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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시네필 다이어리, 본 아이덴티티와 미셸 푸코[‘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의심하라] - 2. 내가 나임을 증명할 수 있는 길이 없다! 본문

책/철학(哲學)

시네필 다이어리, 본 아이덴티티와 미셸 푸코[‘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의심하라] - 2. 내가 나임을 증명할 수 있는 길이 없다!

건방진방랑자 2021. 7. 23.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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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가 나임을 증명할 수 있는 길이 없다!

 

 

내가 누구냐고 묻지도 말고, 또 내가 변함없이 그대로 있기를 바라지도 말라. 우리의 서류가 제대로 갖추어졌는지, 그런 것들은 관료와 경찰들에게 맡겨두라.

-미셸 푸코

 

 

기억상실증으로 고생하는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영화들을 보면 우리는 이 사회 곳곳에서 도대체 넌 누구냐라고 묻는 곳이 저토록 많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우선 이름이다. 사람들은 낯선 타인을 만났을 때 일단 타인의 이름을 먼저 알아두어야 마음이 편해진다.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실질적인 정보가 아무 것도 없는데도, 그저 대충 임의로 지어서 불러도 그만인 이름을 알면 그에 대해 가장 중요한 것을 알았다는 듯 뿌듯함을 느낀다.

 

이름은 타인을 우리 두뇌 속의 지인 목록에 올리기 위한 첫 번째 구성 항목이다. ‘호명을 함으로써 타인을 분석하고 때로는 지배하고 싶은 욕구를 숨기지 않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국가. 국가가 증명하는 개인의 정체성을 기록한 여권없이는 우리는 국가의 바깥 그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다. 국가는 개개인의 이름과 생년월일, 태어난 장소 등의 기본적인정보를 통해 개인의 정보를 목록화하고 만약 그러한 정보가 국가의 정보망에 기재되지 않는다면 멀쩡히 살아 있는 한 사람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인간이 되어버린다. 주민등록만 말소시키면 개인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때 정체성을 기재한 엄중한 기록들은 역설적으로 개개인의 생생한 실체를 부정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하는 것이다. 지중해 한 가운데서 등에 총상을 입은 채 표류하고 있던 이 이름 없는 사내가 의식을 되찾은 순간. 그가 맞닥뜨린 것은 낯선 어부가 발견한 난데없는 스위스 은행의 계좌번호다. 표류하고 있던 사내를 구해준 이탈리아 어부는 그의 몸속에서 작은 기계장치를 꺼내고 그것을 벽에 비추자 스위스 은행의 계좌번호가 나타난 것이다. “000-7-17-12-0-14-26. 게마인샤프트 은행, 취리히. 보시오, 은행 계좌 번호요. 이게 왜 당신 엉덩이에 있었던 거요?” 그는 아무 것도 기억할 수 없고 단지 등에 입은 총상과 엉덩이 속에 들어 있었다는 이 계좌번호만이 그가 살아온 흔적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사내는 어부들의 일을 도와주며 시간이 날 때마다 기억을 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해보지만 아무 것도 기억할 수 없다. “읽는 것도 쓰는 것도, 덧셈 뺄셈도 할 수 있고 커피도 탈 수 있고요. 카드놀이도, 체스도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기억이 전혀 없어요, 젠장! 그게 문제라고요!” 그는 자신을 구해준 어부에게 고민을 토로하고, 어부는 곧 기억이 돌아올 것이라 위로하지만 사내의 상태는 절망적이다. “벌써 2주일째에요. 소용없어요. 뭘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기억이 영영 돌아오지 않으면? 내일이면 항구에 도착할 텐데, 난 아직 내 이름도 몰라요.” 항구에 도착할 시간이 다가오자 사내를 도와준 어부는 차비를 쥐어주며 말한다. “많은 돈은 아니지만, 스위스까지 갈 수는 있을 거야.”

 

 

 

 

그는 혈혈단신(孑孑單身),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스위스에 도착한다. 막상 스위스에 도착했지만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다. 그는 마땅히 머물 곳도 돈도 없어 공원 벤치에서 노숙하려다가 경찰을 만난다. 경찰이 신분증을 요구하자 그는 신분증을 잃어버렸다고, 잔뜩 풀 죽은 목소리로 쭈뼛쭈뼛 말한다. 그 순간 경찰이 몸을 수색하려 하자 사내는 자기도 모르게 엄청난 속도로 경찰 두 명을 때려눕히고 어느새 경찰의 을 빼앗아 쥐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그의 의식은 이러한 판단을 내리지 않았지만 그의 신체가 의식보다 먼저 반응하여 경찰들을 일거에 제압해버린 것이다. 도대체 내 몸 어디에서 이토록 전광석화(電光石火) 같은 액션이 흘러나오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자신이 사람 둘을 순식간에 쓰러뜨린 사실 자체에 놀라, 무엇보다도 자신이 자신도 모르게 경찰의 을 빼앗았다는 사실에 놀라, 불에 덴 듯 엉겁결에 총을 내버리고 줄행랑을 치는 사내’.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실제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의 무기는 이었다. 우리 몸에는 우리 자신이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방대한 정체성의 코드가 입력되어 있다. 아직 이름을 알 수 없는 이 사내의 정체성도, 그가 살아온 흔적도,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단서도 이다. 그는 단지 이름과 인적 사항만 모를 뿐 그의 몸은 그의 삶을 구성하는 결정적인 단서들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의식은 내가 누구인지모르지만 그의 몸은 충분히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증언하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진짜 중요한 정보는 내가 누구인가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가 아닐까. 언제든 자유롭게 편집되고 가공되고 재해석되는 기억보다 더 선명하게 우리의 삶을 증언하는 것은 우리의 행동이니까. 우리의 기억보다 우리를 더 정직하게 비추는 거울은 우리가 지금-여기서 창조하고 있는 바로 이 행동이니까.

 

 

고백해야 한다는 의무가 이제 …… 우리들 속에 너무나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어서,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우리를 구속하는 권력의 효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미셸 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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