어져라 일하셨지.

: 바로 그거예요. 아주 고귀한 직업이라고요. 정비공은 또 어때요? 덕분에 사람들이 출근하잖아요.

: 그래. 모든 직업은 귀해. 40분씩 전철을 타고 가서 대학의 쓰레기통을 비우는 청소부 일도 그렇지. 아마 그래서 네가 청소부를 택했을 거다. 하지만 한 가지 물어보마. 청소부라면 어디서든 할 수 있었어. 근데 왜 하필 세계 최고의 MIT에서 일하기로 했지? (비밀을 들켜 당황한 윌, 그런 윌을 집요하게 바라보는 숀.) 왜 밤에 칠판 앞에서 어슬렁대며 세계에서 몇 명만이 풀 수 있는 문제를 푼 거야?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는, 아니 모른 척하는 윌. 그는 진정으로 원하는 것 앞에 설 때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 앞에 설 때마다, 딴청을 부리거나 위악의 제스쳐를 취한다. 그러나 아무리 숨기려 해도, 진정 원하는 것은 내 의지의 검열을 넘어 어떻게든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진짜 하고 싶은 게 뭐야?”라는 단순명쾌한 질문 앞에서 윌은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댄다.

 

그는 셰익스피어, 니체, 프로스트, 칸트, 교황님, 로크 등등 위대한 고인들과 멋들어진 가상 인터뷰를 나누지만 그의 곁에서 살아 숨 쉬는 여자 친구에게는 솔직한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한다. 죽은 멘토들에게는 밤마다 자신의 이루지 못한 꿈을 이야기하면서 살아 있는 스승 숀과 램보에게는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는 윌. 정말 원하는 게 뭐냐고 다시 한 번 묻는 숀에게, 윌은 목동이 되어 양이나 치고 싶다며 느물거린다. 언제나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피하다보니 진짜 나의 모습이 원래 어땠는지도 가물가물하다.

 

 

 

 

한편 스카일라는 캘리포니아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윌과 통화를 한다. 윌에게 그토록 박대를 당했건만 스카일라의 사랑은 오히려 깊어진 듯하다. 아직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윌과 함께 떠나고 싶어 한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윌에게 손을 내민다. 긴 말은 필요 없다. “, 사랑해…….”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널 사랑해, 혹은 네가 날 믿지 않아도 난 널 믿어,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스카일라의 속삭임은 그렇게 아프게 가슴을 할퀸다. 윌은 가슴이 터질 것 같지만 아직도 그녀에게로 완전히 스며들 용기가 없다. 스카일라는 떠나고 윌은 다시 혼자 남는다. 그러나 윌은 정말 혼자였을까?

 

 

 

 

 

처키: 교수님들과의 일은 어때? 다음 주면 스물한 살이 돼. 일자리 같은 거 마련해주신대?

: 그래, 앞으로 50년간 책상머리에 붙어 있으래.

처키: 그래도 돈은 많이 벌겠다.

: 실험실 생쥐 꼴이 되는 거지.

처키: 그래도 여기서 탈출할 순 있잖아.

: 왜 탈출해? 난 평생 여기서 살 작정이야. 너하고 이웃에 살면서. 애도 낳고 리틀 야구장에도 함께 가고 말이야.

처키: 넌 내 친구니까, 이런 말 한다고 오해하지 마. 20년 후에도 여기 살면서 노무자로 일하며 우리 집에 와서 비디오나 때리고 있으면 널 죽여버릴 거야. 장난 아냐. 정말 없애버릴 거야.

: 젠장, 무슨 소리야?

처키: 넌 우리한테 없는 재능을 가졌어.

: 젠장, 다들 왜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난리야? 난 이 일이 좋다고!

처키: 아냐, 이 빌어먹을 자식! 널 위해서 그러는 게 아냐. 날 위해서라고! 나이 50이 돼도 난 육체노동을 하고 있을 거야. 그건 아무래도 좋아. 하지만 넌 지금 당첨된 복권을 깔고 앉아 너무 겁이 많아 돈으로 못 바꾸는 꼴이라고. 병신 같은 짓이지. 네게 있는 재주를 가질 수 있다면 난 뭐든 할 거야. 여기 친구들도 마찬가지야. 네가 여기서 20년이나 곯는 건 우리에 대한 모욕이야. (……) 매일 아침 너희 집에 들러 널 깨우고 같이 외출해서 한껏 취하며 웃는 것도 좋아. 하지만 내 생애 최고의 날이 언젠지 알아? 내가 너희 집 골목에 들어서서 네 집 문을 두드려도 네가 없을 때야. 안녕이란 말도, 작별의 말도 없이. 네가 떠났을 때라고. 적어도 그 순간만은 행복할 거야.

 

 

이상하다. 두렵고 무섭다. 평생 나와 함께 술 마시고 마음껏 취하며 세상 뒷담화를 나누고 육두문자로 난무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몸싸움도 하고 음담패설을 하며 함께 늙어갈 것만 같던 배꼽 친구 처키. 내 친구 처키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전혀 몰랐다. 나보다 날 더 잘 아는 사람이, 너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는데. 예고도 인사도 없이 나와 헤어지는 것이 꿈이라니, 그게 너의 우정이라니. 나와는 평생 인연이 없었을 것 같은 구원, 혹은 희망이라는 단어가 늘 함께 망가지던친구 처키에게 있었던 것은 아닐까. 윌의 눈빛은 깊게 흔들린다. MIT 교수 램보와 최고의 정신과 의사 숀과 매력적인 하버드생 스카일라의 삼중협공에도 아직 완전히 무너지지 않던 윌의 마음의 문이, 드디어 활짝 열리기 시작하는 걸까.

 

 

 

 

 

인용

목차

전체

시네필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