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티풀 마인드와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내 안의 메피스토펠레스와 사랑에 빠지다
1. 내부의 서사가 외부의 서사를 압도하는 인간들
위대한 사람은 (……) 여느 사람보다 더 차갑고, 더 거칠고, 주저하는 일이 더 적고, 남들의 생각에 겁내지 않는다. 그는 존경과 체통을 따지는 미덕, 곧 ‘떼거리의 미덕’이라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결여하고 있다. 그는 앞장설 수 없으면 혼자 간다. (……) 그는 남들과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길든다는 것의 비속함을 안다. (……) 자신에게 말할 때가 아니면 가면을 쓴다. 그의 내면에는 칭찬할 수도 비난할 수도 없는 고독이 자리 잡고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 『권력에의 의지』 중에서
자기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무의식의 목소리를 듣느라 ‘바깥세상’의 아우성이 잘 들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외부의 사건보다 내면의 사건이 중요한 사람들, 오직 내면의 서사만으로 자서전 1,000페이지를 채우고도 모자라는 사람들, 지나치는 모든 것에서 무의식의 계시를 읽어내는 사람들. 칼 구스타프 융은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다.”라는 한 문장으로 자신의 파란만장한 삶을 압축했다. 인간은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운동, 그 예측불허의 가변성으로 정의된다는 것이다. 무의식에 있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외부로 나타나 사건이 되려 하고, 인간의 존재는 ‘의식의 통제’만이 아니라 ‘발현되지 않은 무의식’을 얼마나 의식의 장으로 이끌어내는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 이러한 견해는 칼 구스타프 융의 시대에는 매우 도발적이고도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이었다.
융은 자기 생에서 외적 사실에 대한 기억은 그리 중요하지 않으며 ‘무의식과의 충돌’이야말로 인생의 결정적인 체험이었다고 말한다. 외적인 상황들은 내적 체험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 인간의 삶은 ‘인물-사건-배경’으로 정리되는 외부적 사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융은 자신의 행적을 정리한 ‘연보’가 아니라 무의식의 체험, 내면의 사건들을 통해서만 자신의 삶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한편, 경제학의 패러다임을 바꾼 수학의 천재 존 내쉬는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혼자 놀기’를 좋아했다. 그는 자기만의 방에서 책과 씨름하거나 혼자만의 실험을 하면서 놀기를 좋아했고 이런 그를 부모는 끊임없이 사교적인 공간으로 끌어내기 위해 절치부심(切齒腐心)했다. 그러나 그는 영혼의 단짝 하나 없이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지적 성취를 과시하여 부모의 질책을 피해가는 법을 배웠다. 또래들이 그를 따돌릴 때마다 ‘무관심’이라는 견고한 내면의 갑옷을 입어 상처받지 않는 법을 터득했으며 ‘사랑받는 존재’가 될 수 없을 바에는 차라리 ‘강력한 존재’가 되어 남들의 공격을 피해가는 법을 익혔다. 항상 오빠와 티격태격하며 자랐던 여동생 마사는 존 내쉬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상한다.
오빠는 항상 남달랐어요. 부모님도 그걸 아셨죠. 총명하다는 것도 알았고요. 오빠는 뭐든 자기 식대로만 하려고 했어요. 어머니는 나더러 오빠를 위로해주라고 강요하다시피 했어요. 친구들과 놀 때도 같이 끼워주라고 하셨고요. 데이트까지 시켜주라고 하실 정도였어요. 그러실 만했죠. 하지만 나는 괴짜 오빠를 누구한테 소개해준다는 게 내키지가 않았어요.
-실비아 네이사, 신현용 외 역, 『뷰티풀 마인드』, 승산, 2002, 54쪽.
존 내쉬는 공중에 손을 뻗었다가 오므리기만 하면 손바닥에서 수학이 꿈틀거릴 것만 같다던 프린스턴 대학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공기조차도 ‘수학적’으로 꿈틀거렸던 프린스턴의 파인홀은 세계 수학의 메카였다. 지나치는 모든 곳에서 수학적 계시를 읽어냈던 존 내쉬처럼 젊은 시절 칼 융도 자신을 둘러싼 모든 상황을 ‘무의식이 의식에게 보내는 편지’로 해독했다. 칼 융에게 스스로의 신체는 우주가 보내는 무의식의 메시지를 수신하는 영혼의 안테나였다.
내면의 서사가 외부의 서사를 압도하는 인간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거의 항상 주위 사람들로부터 ‘오해받는 존재들’이라는 점이었다. 존 내쉬처럼 천재적이지만 친구가 없는 아이, 칼 융처럼 되도록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안간힘 쓰지만 언제나 눈에 띌 수밖에 없었던 아이들의 가장 큰 고민. 그것은 ‘늘 오해받으면서도 자아를 잃지 않는 것’이었고, 또래집단으로부터 항상 따돌림을 받으면서도 자신을 학대하지 않는 방법이었다. 이를 위해 그들은 더욱 맹렬하게 내면의 동굴로 칩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생님들은 대부분 나를 어리석고 교활한 아이로 여겼다. 학교에서 무슨 나쁜 일이라도 생기면 우선 나에게 혐의를 두었다. 어디선가 격렬한 싸움이 일어나면 내가 충동질을 했다고 추측했다. (……) 물론 나는 내적인 불확실성을 외적인 확실성으로 보상했다. (……) 나는 나 자신이 잘못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잘못이 없기를 바라는 사람임을 발견했다. 속으로는 언제나 나 자신이 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하나는 부모의 아들로서 학교에 다니고 다른 많은 아이보다 그렇게 썩 영리하거나 주의 깊지도 않으며 근면하거나 단정하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못한 아이였다. 이와 반대로 또 다른 하나는 다 자란 어른으로 정말 늙고 의심이 많아 사람을 믿지 않고 인간 세상에 동떨어진 인물이었다. 그 대신 그는 자연과는 친밀하게 지냈다. 대지, 태양, 달 기후, 살아 있는 피조물, 그중에서도 특히 밤과 꿈, 그리고 ‘하느님’이 내 마음속에 직접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과 가까웠다. (……) 그리하여 나는 또 다른 존재, 즉 제2의 인격의 방해받지 않는 평온과 고독을 추구했다.
-칼 구스타프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88~90쪽.
칼 구스타프 융은 아직 ‘무의식’이라는 개념 자체가 정립되지 않았던 1870년대에 태어나 누구보다도 의식적으로 인간의 무의식을 생생히 경험했다. 모두가 ‘의식’만이 주역인 삶을 추구할 때 그는 이미 홀로 ‘의식을 압도하는 무의식’이 주인공이 되는 삶을 추구했던 것이다.
2. 고독은 천재의 학교다?
지금 여기에서 칼 융과 존 내쉬의 때 아닌 접속을 시도하는 이유는 그들이 단지 세계를 뒤흔든 ‘천재’이기 때문만도, 풍부한 심리학적 요소들로 인생을 채우고 있기 때문만도 아니다. 물론 칼 구스타프 융의 이론으로 존 내쉬의 삶을 일방적으로 해석하기 위함도 아니다. 두 사람의 흥미로운 공통점은 바로 ‘무의식의 의식화’를 누구보다도 극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라는 점이다. 두 사람은 무의식의 카오스를 의식의 전면으로 불러내어 자신의 가능성을 극한까지 실험했고 그 결과는 양극단으로 나타났다. 존 내쉬는 무의식이 의식을 습격하는 강도가 해일이나 행성충돌의 충격에 육박하자, 의식의 활동 자체를 제대로 해낼 수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 그의 정신분열증은 무의식에 습격당한 의식의 처절한 실패처럼 보였다. 칼 구스타프 융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자기 무의식의 분열적 측면, 은밀한 광기를 차분하게 사유의 재료로 삼아 무의식이 뿜어내는 예측불허의 율동 자체를 필생의 과제로 삼았다. 자기 자신의 무의식을 연구 주제로 삼아 평생을 밀고 나갔던 칼 구스타프 융과 존 내쉬가 만났다면 얼마나 풍요로운 밤샘 토론이 벌어졌을까.
자신의 무의식을 속속들이 의식의 영토로 불러낸 사람이라는 것이 존 내쉬와 칼 융의 결정적인 공통점이 아닐까. 존 내쉬가 할리우드식 감동의 자기 극복 스토리로 연마되기에는 훨씬 용이한 대상이지만, 한 존재로서 자신의 무의식과 만나는 데 조금 더 성공적이었던 사람은 오히려 칼 융 쪽이 아닐까.
모든 수학자는 서로 다른 두 세계에 산다. 그들은 완벽한 플라톤적 형태를 갖춘 수정(水晶)의 세계에 산다. 얼음 궁전에. 동시에 그들은 모든 것이 덧없고, 애매하고, 영고성쇠하는 속세에 산다. 수학자들은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진퇴를 거듭한다. 그들은 수정 세계에 사는 어른이며 실세계에 사는 어린 아이이다.
-S. 캐펠, 쿠랑 수학 연구소, 1996
존 내쉬는 수학의 세계 속에서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재능과 열정을 보였다. 그러나 실생활 속에서는 ‘아이큐 12의 어린아이’라는 식의 혹평을 받으며 누구와도 지속적인 친밀함을 공유하지 못했으며 사랑도 우정도 동정심 비슷한 것조차도 느끼지 못하는 위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고독이 천재의 ‘학교’인 것은 맞다. 그러나 천재도 인간이며, 인간은 고독을 위무해줄 친구와 연인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천재도 비켜갈 수 없는 인간적 진실이다. 존 내쉬는 현실에서는 좀처럼 만들 수 없었던 진정한 인간관계를 어떤 방식으로 만들었을까. 존 내쉬의 삶은 영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단지 ‘천재-광기-노벨상’의 삼각 편대가 펼치는 화려한 휴먼 스토리만으로는 설명되기 어렵다.
이 영화는 그저 순순히 ‘따라 읽기’에는 존 내쉬의 너무 많은 ‘잉여들’을 삭제해버렸다. 흥미로운 것은 그 ‘삭제된 잉여’야말로 존 내쉬를 ‘바로 그 한 사람’이게 만드는 요소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이 글은 영화 『뷰티풀 마인드』가 삭제해버린 어느 한 천재 수학자의 내면에서 일어난 기이한 분열의 조짐들, 타인에게 이해받지 못했던 그의 각종 기행, 정신분열이라는 ‘장애물’을 뚫고 노벨상을 타냈다는 식의 할리우드적 감동의 휴먼 스토리에 미처 다 담지 못한 한 천재의 우울한 광기를 소중하게 다룰 것이다. 우리가 2주 동안 떠나볼 이번 여행은 한 천재의 머릿속, ‘수학적 논리’만으로는 설명되기 어려운 인간의 무한한 ‘모호성’을 향해 천천히 항해할 것이다.
존 내쉬의 삶이 ‘뷰티풀 마인드’라는 멋진 제목으로 형상화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정신 질환의 위험을 ‘극복’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좀처럼 엿보기 힘든 무의식의 소우주를 속속들이 ‘발견’했기 때문이 아닐까. 영화 『뷰티풀 마인드』는 방랑하던 오디세우스가 ‘결국엔 집에 돌아왔음’을 강조하기 위해 오디세우스의 방황이 지닌 다채로운 이미지와 상징을 삭제하거나 왜곡해버렸다. 집에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바다 한복판을 헤매고 있을 오디세우스의 또 다른 자아, 바다 위에 버리고 와야만 했던 오디세우스의 방황과 분열이야말로 오디세우스가 실현하지 못한 오디세이의 백미가 아닐까.
나는 나 자신을 일종의 악마 또는 돼지, 어떤 타락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 복음서에서 바리새인과 세리들에 관한 부분을 읽고는 그 타락한 자들이 선택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나는 다소 만족감을 느꼈다. (……) 나는 뭔가 나쁜 것, 뭔가 악하고 음울한 것에 빠져들었다. 그것은 동시에 어떤 영예와도 같았다. 나는 사실 무엇에 관해 말해야 할지 모르면서도 말하고 싶은 이상한 충동을 자주 느꼈다. (……)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그러한 체험의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자 나는 파문되었거나 선택되었다는 느낌, 저주받았거나 축복받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 오늘날에도 나는 외롭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들, 대부분 도통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들을 내가 알고 있고 그것을 암시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칼 구스타프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82~84쪽.
3. 내쉬의 독백: 강력한 우상이 필요할 뿐 친밀한 스승은 필요치 않다
내쉬는 달랐다. 그가 어떤 예감을 갖기만 하면, 어떠한 인습적인 비판도 그를 막지 못했다. 그에게는 배경 지식이 전혀 없었다. 그건 정말 섬뜩한 일이었다. 배경 지식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그것을 해낼 수 있었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다. 그런 정신력, 그런 맹목적인 정신력을 가진 사람을 나는 달리 본 적이 없다.
-존 내쉬의 지인, 모저의 회고
영화 『뷰티풀 마인드』에서 프린스턴 대학원에 입학한 갓 스무 살의 존 내쉬(러셀 크로우)는 수업도 듣지 않고 다른 학생들과 잘 어울리지도 않는다. 왜 수업을 듣지 않느냐는 동료의 질문에 존 내쉬는 이렇게 대답한다. “강의는 사고를 둔하게 만들고 학생들의 잠재적인 창의력을 파괴해.” 존 내쉬는 자신의 천재성에 육박하는 대화 상대를 좀처럼 찾지 못했다. 그가 동경하는 것은 당시 프린스턴을 전 세계 과학의 메카로 만드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아인슈타인이나 괴델 정도의 강력한 스승이었다. 그러나 이제 스무 살에 불과한 햇병아리 대학원생 내쉬에게 ‘아인슈타인과의 독대’ 같은 것은 불가능한 꿈이었다. 아인슈타인을 멀리서라도 바라보기 위해 존은 일부러 출근길에서 서성이며 그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기도 했다. 아인슈타인을 길에서 멈춰 세우고, 그가 깜짝 놀랄 만한 새로운 발견을 제시하며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스무 살 청년 존 내쉬의 바람은 위대한 우상과의 대화였지 평범한 사람들과의 수다가 아니었다.
존 내쉬는 이후에 경제학에 대한 거의 아무런 배경 지식도 없이 ‘내쉬 균형 이론’을 창조해낸 것처럼, 물리학에 대한 아무런 배경 지식도 없이 아인슈타인을 찾아가 자신의 견해를 이야기하는 엄청난 모험을 감행한다. 프린스턴에 입학한 지 고작 두어 주 지났을 무렵, 자신이 인정하는 몇 안 되는 대가 아인슈타인의 ‘비공인 천재인증서’를 발급받기 위해, 존 내쉬는 아인슈타인을 불쑥 찾아간다. 존은 중력과 마찰과 복사에 대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아인슈타인을 만나고 싶어 한다. 한 시간 동안이나 존 내쉬는 아인슈타인을 앉혀 놓고 칠판에 방정식을 써가며 자신의 아이디어를 설명했다. 그러나 결국 아인슈타인이 빙긋 웃으며 한 말은 이렇다. “젊은이, 물리학을 좀 더 공부해야겠어.”
존에게는 강력한 우상이 필요했지만 친밀한 스승은 필요하지 않았다. 존 내쉬는 선생님들과 친해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당시 내쉬를 알고 있던 수학자 캘러비는 이렇게 말한다. “내쉬는 지적 독립성을 지키고 싶어 했습니다. 지나치게 영향받는 것을 원치 않았지요. 다른 학생들과는 자유롭게 얘기를 나누었지만, 교수들과는 너무 가까워질까 봐 걱정했습니다. 압도당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겁났던 겁니다. 그는 지배당하길 원치 않았습니다. 지적으로 은혜를 입는다는 것조차 싫어했지요.” 존 내쉬는 행복한 인간이 되는 길을 포기하고 위대한 천재가 되는 길에만 매진함으로써 그 누구의 친구도, 그 누구의 제자도 될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4. 융의 독백: 신경증 덕에 배웠다
우리가 만날 또 한 명의 천재 칼 구스타프 융은 학교생활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우리는 저마다 학창시절 학교에 가기 싫거나 숙제나 시험으로부터 회피하기 위해 각종 ‘꾀병’을 생각해낸 적이 있다. 어린 시절의 칼 융은 학교를 너무나 혐오한 나머지 심각한 노이로제에 걸리게 되었다. 학교로 가야 할 때가 되면 난데없이 기절하거나 발작을 일으키곤 해서 학교를 반년 이상이나 쉬어야 할 정도였다. 그러나 학교에 가지 않는 시간이 소년 융에게는 행복한 고립의 자유를 선물해주었다. 방랑, 독서, 수집, 놀이 등으로 시간을 보내며 행복을 만끽했던 어린 소년 융. 어떤 의사는 융이 간질병에 걸렸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융은 의사의 진단에 코웃음을 치며 달콤한 몽상에 빠져 지내고 있었던 어느 날. 소년 융은 손님과 아버지의 대화를 엿듣게 된다.
손님이 아버지에게 아들의 안부를 묻자 아버지는 걱정스러운 말투로 대답하는 것이었다. 의사들도 이제 우리 아이의 발작 원인을 알지 못한다고. 우리 애가 만일 불치병에 걸렸다면 너무나 끔찍한 일이라고. 이제 얼마 안 되는 재산조차 다 써버렸는데, 만일 융이 자립해서 살아갈 수 없다면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다고. 어린 융은 큰 충격을 받는다. 그것은 자기만의 몽상에 만족하며 살아가려 했던 소년 융이 엄혹한 ‘현실’의 벽 앞에서 느낀 첫 번째 충격이었다. 어린 융은 생각했다. 아, 그래, 우리 집이 그렇게 가난했다니, 아버지께 폐를 끼칠 수는 없어, 그렇다면 공부를 해서 자립할 수밖에 없구나. 걸핏하면 졸도하거나 발작을 일으키던 소년 융은 이제 자신의 발작 증세와 맨몸으로 부딪히기 시작한다. 의사의 도움을 받지 않고 오직 자신의 ‘의지’만으로 발작과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 후 나는 진지한 아이가 되었다. (……) 라틴어 문법책을 가지고 와서 집중하여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 10분 뒤에 나는 기절 발작을 일으켰다. 나는 의자에서 떨어질 뻔 했으나 몇 분이 지나자 상태가 다시 좋아져 공부를 계속했다. “빌어먹을, 졸도 따위는 하지 않을 거야.” (……) 그렇게 10분이 지나서 두 번째 발작이 일어났다. 이것도 첫 번째 발작과 마찬가지로 지나갔다. “자, 이제 정말로 너는 공부해야만 해!” 나는 꾹 참아냈다. 한 시간 후에 세 번째 발작이 일어났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고 발작을 이겨냈다고 느낄 때까지 한 시간을 더 공부했다.
갑자기 나는 이전 몇 달의 상태보다 나아진 것을 느꼈다. 정말이지 발작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 몇 주 후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학교에서도 더 이상 발작은 일어나지 않았다. (……) 그 수치스러운 사건 전체를 조정해온 것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 나는 나 자신에게 분노했고 동시에 자신을 부끄럽게 여겼다. 왜냐하면 내가 나 자신에게 옳지 않은 일을 했으며 나 자신에게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다른 누구 탓도 아니다. 나 자신이 가증스러운 탈영병이었다!
-칼 구스타프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66-67쪽.
공부도 싫고 학교에 가기도 싫었던 소년 융은 ‘발작을 해봐, 졸도를 해봐, 그럼 공부 따윈 안 해도 되잖아!’라는 명령을 내린 미지의 목소리가 바로 자기 자신의 무의식에서 흘러나온 것임을 깨닫는다. 그는 스스로의 무의식이 바로 ‘가증스러운 탈영병’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무의식을 육체 밖으로 끌어내어 의식화하는 방법을 깨달았던 것이다. 물론 아직 정신질환의 각종 치료법이 발달되지 않았던 시기였기에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융은 아직 소년이었고, 아직 정신과 의사가 되기 훨씬 전이었으며, 소년 융은 그 고통스러운 신경증의 경험으로부터 소중한 무언가를 배웠다는 사실이다. 신경증은 소년 융의 부끄러운 비밀이자 숨기고 싶은 패배였다. 그러나 융은 신경증 덕분에 자신이 ‘겉으로 보이는 성실성’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한 성실성’을 배울 수 있었다고 회상한다.
융은 무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혼자 있고 싶은 열망, 고독이 선사하는 황홀감에 빠져들고 싶었다. 융 또한 존 내쉬처럼 마음을 나누는 지속적인 친구가 없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융은 자기 안의 또 다른 자기, 끊임없이 고독을 추구하도록 충동질하고, 인간이 아니라 자연과 대화하라고 부추기는, 세상 만물로부터 무언가 신비로운 우주의 메시지를 읽어내라고 충동질하는 ‘제2의 인격’을 자신의 친구로 삼았다. 이토록 결연한 고립, 이토록 달콤한 고독만이 세계와 주체의 투명한 만남을 가능케 했던 것일까. 그는 신경증과 발작을 스스로의 의지로 극복함으로써 학교에 다니면서도 내면의 탐구를 계속할 수 있는 타협점을 찾을 수 있었다. 융은 부모의 걱정을 무마시키고 자신의 미래를 망치지 않으면서도 자기의 무의식 속에 ‘비밀의 방’을 설계하고 시공하고 관리하는 법을 깨닫게 된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다. 또는 친구를 소개하려고 하는데, 이름을 말하려는 순간 갑자기 친구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때가 있다. 우리는 그럴 때 기억을 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그 생각은 무의식이 된 것이다. (……) 그러나 어떤 것이 우리의 의식에서 빠져나갔다고 해서, 그 존재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마치 모퉁이를 돌아 사라진 차가 증발해버린 것이 아니듯이. 이 차는 그냥 시야에서만 사라진 것이다. 우리가 나중에 그 차를 다시 볼 수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가 잊었던 생각과 순간적으로 다시 만날 수도 있다.
-칼 구스타프 융, 정영목 역, 『사람과 상징』, 까치, 1995, 33쪽.
5. 당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나만의 미션이 있다
나는 ‘침묵의 탑’에 버려져 썩어가는데, 프로메테우스를 공격한 독수리들이 나의 내장을 파먹는 듯하다.
-존 내쉬, 1967년.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할 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받곤 한다. 가족이나 연인, 친구로부터 오해받는다는 것은 극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남긴다. 그런 일이 오랫동안 매일 반복하여 일어난다면 아무리 건강한 영혼을 지닌 자라도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 천재의 경우 주변 사람들의 오해는 거의 상습적으로 일어날 때가 많다. 존 내쉬의 경우 사람들의 오해는 더욱 지속적이고 파괴적으로 진행되었다. 존 내쉬 스스로가 그 오해를 가속화한 측면도 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상습적으로 무시하곤 했으며 누군가 질문을 하면 인상을 찌푸리며 ‘너 정말 그것도 몰라?’라는 식으로 반응할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노년의 존 내쉬는 그토록 오만방자했던 젊은 시절을 후회하기도 했다. 자신의 천재성은 그런 오만함을 덮어줄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천재의 재능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그런 오만쯤은 슬쩍 눈감아주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교성이 뛰어났던 여동생 마사조차도 ‘오빠와 놀기’를 극도로 꺼려한 것을 보면 존을 ‘오해의 청정구역’에 격리시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주변 사람들의 일상적인 오해보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스스로 ‘자기만의 세계’를 만드는 과정에서 천재 스스로 세계의 작동 원리를 오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오해는 트라우마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잊을 수 없는 공포의 체험으로 각인되기도 한다. 존 내쉬에게 있어 이러한 원형적인 공포의 체험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정신분열 증세가 ‘냉전 시대의 사회적 희생물’이기도 했다는 점은 어린 시절 겪었던 전쟁의 공포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는 유년기부터 전쟁의 위험에 노출되었으며 청년 시절에도 징병을 피하기 위해 무던히 애쓴 흔적이 보인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하와이의 진주만 해군기지를 공격했을 때 조니(존 내쉬)는 고등학교 1학년생이었다. 며칠 후 조니와 마사는 아버지에게서 22구경 소총 사용법을 배웠다. (……) 잿빛 구름 아래 낮게 엎드린 마을을 가리키며 아버지는 여느 때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일본은 이곳 웨스트버지니아의 마을을 점령할 때까지 공격을 계속할 것이다. 이곳이 비록 외지고 산에 둘러싸여 있지만, 막강한 미국의 전력을 무력화하는 유일한 방법은 석탄 열차를 폭파하는 것뿐이기 때문이었다. (……) 정말이지 총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 열차를 폭파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을 테니까.
그들은 이 도시를 산산조각 내고, 남자들을 죄다 잡아가고, 양민을 학살할 것이다. 너희들 같은 학생도 죽일지 모른다. 너희가 이 총을 쏠 수 있다면, 잡으려고 달려드는 사람을 물리치고 멀리 달아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아군이 구해주러 올 때까지 숨어 있으면 된다. 후일 내쉬가 도처에서 외계 침략자의 비밀스러운 흔적을 발견하고 오직 자기만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을 때, 그는 불안에 떨고 진땀을 흘리며 몇 날 며칠이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12월 오후의 이날만큼은 소총을 만지작거리며 흥분했고 행복해했다.
-실비아 네이사, 신현용 ·이종인·승영조 역, 『뷰티풀 마인드』, 승산, 2002, 60~61쪽.
‘오직 나만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환상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존 내쉬가 겪게 될 ‘빅 브라더’ 윌리엄 파처(에드 해리스)의 환상은 냉전체제가 학습시킨 이데올로기 교육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어린 시절과 깊은 연관성을 보인다. 보통 사람들은 넘볼 수 없는 뭔가 중요하고 비밀스러운 일을 하고 있다는 환상, 그런 어려운 일은 나만 할 수 있다는 긍지는 존 내쉬의 성정에 어울리는 환상이었다. 우주전쟁이 일어났을 때 지구를 지켜내야 한다는 소년들의 환상처럼 부풀어 오르는 ‘냉전 시대의 영웅’을 향한 불타는 의지는 언제나 혼자였던 존 내쉬에게 ‘이 사회에 꼭 필요한, 아무나 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을 불러일으켰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최고의 인간이라는 신념을 유지하고 싶어 했던 존 내쉬의 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받지 못한 존 내쉬의 환경은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다. ‘당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나만의 미션, 나만의 세계가 있다’는 것은 그에게 주변 사람들의 끊임없는 오해를 잠재울 만한 초인적인 힘을 지니게 했을지도 모른다. 항상 최고의 인간에게 ‘인정받기’를 원했던 존 내쉬의 천성도 중요한 변수다. 영화 속에서 ‘빅 브라더’ 윌리엄 파처는 그의 천재적 재능이 이 사회에서 꼭 필요한 것이라는 신념을 ‘완성’시키는 인물이다. 그의 인정을 받아 소련의 암호 해독 프로젝트에 투입된다는 것은 존 내쉬에게 자신의 지식을 ‘이 사회를 지키는 데’ 사용할 수 있다는 긍지를 심어준 것이다.
6. 사람들은 언제나, 필연적으로 ‘나’를 오해한다
한편, 어린 시절 융 또한 자신이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운명이라는 것을 예감했던 사건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융이 특히 괴로워했던 사건은 자신이 오랜만에 공들여 쓴 작문이 너무 훌륭한 나머지 선생님이 도저히 자신이 쓴 것이라고 믿어주지 않았던 일이었다. “아주 잘 썼기 때문에 나는 융의 작문에 최고 점수를 주어야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작문은 거짓이다. 너는 이것을 어디서 베꼈느냐? 진실을 자백해라!” 융은 자신이 쓴 것이라고 항변하지만 선생님은 절대 믿어주지 않았다. “네가 이것을 어디서 베꼈는지 내가 알게 된다면 너는 학교에서 쫓겨날 거야!” 이 일로 인해 융은 깊은 상처를 받고 선생님에 대한 복수를 맹세하게 된다. 하지만 존 내쉬와는 달리 사람들의 눈에 띄기를 원치 않았던 융은 자기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모색하게 된다.
그는 이 일뿐 아니라 선생님과 친구들로부터 ‘이해하기 어려운 아이’라는 낙인이 찍히면서 오히려 타인을 이해하는 방식을 깨닫게 된다. 아, 선생도 너와 마찬가지로 의심 많은 사람이구나. 인간은 이해하지 못하는 사실에 부딪히면 분노하고 흥분하면서 ‘그건 사실이 아니야’라고 믿고 싶어 하는 존재구나. 그는 이때부터 제1의 인격(일상의 인격)과 제2의 인격(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없는 나만의 세계)을 분리하여 사물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제1의 인격이 ‘인간의 유한성과 세속’에 발 딛고 있다면 제2의 인격은 ‘우주의 무한성과 존재의 신비’에 발 딛고 있었다. 그는 ‘제1의 인격’만으로는 친구를 가지기 어려웠지만 ‘제2의 인격’을 위한 친구로서 ‘죽은 사상가’들을 초대했다. 책 속에 파묻혀 살았던 열여섯 살에서 열아홉 살 사이,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샘솟는 영감이 철학자들의 생각과 역사적인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기독교적 스콜라철학은 나의 흥미를 끌지 못했고, 성 토마스의 아리스토텔레스적 주지주의는 나에게 사막보다 더 생명력이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 나에게는 그들이 코끼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소문으로는 알고 있지만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 헤겔은 난해하고 거만한 문체로 나를 겁먹게 해서 나는 노골적인 불신감으로 그를 대했다. 그는 마치 언어구조 속에 갇혀 그 감옥에서 거드름을 피우는 몸짓으로 돌아다니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데 나의 탐구가 가져다준 큰 소득은 쇼펜하우어였다. 그는 눈에 보이도록 여실히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고통, 그리고 혼란과 고난과 악에 대해 처음으로 이야기한 사람이었다. (……) 비로소 세계가 어쩐지 가장 좋은 것만을 기초로 세워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철학자가 나왔다. 그는 가장 선하고 지혜로운 창조의 섭리나 피조물의 조화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인류 역사의 고통스러운 과정과 자연의 잔인성에는 일종의 결함, 즉 세계를 창조하려는 창조 의지의 맹목성이 그 밑바닥에 깔렸다고 솔직하게 토로했다.
-칼 구스타프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132~134쪽.
융은 자신의 고통에서 시작된 복수의 방향타를 돌려 어느새 타자의 고통을 이해하기 위한 포석으로 삼기 시작했다. 그는 병들어 죽어가는 물고기, 옴에 걸린 여우, 얼어 죽거나 굶어 죽은 새, 개미에 둘러싸여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지렁이, 서로를 갈기갈기 찢어놓는 곤충들처럼 인간 또한 그렇게 서로의 불완전함에 의지하고 영향 받으며 서로를 공격하는 것이 ‘자연스러움’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을 꺼리는 이유가 바로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일에 관해 조용히 발언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학교 과목에는 전혀 들어 있지 않았던 칸트나 쇼펜하우어, 고생물학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친구들에게는 엄청난 ‘잘난 척’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가 영혼의 친구를 찾으려 발버둥칠수록 그는 더욱더 오해받고 고립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평범해 보이려 애를 써도 어디서나 튈 수밖에 없었던 융은 자신의 고민을 ‘아예 말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는 서글픈 결론에 이른다. 그는 제1의 인격과 제2의 인격을 끊임없이 통합하려 하지만, 제1의 인격에서 좌절당한 자신이 어쩔 수 없이 제2의 인격으로 침잠해가는 것을 느끼며 고통스러워한다.
7. 내쉬의 아곤: 천재들은 ‘좋은 전쟁’ 속에서 태어난다
흔히 천재들은 외로운 거인으로 나타나지 않고, 특정 도시 특정 분야에서 무리지어 나타난다. 왜 그러한가에 대해 처음으로 이론을 제기한 사람은 로마 철학자 발레이우스이다. 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피타고라스, 아르키메데스, 아이스킬로스, 유리피데스, 소포클레스, 아리스토파네스 등을 염두에 두었지만, 뉴턴과 로크, 프로이트, 융, 아들러 등 후대에도 그런 사례는 많다. 창조적 천재들은 젊은이들에게 경쟁심과 질투심을 불러일으키고, 자극을 받은 잠재적 천재들은 앞선 천재들의 아이디어를 수정하고 완성하려 든다고 발레이우스는 추측했다.
-실비아 네이사, 『뷰티풀 마인드』, 승산, 2002, 170쪽.
영화 『뷰티풀 마인드』는 존 내쉬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좀 더 드라마틱하게 재구성하기 위해 추리적인 기법을 쓴다. 그의 가장 친한 친구 찰스(폴 베타니), 그에게 비밀 임무를 맡기는 강력한 감시자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 윌리엄 파처(에드 헤리스), 찰스의 귀여운 조카로 타인에게 애정을 품을 줄 모르는 내쉬가 유일하게 사랑을 쏟은 소녀 마시(비비안 카돈). 이 모두가 그의 정신분열 증상 속에서 만들어진 환상 속의 존재로 밝혀지는 극적 구성을 택한 것이다.
아내를 제외하고 존 내쉬의 일상을 지배하는 중요한 인물들은 모두 ‘환상’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충격적인 설정은 『뷰티풀 마인드』의 핵심적인 서사 전략이다. 게다가 환상 속의 인물들이 펼치는 연기가 어찌나 리얼한지, 이미 이 환상 속의 인물들에게 ‘정이 들어버린’ 관객들은 환상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도 절실한 그들의 목소리와 표정에 압도당하게 된다. 환상 속에서만 존재하기에 그들은 더욱 닿을 수 없는 애절한 욕망의 대상이 된다. 환상 속에서만 존재하기엔 그들은 너무 강력하고(파처), 더없이 다정하며(찰스), 지나치게 사랑스럽다(마시). 영화 속에서 존 내쉬가 가장 끊어내기 힘들었던 환상은 베스트 프렌드인 찰스의 환상이었다. 그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환각을 인정하고 난 이후에도 그에게 필요한 것은 냉철한 의사보다는 그리운 친구였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의 천재성을 질투하지 않고 그의 안부를 진심으로 걱정해 준 친구는 찰스뿐이었다.
영화 속에서 존 내쉬는 찰스를 제외하고는 거의 친구가 없는 것처럼 묘사되었지만 실제로 그의 아이디어 생산에 도움을 주었던 크고 작은 계기들을 만들어준 것은 그의 친구들이었다. 게일은 아무런 대가 없이 내쉬의 대리인 노릇을 하며 그의 이론이 훌륭하다고 거듭 칭찬해주었고, 내쉬가 거의 짝사랑에 가깝게 좋아했던 로이드 셰이플리는 애정에 굶주려 있던 내쉬의 모든 스토커 행동과 짓궂은 장난질까지 받아주었다. 존 내쉬는 따돌림이나 거절을 천재의 대가로 생각하면서도 언제나 외로운 자신의 영혼을 쓰다듬어줄 친구를 필요로 했다. 영화에서 묘사된 것처럼 그가 모두의 철저한 따돌림을 받은 오갈 데 없는 외톨이만은 아니었다. 그가 내밀던 애정의 안테나와 친구들이 송신하는 우정의 주파수가 맞지 않았던 것뿐이다.
친구라고 해서 꼭 생일축하 카드와 선물을 주고 어려운 시기에 도움을 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친구는 그렇게 반드시 ‘의식적으로’ 무언가를 주고받는 존재만은 아니며 단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더없는 영감을 선물하는 친구가 있다. 그가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불현듯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친구. 그리하여 그 어떤 우정의 부채 관계도 성립되지 않는, 어쩌면 수십 년이 지나 다시 만났을 때 서로를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는, 그런 친구. 한 번도 얼굴을 맞대지 않았으나 매일 만나는 친구보다 오히려 더 가깝게 느껴지는 멋진 펜팔이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중요한 것은 프린스턴이 내쉬에게는 더없이 훌륭한 ‘천재들의 요람’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아인슈타인이나 폰 노이만 같은 걸출한 스타 교수들이 활약하고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끊임없이 서로의 발전을 독려해주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올 때까지 서로를 경쟁의 극한에 몰아넣는 토론이야말로, 매일 벌어지던 천재들의 무시무시한 끝장 토론이야말로, 화약 냄새가 나지 않는 향기로운 전쟁이었다.
그리스 사회는 지나친 천재의 출현이 경쟁 자체를 방해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도편추방(ostracism)’이라고 하는 제도를 두었다. 그러나 우리는 도편추방을 사회의 조절 장치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도편추방은 자극의 수단이고 천재에 대한 보호의 수단이라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다. 이것은 일인의 지배를 혐오하며 그것이 지닌 위험을 경계하는 제도이지만, 천재를 죽이는 제도가 아니라 오히려 천재를 보호하고 더 자극하기 위해서 제2의 천재를 만들어내는 수단이다. 다시 말해 이 제도의 핵심은 천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천재를 여럿으로 만드는 것에 있다. (……) 그리스인들은 여러 진리가 공존하고 경쟁하기를 바랐다. 경쟁이 없는 진리는 의미도 없을 뿐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
-고병권, 『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 소명, 2001, 147~148쪽.
이 ‘포연 없는 전쟁’의 핵심은 바로 ‘유일한 진리의 소유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무시무시한 경쟁을 불러일으켜 다양한 진리들이 싸우도록 한 것이다. 적대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경쟁, 서로 더 나은 존재로 만들기 위한 경쟁, 보편적 진리가 아니라 여러 개의 진리가 아름답게 공존하도록 하기 위한 경쟁. 이것이 ‘아곤(agon)’이라고 부르는 그리스의 독특한 정치 문화였다. 그것은 서로를 내밀한 우상으로 섬기기에 절대적인 우상이 탄생할 수 없는 지적 환경이며, 어떤 우상도 탄생하자마자 파괴되므로 ‘우상의 중앙집권’이 불가능한 정치체제다.
내쉬의 프린스턴 재학시절 학과장이었던 솔로몬 레프셰츠는 수업도 학점도 다 쓸데없으며 오직 창조적 아이디어를 내는 것만이 학생의 임무임을 강조하는 ‘아곤의 지휘자’였다. 그가 요구하던 단 한 가지 요구사항은 바로 ‘차를 마시러 가는 것’이었다. 그의 요구에 따르면, 학생들은 매일 오후 반드시 차를 마시러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계 최고의 수학자들을 어디서 만나겠는가. 그리고 당신들만 좋다면 ‘향기나는 거실’에 언제든 들러도 좋다. 거긴 고등학문연구소라는 곳인데, 아인슈타인이나 괴델이나 폰 노이만을 먼발치서라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학생들에게 어떤 강압적 요구도 하지 않고 오직 ‘차를 마시러 가라’는 요구만을 했던 학과장의 아이디어는 존 내쉬 같은 고독한 천재에게 둘도 없는 교육 방식이었던 셈이다. 저 하늘의 별을 지상에 내려놓고 관찰하는 행운. 저 별이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을 매일매일 확인하는 행위만으로도 우리 안의 뮤즈는 고양되지 않을까.
존 내쉬보다 한 해 먼저 프린스턴에 들어온 유제니오 캘러비는 ‘독서의 해악’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내쉬와 자신은 독서장애였다고. 내쉬는 간접적인 지식을 너무 많이 배우게 되면 자기 안의 창조성이 질식할 거라는 생각 때문에 ‘수동적이고 게으른’ 독서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내쉬의 지식 생산방식은 주로 교수와 동료 학생들에게 끊임없이 난처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그는 두레방의 대화를 통해 ‘미해결 난제’가 무엇인지를 면밀히 기록해 두었고 내쉬의 최고의 아이디어들은 반쯤 배우다 만 것, 심지어는 잘못 배운 것에서 시작해서 그것들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재구성하려 애쓰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한다.
8. 융의 아곤: 천재들은 ‘좋은 전쟁’ 속에서 태어난다
한편, 칼 융에게 있어 ‘아곤의 공동체’는 무엇이었을까. 그에게 친구이자 스승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는 바로 프로이트였다. 프로이트와 아들러, 니체와 융. 이 네 명의 천재들은 서로에게 의식적, 무의식적 영향을 주고받았으며, 멀리서도 서로의 아이디어가 보내는 무언의 메시지를 해독하고 경쟁하며 독려하는 최고의 친구들이었다. 융은 ‘프로이트와 함께한다면 당신의 미래가 위태로울 것’이라는 일부 교수들의 경고장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것이 진리라면 나는 그와 함께 할 것입니다.” 융이 발표한 논문이 동료들의 조롱을 받았을 때, 프로이트만은 그 논문의 가치를 알아보고 융을 초대하여 그들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다. 그들은 오후 1시에 만나 장장 열세 시간 동안이나 쉬지 않고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융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친구를 서른두 살이 되어서야 만난 것이다. 융이 가장 동경하는 대상이면서 그가 가장 처절하게 극복해야 했던 존재, 그가 바로 프로이트였다.
프로이트는 내가 만난 사람 중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 당시의 내 경험으로는 그 어떤 사람도 프로이트에 견줄 수 없었다. 그의 태도에는 진부함이 전혀 없었다. 내가 보니 그는 무척 총명하고 예리하며 어느 면에서나 괄목할 만한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그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모호한, 알 수 없는 구석이 여전히 남아 있는 느낌이긴 했다.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279쪽.
프로이트와 결별하게 된 후 나의 모든 친구나 친지들은 나를 떠나갔다. 사람들은 나의 책을 쓰레기라고 대놓고 말했다. 나는 신비주의자로 간주되었고, 이것으로 사태는 끝장을 보게 되었다. (……) 그러나 나는 고독해질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소위 친구들의 반응에 대해서도 어떤 환상을 가지지 않았다. (……) 나는 여기에 모든 것이 걸려 있다는 것과 나의 확신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희생’ 장이 나 자신의 희생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310쪽.
융은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 1900년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처음 만났다. 그는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 당시에는 그 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어 저 멀리 제쳐두었다고. 스물다섯에 프로이트의 이론을 검증하기에는 자신의 경험이 턱없이 부족했다고. 그는 단지 머릿속으로 이해하는 책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검증할 수 있는 이론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1903년 그는 다시 한 번 『꿈의 해석』에 도전한다. 그제야 그 책이 자신의 생각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발견한다.
3년 동안 이미 그는 프로이트와 ‘논쟁을 벌일 수 있는’ 차원까지 비상하고 있었다. 그는 환자가 어떤 자극어에 대해서는 연상되는 단어를 전혀 떠올리지 못하거나 반응 시간이 무척 길어지는 것을 발견하고, 그러한 연상 장애는 자극어가 정신적 상처나 갈등을 건드릴 때마다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은 이런 상황에 적극적으로 적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억압의 원인’에 있어 20대의 융과 50대 후반의 프로이트 생각은 달랐다.
그는 억압의 원인을 성적 외상(Trauma)이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나로서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나의 치료 과정에서는 신경증의 많은 사례에서 성욕의 문제는 다만 부차적인 역할을 할 뿐이고 다른 요인들이 주요 원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사회적응, 비극적인 삶의 정황으로 인한 억압, 체면 차리기 등의 문제들이었다. 나중에 나는 그러한 사례들을 프로이트에게 제시했으나, 그는 성욕 외의 다른 요인들은 원인으로 여기려 하지 않았다. 그 점이 나로서는 자못 불만스러웠다.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276~7쪽.
‘성(性)’에 대한 시각 차이 이전에 프로이트와 융의 우정을 가로막는 또 하나의 장벽이 있었다. 융이 프로이트 이론에 한창 매력을 느낄 무렵 융은 대학에서 승진하기 위한 논문 완성을 앞두고 있었다. 당시 프로이트는 학자들의 세계에서 ‘달갑지 않은’ 인물이었기에 프로이트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학문적 명성을 얻는 데 확실히 불리한 일이었다. 학술회의에서 프로이트 이론은 ‘복도’에서만 낮은 목소리로 거론될 뿐 전체 회의에서는 한 번도 논의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융의 실험은 프로이트의 이론과 분명히 일치하고 있었다. 융은 자신에게 ‘악마의 속삭임’이 들리는 것 같았다고 고백한다. 내 실험 결과를 발표하면서 꼭 프로이트의 언급을 할 필요는 없잖아! ‘아무튼’ 나는 프로이트를 알기 훨씬 전부터 나만의 실험을 해왔는걸. 그런데 그 순간, 융은 ‘제2의 인격’의 목소리를 듣는다. 네가 그렇게 프로이트에게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것처럼 행세한다면, 그건 일종의 사기다! 인생이라는 건축물을 거짓 지반 위에 세울 수는 없다. 그때부터 융은 공공연히 프로이트 편에 서서 그를 위해 싸웠다.
그러나 진정한 갈등은 프로이트와 융 사이에서 일어났다. 프로이트와 융은 열띤 토론을 나누며 열정적으로 ‘아곤의 공동체’를 이루었지만, ‘성욕’이라는 문제 앞에만 서면 융은 프로이트의 허둥대는 모습을 발견했던 것이다. 성에 관해 말할 때 프로이트의 어조는 갑자기 빨라지고 초조해지며 평상시의 신중하고 비판적인 태도를 잃어버렸다. 융과 프로이트의 우정에 결정적으로 금이 가게 한 충격적인 발언은 프로이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고 한다.
지금도 나는 프로이트가 다음과 같이 말하던 것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친애하는 융, 성 이론을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나에게 약속하십시오. 그것은 가장 본질적인 것입니다. 보시오, 우리는 성 이론을 가지고 하나의 교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보루(堡壘) 같은 것 말입니다.” 그는 열정에 넘쳐서 말했는데, 그 말투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아,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겠다고 아버지에게 약속해다오!”라고 하는 것과 같았다.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81쪽.
융은 ‘보루’나 ‘교리’ 같은 단어에서 프로이트의 격렬한 불안을 읽어낸다. 교리란 ‘토론’을 거부하는 절대적인 진리를 원하는 사람들, 인간의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갖가지 의심을 단번에 짓밟아버리고 싶은 사람들이 내세우는 무기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격렬한 토론과 의심과 비판과 질문으로 우정을 쌓아올리고 있었던 두 사람의 ‘아곤(agon)’에 직격탄을 날리는 것이었다. ‘성 이론’이라는 하나의 절대적인 ‘우상’을 만들어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되고자 한 권력의 충동이었기 때문이다.
항상 비종교성을 강조해온 프로이트가 ‘교리’를 내세운다는 것은 융에게 있어 충격적인 일탈이었다. 프로이트가 잃어버린 ‘질투하는 신’ 대신에 ‘성적 리비도(libido)’가 또 하나의 ‘숨은 신’으로 대체된 느낌이었다. 그 후 프로이트는 자신의 후계자를 융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 걸출한 제자의 든든한 후원을 받아 위대한 아버지로 등극하고 싶은 욕망을 숨기지 못했다. 한편, 융은 자신이 그 위대한 후계자가 될 수 없음을 확인하면서 자신의 지적 독립성을 스스로 만들어내야 함을 깨닫게 된다. 융은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거역해야 한다는 고통과 싸우면서 아직 자신이 프로이트에 대항할 만한 이론적 근거를 갖지 못했음을 인정한다. 융은 친구이자 선배이자 아버지였던 프로이트와 갈등하고 그를 넘어섬으로써 조금씩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해나가기 시작한다.
프로이트와 요제프 브로이어는 신경증의 증상들 ― 히스테리, 통증의 어떤 유형들, 비정상적 행동 ― 이 사실상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런 증상들은 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무의식적인 정신이 자신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예를 들면, 참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한 어떤 환자는 침을 삼키려고 할 때마다 경련을 일으킬 수도 있다. 환자는 “그 상황을 삼킬 수 없는” 것이다. 비슷한 심리적 스트레스의 상태에서 두 번째 환자는 천식 발작을 일으킬 수도 있다. 그는 “공기를 편하게 숨 쉴 수 없는” 것이다. 세 번째 환자는 특이한 다리 마비를 경험할 수도 있다. 그는 걸을 수 없다, 즉 “그는 더 이상 갈 수 없는” 것이다. 네 번째 환자는 먹을 때 토한다. 어떤 불쾌한 사실을 “소화할 수 없는” 것이다.
-칼 융, 정영목 역, 『사람과 상징』, 까치, 1997, 23쪽.
우리가 친밀하고 소중했던 누군가와 헤어지는 대부분의 이유는 사실 여기서 비롯된다. 상대방의 어떤 결정적인 부분을 ‘삼킬 수가 없는 것’이다. 자신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어떤 부분을 상대방이 건드렸을 때, 우리는 그 사실이 거대한 가시처럼 목구멍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 상황에 맞닥뜨린다. 우리는 상대방과 나와의 ‘차이’를 삼키지 못하고, 그 차이를 천천히 소화시켜 관계의 새로운 차원으로까지 비약하지 못하고, 힘겹게 그 관계를 끝내버리고 만다. 프로이트는 융의 도발적인 문제 제기를 용납할 수 없었다. 아마 융과 프로이트가 이런 부분에서 서로를 ‘삼킬 수’ 있었다면, 인류는 정신분석의 또 다른 신세계가 열리는 역사의 진풍경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하면 ‘잘난 척’이라고 생각하는 친구들 때문에 아무와도 진정한 친구가 되기 어려웠던 융. 그는 아무런 임상 경력도 없는 상태에서 온 힘을 다해 환자들을 치료하고 그들과 이야기하면서 비로소 친구 아닌 친구들을 사귀게 된다. 융은 그들의 상처와 환각과 고통을 통해 자신이 이해하지 못했던 스스로의 무의식을 천천히 발굴하고 해석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자신의 환자들과 함께 20세기의 새로운 아곤을, 칼 구스타프 융이 주최하는 아름다운 ‘아테네 학당’을 만들 수 있게 된다.
젊은 시절 존 내쉬는 자신이 늘 친구들에게 배우고 있음을 의식적으로 자각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견디고 있는 외로움보다 훨씬 더 격심한 외로움을 느꼈다. 그러나 융은 자신이 늘 다른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는 존재임을 좀더 일찍 깨달았다. 그는 자신과 심각한 불화를 일으키는 모든 존재로부터 가르침을 얻었다. 그에게 프로이트 못지않게 소중한 스승은 바로 그의 ‘기이한’ 환자들이었다.
한번은 (……) 고용인들의 뺨을 때리는 습관이 있는 명문 귀족 부인이 나를 찾아왔다. 그녀는 강박신경증에 걸려 어느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물론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습관대로 수석 의사의 뺨을 갈겼다. 그녀의 눈에는 수석 의사도 단지 조금 나은 하인 정도로 보였다. (……) 의사가 좀 당황한 가운데 그녀를 나에게 보냈다. 그녀는 키가 약 180센티미터나 되는 아주 위풍당당한 인물로, 정말이지 누구를 때릴 만도 했다! 그녀가 드디어 나타났고 우리는 무척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고 나서 내가 그녀에게 좀 불쾌한 내용을 말해야만 하는 순간이 왔다. 그녀가 격분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나를 때리려고 위협했다. 나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이렇게 말했다.
“좋습니다. 당신은 귀부인입니다. 당신이 먼저 때리십시오. 레이디 퍼스트 아닙니까! 하지만 그 다음에는 내가 당신을 때릴 겁니다.” 나는 정말 그대로 할 참이었다. 그녀는 도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가 탄식하듯 말했다. “여태껏 나에게 그런 말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그 순간부터 치료는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그 환자에게 필요했던 것은 남성적인 반응이었다. (……) 그녀는 스스로를 도덕적으로 제약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강박신경증에 걸린 것이었다.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267~8쪽.
9. 모든 참고문헌을 찢어버린 인간의 고독
사회적 비교에 의해 우리는 다른 사람을 헐뜯고, 그들의 성공을 방해하며,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보다 창조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게 된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진정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가?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자기 방어를 위해 취한 행동은 대부분 원래 의도와는 반대로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준다. (……) 사회적 비교 기준을 낮춤으로써 자신을 방어하려는 행동은 앞으로 더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상호작용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앨렌 랭어, 이모영 역, 『예술가가 되려면』, 학지사, 2008, 244~5쪽.
존 내쉬의 MIT 재직 시절, 칠판에는 이런 낙서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오늘은 존 내쉬를 미워하는 날!” 존 내쉬는 학생들에게 일부러 어려운 문제를 출제하고 ‘나 몰라라’한다는 소문에 휩싸였고, ‘좋은 스승’으로서의 자격을 의심받았다. 그의 수업은 바람직한 교육이라기보다는 도박성 짙은 게임에 가까웠다고 한다. 내쉬는 스티븐슨과 아이젠하워의 대통령 선거전을 놓고 학생들과 ‘내기’를 했는데 결국 선거에서 누가 승리해도 자신이 이길 수밖에 없는 게임을 고안하여 학생들을 골탕먹이기도 했다. 그러나 다정하고 친절한 교사만이 좋은 스승은 아니었다. 괴짜 스승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학생들이 많아 수강생 수는 날로 줄어들었지만 내쉬의 존재 자체가 학생들에게 빛나는 영감을 선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MIT 신입생 시절 존에게 수학을 배웠던 하버드 대학교수 배리 마주르는 이렇게 회상한다. “그가 들려준 수학 이야기는 정말 놀라웠습니다. 그런 얘기를 듣고 있을 때면 시간이 영원히 멈춘 듯 느껴졌지요.”
해결되지 않은 고전적인 문제를 출제하는 것도 내쉬가 즐겨 사용한 수법이었다. 로버트 오만은 이렇게 회상했다. “학생들에게 π가 무리수임을 증명하라는 문제가 출제되었어요. 그건 결국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라는 것과 같았습니다. 나중에 학과장에서 질책을 당한 내쉬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어려운 문제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데, 아무래도 그게 문제인 것 같다. 어쩌면, 그 문제가 ‘어렵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지 않다면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비아 네이사, 『뷰티풀 마인드』, 승산, 2002, 255쪽.
‘풀 수 있는 것’과 ‘풀 수 없는 것’을 나누는 사고의 경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다면, 평범한 사람들도 미해결 난제에 도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교사로서의 자질’을 의심받을 때마다 존이 내세운 변명은 그런 논리였다. 그것은 누구보다도 내쉬 자신을 향한 메시지였다. 그는 ‘난제’가 발견될 때마다 도서관으로 달려가 참고문헌부터 뒤지는 보통 연구자들과는 달랐다. 그는 어떤 위대한 참고문헌보다 자신의 두뇌를 믿었다. 그는 모두가 포기했다는 소문이 파다한 난제와 만날 때마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몇 달이고 몇 년이고 그 문제에 매달리는 뚝심으로 유명했다. 그는 가족이나 친지들에게 ‘좋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언제나 ‘놀라운 사람’임에는 분명했다.
내쉬는 스스로의 업적을 유치하게 자랑하는 것을 좋아했고, 주변 사람들을 대놓고 깔보곤 했지만 그의 천재성을 알아본 사람들은 그의 괴팍한 성격을 눈감아주었다. 그의 동료 도널드 스펜서는 내쉬가 신변 잡담을 전혀 하지 않는 것, 어떤 순간에도 칭얼거리지 않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스스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내쉬는 어떤 불평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연구 테마는 누가 정해준 주제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남이 주제를 정해준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불가능합니다. 그는 더없이 독창적이었어요.”
내쉬가 문제를 발견하는 수단은 바로 ‘적들’을 통해서였다. 그에게는 자신의 천재성에 도전하는 모든 사람들이 적이었으므로 주로 ‘친밀한 적’은 그의 동료들이었다. 프린스턴에서 공부하고 MIT에서 재직하던 동안 만났던 수많은 천재 소년들, 랜드 코퍼레이션에서 일하는 동안 만났던 수많은 동료들은 각각 그들의 고향에서는 유일무이한 천재들이었다. 적의 존재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받았던 존 내쉬는 자신을 자극하는 동료를 만날 때마다 더욱 ‘업그레이드’되는 스타일이었다. 수없이 동료들과 불화하고 유치찬란한 말싸움과 도를 넘는 경쟁으로 말썽을 일으킨 내쉬. 그러나 바로 그 떠들썩한 경쟁과 쓸데없는 말다툼이야말로 존 내쉬의 ‘자가 학습 장치’였다.
“자네가 그토록 우수하다면, 다양체 매장 문제를 직접 풀어보지 그래?”라는 동료 앰브로스의 비난 섞인 야유와 농담은 내쉬의 승부 근성을 자극했다. 내쉬 못지않게 경쟁심이 강했던 동료 앰브로스와의 유치한 ‘내기’ 덕분에, 리만이 제기한 이래 풀리지 않고 있던 악명 높은 문제를, 누구도 20대의 풋내기 수학 강사가 풀 것이라는 예상치 못했던 문제를, 내쉬는 풀어버리기도 했다.
해답의 발견보다 문제의 발견이 중요한 순간들이 있다. 제도 교육은 학생들에게 ‘주어진 문제를 풀라’고 가르치지 ‘네가 중요하다고 믿는 문제를 내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역사의 물꼬를 비틀어 역사의 물길 자체를 바꾼 사람들의 공통점, 그것은 바로 ‘문제 자체를 창조하는 능력’이었다. 주어진 문제를 빠른 시간 안에 풀어내는 ‘영재들’은 수없이 많다. 하지만 일견 매우 단순해 보이는 문제를 가지고 사유의 극한까지 스스로를 몰아쳐가는 천재들의 공통점은 문제의 가치를 뒤바꿔버리거나(중요하지 않았던 문제를 중요하게 만들기), 아니면 문제 자체를 창조해낸다는 것이다. 또한 문제를 발견하는 능력은 한 개인의 인생을 쥐락펴락하는 결정적 사안이기도 하다. 자신의 인생을 온전히 바칠 화두를 발견하는 순간이야말로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10. 수학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한한 자유
존 내쉬에게 노벨상을 안겨주었던 논문은 그가 겨우 스물두 살 때 작성한 27페이지짜리 짧은 박사논문이었다. 처음에 내쉬 균형(nash equilibrium)의 아이디어는 너무 단순해서 학자들의 눈에 전혀 흥미로워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너무 협소한 테마라 광범위한 분야에 적용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이 이론의 가치는 너무 명백해서 내쉬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발견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내쉬 균형의 엄청난 영향을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늘날 전략적 게임과 관련된 내쉬 균형 개념은 사회과학뿐 아니라 생물학에서조차 기본적인 패러다임이 되었다. 『뉴 팔그레이브』는 내쉬 이론의 가치를 이렇게 묘사한다. “내쉬 균형은 점점 복잡해지고 있는 주제를 논하는 아주 강력하고 우아한 방법이다. 뉴턴의 천체 역학이 고대인들의 원시적이고 임시적인 방법들을 일거에 대체했던 것에 비견된다.”
내쉬 이론의 진정한 가치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것은 그가 30년 이상의 정신분열을 앓고 난 이후, 1990년대가 되어서였다. 내쉬의 노벨상 수상은 한 개인의 ‘인간승리’라기보다는 사회 전체의 ‘기다림’의 승리이기도 했다. 내쉬가 일했던 랜드 코퍼레이션의 경영 관리자였던 존 윌리엄스는 이 ‘기다림의 미학’을 알고 있던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수학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한한 자유’임을 알고 있었고 그 무한한 자유를 위해 필요한 24시간 건물 개방권과 칠판과 커피를 수학자들에게 ‘무한 리필’로 제공함으로써 ‘자유’를 ‘물질화’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윌리엄스는 당시 미국 최고의 수학자였던 폰 노이만에게 거액의 수임료를 제시하면서 이런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우리가 조직 차원에서 부탁드리고자 하는 것은, 귀하의 많은 생각 가운데 그저 면도를 하시며 흘려보내는 것들만 건네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 일을 하시다가 혹시 떠오른 아이디어가 있으시면 그것을 우리에게 넘겨주시면 됩니다.”
윌리엄스는 수학자들에게 시간의 자유를 주었고, 다음에는 커피와 칠판을 제공했다. 그런 것이 없으면, 아무런 가치 있는 것도 생산해내지 못할 거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 그는 한발 더 나아갔다. 그는 오전 여덟시에서 오후 다섯 시까지만이 아니라 24시간 랜드 건물을 개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수학자들에게 개인 사무실 건물을 개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수학자들에게 개인사무실을 제공했다. 복도에는 여러 곳에 커피대를 마련해 24시간 관리인을 붙여 놓았다. 왜 수학자들에게 그토록 자유를 주어야 하는지 의아해하는 엔지니어와 미 공군 장성을 이해시킨 것도 그였다.
-실비아 네이사, 『뷰티풀 마인드』, 204~205쪽.
인생 전체를 배팅할 만한 문제를 발견하는 천재 자신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그의 문제풀이를 채근하지 않고 어떤 압력도 가하지 않으며 다만 무조건 ‘기다리는’ 주변의 노력 또한 중요하다. 빨리빨리 연구 결과를 내놓으라고 재촉하는 분위기 속에서는 결코 ‘향기 나는 아이디어의 전쟁’이 탄생할 수 없다. 이 문제가 정말 중요한지 그렇지 않은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 문제가 어쩌면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연구결과가 ‘실용화’될 수 있다는 보장도 전혀 없다. 영원히 정답이 나오지 않을지라도, 혹시 도중에 그 문제를 풀던 사람이 죽더라도, 그 문제에 도전하는 일 자체가 소중한 일이라는 것. 그것을 깨달은 ‘친구들’이 있을 때 천재의 ‘면벽 수행’도 빛을 발할 수 있었다. 존 내쉬는 그런 희귀한 행운을 거머쥔 몇 안 되는 천재였다. 인류의 미래를 바꾼 획기적인 발명들은 대부분 ‘위대한 사람들의 비관적인 예측’을 벗어나는, 아이디어 제출시한도 마감시한도 없는 ‘기다림’의 역사로부터 시작되었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한다 하더라도 인간은 달에 가지 못할 것이다.
-리 디 포레스트 박사, 진공관 발명자(1957)
인간이 원자력을 이용하게 될 가능성은 없다.
-로버트 밀리컨,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1923)
컴퓨터는 전 세계를 통틀어 다섯 대 정도 팔릴 것이다.
-토머스 왓슨, IBM 설립자(1943)
개인이 가정에 컴퓨터를 놓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
-케네스 올센, 디지털 이큅먼트사 설립자 겸 회장(1977)
비행기는 재미있는 장난감이지만 군사적 가치는 전혀 없다.
-페르디낭 포쉬 장군, 프랑스 군사 전문가, 제 1차 세계대전 사령관(1911)
6개월 후 텔레비전은 시장에서 사라질 것이다. 사람들은 곧 매일 밤 합판으로 만든 상자를 들여다보는 것에 싫증날 것이다.
-대릴 F. 자눅, 20세기 폭스사 회장(1946)
11. 내과의사가 정신의학으로 발길을 돌리다
나는 몹시 흥분한 상태였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정신의학 외에는 다른 목표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전격적으로 계시처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 내과 교수에게 그 결정을 알렸을 때 그의 얼굴에서 실망과 놀라움의 기색을 읽을 수 있었다. 내 옛날의 상처, 즉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서 소외되는 느낌이 아프게 되살아났다. 그러나 이제는 그 이유를 한층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이런 동떨어진 세계에 흥미를 느끼리라고는 그 누구도, 아니 나 자신까지도 상상하지 못했다. 친구들은 놀라고 의아해하며 나를 바보로 여겼다. 내가 내과의사로서 출세할 기회가 바로 코앞에 있는데도 정신의학 같은 하찮은 것과 바꿔버리려고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기회는 누구나 당연히 잡으려고 하며 나에게도 무척 유혹적이었다.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2, 210~11쪽.
그 무렵 의학계에서 정신의학은 철저히 버려진 황무지였다. 병원 원장이 환자들과 함께 같은 건물에 ‘갇혀(?)’ 있어야만 했으며, 정신병원은 나환자 수용소처럼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격리되어 있었다. 의사들도 일반인들처럼 정신의학을 기피했다. 정신병에 드리워진 절망적이고 치명적인 그림자가 정신의학에도 드리워져 있었다.
융은 내과의사로서 탄탄대로가 보장되어 있던 상황에서 ‘암흑의 땅’이었던 정신의학으로 발길을 돌렸다. 스스로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이 결정이 갑자기 내려진 계기는, 한 정신의학 교과서 때문이었다고 한다. 저자는 당시 ‘정신의학의 주관성과 불확실성’이 정신질환 자체가 ‘인격의 질병’으로부터 유래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융은 ‘인격의 질병’이라는 언뜻 평범해 보이는 말에서 자신의 두 가지 거대한 관심이 맹렬하게 하나의 흐름으로 합쳐지는, 가눌 수 없는 희열을 느낀다.
그는 그동안 사방팔방 헤맸지만 찾지 못했던, ‘생물학적 사실과 정신적 사실에 관한 공동 경험의 장’이 형성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게 된다. 융은 정신의학이 ‘자연’과 ‘정신’의 충돌이 ‘실제 사건’이 되는 결정적인 분야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는 겉으로는 제1의 인격으로 ‘자연과학’을 연구하던 자신의 일상적 자아, 그리고 제1의 인격으로 완전히 통합되지 못한 인간의 무의식에 대한 격렬한 탐구열(제2의 인격)을 통합할 수 있는 학문적 장이 바로 정신의학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때까지 융은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인해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장학금을 받는 것조차 부끄러워할 정도로 자존심이 강했고, 가난한 부모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의사의 길을 선택했다. 융은 자신의 제2의 인격이 관심을 갖는 ‘무의식’의 영역이 매우 ‘비실용적’인 분야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며, 제1의 인격의 활동 영역, 즉 내과의사로서의 길에 만족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정신의학이 ‘인격의 질병’을 다룬다는,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이 문장에서 융이 ‘계시’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오랫동안 홀로 고민해왔던 문제가 아주 작은 계기에도 엄청난 폭발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인격’이라는 인문학적 시선과 ‘질병’이라는 자연과학의 시선이 융에게 있어서는 제2의 인격과 제1의 인격을 표상하는 대리물로 체험되었던 것이 아닐까. 즉 그는 자기 인격의 분열을 오랫동안 감지하고 있었고 그 분열의 원인을 무의식에서 찾았기 때문에 미세한 자극에도 곧바로 폭발해버릴, 욕망의 임계점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12. 정신분열을 대하는 내쉬와 융의 차이
융의 자서전을 휘감는 분위기는 바로 이것이다. ‘나는 내가 어떤 자아로 분열되는지를 알고 있다’는 것. 아마 융과 내쉬의 결정적인 차이도 이 부근에서 발원할 것이다. 내쉬의 분열이 무의식과 의식의 단절로 인해 심화된 것이라면 융의 분열은 자신의 분열을 ‘정상성’의 일부로 인정했다. 융은 무의식의 잠재성을 최대한 의식의 활동으로 끌어올리려 했으며, 의식의 시선으로 무의식의 활동을 최대한 가까이서 관찰하려 하는 태도가 정신의학의 시선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아까지도 나 자신의 일부라는 것을 일찍부터 받아들인 융의 경우는 오히려 자기 내부의 분열을 즐겼다. 그가 자신의 인생을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로 규정한 까닭도 무의식의 자기실현 과정을 ‘의식’의 프리즘으로 생생히 복원해내는 것을 필생의 과제로 삼은 까닭이었다. 내쉬가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와 ‘필요 없는 정보’로 두뇌 활동을 철저히 구별하면서 의식의 ‘체’에 걸러지지 않은 잔여물을 관찰할 기회를 스스로 박탈했다면, 융은 ‘체’를 치는 행위 자체가 의식의 활동임을, 우리는 매 순간 의식의 검열로 무의식의 활동을 철저히 감시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융은 의식의 ‘체’에서 떨어진 고운 밀가루뿐 아니라 체를 빠져나가지 못한, 즉 의식의 검열을 통과하지 못한 자신의 버려진 무의식을 ‘꿈’에서 찾으려 했다. 그리하여 그것이 ‘나만의 비정상성’이 아니라 ‘인류의 집단 무의식’일지도 모른다는 가정으로까지 스스로의 이론을 밀어붙였다.
내쉬에게 정신분열이 무의식으로부터 도피하려 했던 천재의 자기파멸적 결과였다면, 융은 자신의 분열조차 ‘정상성’의 징후로 판독하면서 그 분열의 힘을 오히려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긍정적 성과물로 이해하려 노력했다. 즉 융은 무의식의 ‘어두운 부분’까지도, 무의식에 ‘가장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까지도, 자신의 일부로 기꺼이 인정함으로써 무의식의 각종 공격으로부터 일종의 심리적 항체를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이런 생각은 환자들을 돌보면서 더욱 정교하게 이론화되었다. 그에게 환자들은 ‘정상인과 뭔가 다른 비정상인’이 아니라 정상인의 비정상성과 비정상인의 정상성을 역설적으로 확인케 해주는 ‘우리 안의 타자’였다.
정상인이 자신의 비정상성을 최대한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게 방어하는 것에 비해 ‘비정상인’으로 분류되는 정신질환자들은 오히려 비정상 가운데 내재한 정상성을 보여주는 거울이었던 것이다. 융은 환자들의 각종 증상을 인류의 ‘정상성’의 발현 결과로 보았기 때문에 환자들로부터 항상 ‘인류의 무의식’에 관한 지혜를 배울 수 있었다. 융은 인류의 역사와 신화 연구를 통해 정신 분열의 징후를 ‘집단적 신화’의 차원에서 해석하여 ‘통시적 보편성’을 발견해내려 했고, 현실 속에서는 임상 경험과 사례를 통해 ‘공시적 보편성’을 발견해 가고 있었다. 아니마, 아니무스, 원형 등 융의 핵심적인 개념도 이러한 종횡무진의 사례 분석에서 나온 열매였다.
융은 정신병에서 미지의 섬뜩한 무엇, 새롭고 특이한 무언가를 본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존재의 바탕을 발견했다. 융은 자기 자신을 질병의 ‘판단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질병을 판단하는 순간 그는 의사의 권위를 덧씌워 환자의 질병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융은 환자가 연출하고 있는 무의식의 연극 속에서 그 자신을 한 명의 배우로 참여시키고자 노력했다. 모두가 무의식 자체를 인정하려 하지 않거나 무의식의 ‘추악함’과 마주하지 않으려고 할 때, 융은 환자들의 총천연색 ‘망상’ 속에서 ‘아름다움’을 보았다. 융에게 무의식은 그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예술작품이었다.
어떤 환자는 제수이트에게 박해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또 다른 환자는 유대인이 자기를 독살하려 한다고 믿고 있으며, 제3의 환자는 경관이 자기를 뒤쫓고 있다고 하는데, 이런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무도 묻지 않았다. 사람들은 환상의 내용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이를테면 그냥 일반적으로 ‘피해망상’이라는 식으로 말해버렸다. (……) 프로이트가 1909년 취리히로 나를 방문했을 때 나는 바베트의 사례를 그에게 제시했다. 나중에 그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 “당신은 도대체 어떻게 이토록 추한 여성과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함께 지내는 일을 참아낼 수가 있었단 말이오?” 나는 좀 멍해져서 프로이트를 바라보았음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런 생각은 결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그런 아름다운 망상을 가지고 그토록 재미있는 일들을 이야기해주었으므로, 나는 그녀를 어떤 의미에서는 친구 같은 노파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녀의 괴기한 헛소리의 혼돈 속에서도 인간적인 모습이 나타났다.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2, 242~243쪽.
13. 무의식을 제압하려는 의식: 매카시즘과 호모포비아로 무너진 무한한 자유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들여다봤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볼 것이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을 넘어서』 중에서
정말 참다운 진실은 우리가 악의 상상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악의 상상이 우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칼 융, 『기억, 꿈, 사상』 중에서
어쩌면 해답은 존 내쉬가 ‘움켜쥔’ 것이 아니라 그가 ‘버린’ 것들에 있었다. 영화에서는 그가 정신분열증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지나치게 과감히 생략되어 있다. 2시간여의 러닝타임 안에 한 인간의 모든 것을 구겨 넣을 순 없겠지만, 이 ‘생략’에는 어떤 의도적 배제와 은폐의 냄새가 난다. 헐리우드식 감동의 영웅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서 삭제된 부분들은 존 내쉬의 인생을 뒤흔든 치명적인 대목들이다.
영화에서 생략된 존 내쉬의 결정적인 라이프 스토리는 그가 자신의 첫 번째 아들을 사생아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 동성애가 발각되어 랜드 코퍼레이션에서 추방되었다는 것(당시 미국 사회에서 동성애는 심각한 금기사항이었다), 아버지께 사생아의 존재를 숨기다 발각되어 ‘당장 그 여자와 결혼하라’는 아버지의 명령을 무시하고 지내다가 아버지의 임종마저 지키지 못했다는 것, 미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은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서 수많은 동료가 몰락하는 것을 지켜봤다는 것, 한국전쟁 당시 징병을 피하기 위해 갖은 술수를 동원했다는 것 등이다. 이 모든 일련의 사건들은 존 내쉬의 인생을 뒤흔든 중요한 사실들이었으며, 동시에 존 내쉬가 철저히 ‘외면한’ 삶의 진실들이었다.
젊은 시절 내쉬는 자신이 ‘천재’라는 점만으로 스스로의 모든 결점을 보상할 수 있다고 믿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기이한 행동과 무책임한 태도가 스스로의 천재성을 미학적으로 완성해준다고 믿었다. 천재에게는 지극히 유연한 ‘똘레랑스’를 발휘하던 미국대학의 상아탑 속에서 그의 믿음은 더욱 강화되었다. 특히 그의 천재성으로 인해 모든 괴상한 행동이 용납되던 랜드 코퍼레이션에서 해고된 사건은 그에게 지울 수 없는 충격을 안겨주었다. 랜드에서 내쉬는 미 공군 비밀취급 인가를 받았고 군사기밀을 쥐락펴락할 수 있다는 사실은 내쉬에게 엄청난 자부심의 근거가 되고 있었다.
어이없게도 당시 미국 사회에서는 동성애 혐의자(?)의 비밀취급 인가를 금지하고 있었다. ‘각종 범죄행위’와 ‘동성애’는 동급으로 취급되었고 동성애자를 색출(!)하기 위해 산타모니카 경찰서는 은밀히 함정 단속을 할 정도였다. ‘유인책 경찰’을 써서 공중 화장실로 들어가는 남자를 쫓아가 유혹한 후 그 남자가 응낙하면 두 번째 경찰이 들이닥쳐 그를 체포하는 식이었다. 내쉬는 바로 그 산타모니카 경찰들에게 동성애성향을 발각당한다. 그는 ‘공개적 외설죄’로 기소되었다. 내쉬에게 그 ‘발각’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해고’였다. 그는 인생 전체를 통틀어 그 누구에게도 ‘배제’되거나 ‘외면’당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남성들과의 친밀한 유대를 중시했고 우정과 사랑의 경계를 구분할 수 없는 모호한 상태를 즐긴 적도 많았다. 그러한 개인적 취향 때문에 자신의 일자리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그의 ‘작고 완전하고 그리하여 안전하던 세계’가 파열되는 첫 번째 징후였다. 그는 부모님께 이 사실을 숨겼고 매카시즘의 광풍에 희생당한 MIT 동료의 핑계를 대며 모두가 그 친구 탓이며 자신은 아무런 죄가 없다고 둘러댔다. 내쉬의 체포 소식은 프린스턴과 MIT를 비롯해 수학계 전체의 이슈가 되었고, 동성애에 대한 정부의 가혹한 처사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없었다. 매카시즘의 열풍으로 이미 수많은 사람이 희생당한 직후이기에 ‘호모 공포증’ 또한 널리 퍼져 있었다. ‘정상적인’ 사회의 협박에 불응하는 순간 곧바로 사회적 삶이 끝장난다는 사실을 잔인하게 가르쳐준 것이 바로 매카시즘이었던 것이다. 이 체포와 해고의 충격은 시간이 가면서 점점 치명적인 ‘증상’으로 나타나 내쉬의 인생에 심각한 균열을 일으키게 된다. 체포와 해고라는 인생 초유의 사건은 내쉬가 발병하기 4년 전에 일어났다.
내쉬가 겉보기에는 상처받지 않은 것 같지만, 체포 건은 인생의 한 전환점이 되었다. 내쉬는 흔히 초연하고, 야심만만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주 무관심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외톨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 관용적인 상아탑 속에서 살면서, 그는 원하는 대로 뭐든 할 수 있다고 믿도록 길들어져 왔다. 그러나 이제 그는 아주 가혹한 방식으로 한 가지 교훈을 얻게 되었다. 그가 추구한 정서적 유대 관계는 그가 소중하게 여긴 다른 모든 것을 파괴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 그의 자유, 그의 경력, 그의 명성, 사회적 성공 등 모든 것을. (……) 단 한 차례의 트라우마보다, 유년과 청소년 시절을 거치며 누적된 사건들이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속담처럼 커다란 긴장을 낳는다. (……) 내쉬가 유년과 청소년 시절에 당했던 괴롭힘과 놀림이 그러했듯, 그 체포의 상처도 시간이 가면서 점점 뚜렷하게 드러났다.
-실비아 네이사, 『뷰티풀 마인드』, 승산, 2002, 341쪽.
그의 천재성은 그의 모든 인간적 결점을 은폐하고 사회의 질책으로부터 그의 존재를 보호해주는 심리적 쿠션이었다. 그러나 그가 추구했던 남성들과의 ‘특별한 친밀감’은 그가 지금까지 일구어온 모든 업적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매카시즘과 호모포비아가 결합한 미국 사회의 폐쇄성은 ‘천재를 향한 무한한 관용’조차 무너뜨리는 치명적인 배제의 논리를 구성했다.
14. 무의식을 제압하려는 의식: 참담한 실패로 심각한 인지적 불협화음을 겪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가 오랫동안 숨겨오던 내연 관계가 가족들에게 들통나고 그의 연인 엘리너가 낳은 아들 존 데이빗 스티어의 존재가 부모님에게 발각된다. 스캔들을 병적으로 싫어했던 존 내쉬의 아버지는 엘리너와의 결혼을 명령했고 내쉬는 그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그에겐 이미 또 다른 연인 앨리샤가 생겼고 은밀하게 만나는 ‘남자 친구’ 브리커도 있었다. 두 여자와 한 남자 사이를 오가던 내쉬는, 아들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아들의 양육비는 지급할 수 없다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엘리너는 양육비만이라도 지급할 것을 요구했지만, 내쉬는 결혼은 못하겠으니 자기 아들을 ‘입양하자’는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여 엘리너를 기함시켰다. 급기야 엘리너가 앨리샤와 함께 있는 내쉬의 모습을 발견하여 ‘엘리너 vs 엘리샤’의 대격돌이 벌어지자 내쉬는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완벽한 내 작은 세계가 파괴됐어. 완벽한 내 작은 세계가 파괴됐어.”
그 와중에 내쉬의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전화가 없는 내쉬는 그 소식을 뒤늦게야 접하고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 드리지 못한다. 아들이 아버지가 될 준비가 되었을 때 떠나는 아버지는 없다. 모든 아버지들은 그렇게 불현듯 아들을 떠난다. 남겨진 아들에게 가족들을 떠맡긴 채, 아들에게 제2의 아버지가 될 것을 말없이 요구하며. 그의 작고 안전한 세계가 파열되는 순간 ‘아버지’라는 존재의 토대마저 사라지자 그는 급격한 공포와 불안을 경험한다. 영화는 존 내쉬의 인생을 미화하기 위해 그의 고뇌와 분열의 계기를 첨삭하거나 윤색했다. 그러나 영화가 삭제해버린 내쉬의 각종 실패와 실수야말로 내쉬의 분열증을 격화시킨 것이었고 내쉬의 내쉬다움을 만들어간 것이었으며 ‘작고 완벽한 나만의 세계’가 감당할 수 없는 ‘파도와 해일이 몰아치는 진짜 세상’을 깨닫게 한 사건들이었다.
게다가 랜드에서 해고된 이후 격추된 그의 사회적 위상은 그에게 심각한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원했던, 이미 따 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던 ‘필즈 상(수학계의 노벨상)’을 받지 못하자 그의 좌절감은 더욱 깊어진다. 그는 너무 빨리 성공했기에 가장 시간에 쫓기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그토록 원했던 모든 것을 이루지 못했다. 하버드나 프린스턴의 교수직도 얻지 못했고 MIT에서도 평판이 안 좋았기 때문에 종신 교수직을 얻지 못했으며 주식투자에서까지 참담한 실패를 맛본다. 서른 살이 되면서 내쉬는 심각한 인지적 불협화음을 겪게 된다. 당시 그의 행동들은 마치 ‘내가 하나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없는 이 세계는 거짓 세계다. 나는 당신들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위대한 미션을 떠맡은 신의 사도다’라고 외치는 것만 같았다.
그는 『뉴욕타임즈』 1면 왼쪽 상단의 기사를 가리키며, 말하기 시작했다. 외계에서 온 불가사의한 권력자들이 『뉴욕타임즈』를 통해 자기와 교신을 하고 있다. 그 메시지는 오로지 자기만 보라는 것이기 때문에 암호화되어 있으며, 다른 사람들은 그 메시지를 해독할 수 없다. 오직 자기만이 이 세계의 비밀을 공유하도록 허락되었다. (……) 내쉬는 MIT 캠퍼스에서 빨간 넥타이를 맨 남자들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 남자들은 자기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 빨간 넥타이를 맨 남자들은 모두 일정한 패턴을 지녔으며, 또한 비밀 공산당과도 관련이 있다.
(……) 수학과 우편함에는 이상한 편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 그것은 각국 대사들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발신인은 존 내쉬였다. (……) 편지 가운데 주소가 적히지 않은 것도 있었고, 대부분 우표가 붙어 있지 않았다. (……) 내쉬가 세계 정부를 구성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세계정부 구성위원회는 내쉬를 비롯해 수학과의 동료들과 여러 학생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 앨버트는 내쉬에게서 아주 이상한 편지를 받았다. 시카고 대학의 교수직 제의를 거부한다며, 친절한 제의는 고맙지만, 곧 남극의 황제로 부임할 예정이기 때문에 사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실비아 네이사, 『뷰티풀 마인드』, 승산, 2002, 448~453쪽.
15. 의식의 보호관찰을 거부하는 무의식: 조금씩 친밀해져야 할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돌보다
어느 랍비에 관한 오래된 훌륭한 이야기가 있다. 그의 제자가 와서 이렇게 물었다. “옛날에는 하느님을 대면하여 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왜 그렇지 못합니까?” 랍비가 대답했다. “오늘날에는 그럴 정도로 허리를 깊이 굽힐 줄 아는 사람이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623쪽.
비밀로 인해 전전긍긍(戰戰兢兢)하느라 황폐해지는 영혼이 있다면, 비밀로 인해 더욱 풍요로워지는 영혼이 있다. 내쉬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무의식으로부터 끊임없이 도피했다면, 융은 무의식조차 자신의 ‘응원군’으로 삼았다. 무의식의 선연한 존재를 좀 더 일찍 ‘의식’의 수면 위로 끌어올렸던 융은 무의식의 폭발적인 잠재력을 예감했다. 그는 부모에게도 친구에게도 스승에게도 좀처럼 이해받지 못한 어린 시절부터 이미 무의식의 ‘또 다른 자아’를 양육하기 시작했다. 일곱 살에서 아홉 살 사이에 이미 ‘나 자신과의 불화’와 ‘거대한 세계 속에서의 불확실성’을 느꼈다고 하니, 이 아이는 조숙하다 못해 조로했던 셈이다.
초등학교 시절 융은 프록코트와 높은 모자에 광택 나는 검정 구두를 신은 길이 6센티미터 정도의 남자 인형을 만들었다. 인형을 잉크로 까맣게 칠하고 필통을 ‘인형의 집’으로 삼았으며 인형 침대까지 만들었다. 인형 옆에는 라인강에서 주워온 매끄러운 검은 돌을 놓아두었다. 소년 융은 앙큼하게도 자기만의 비밀스러운 세계를 준비했는데, 말하자면 ‘제1의 인격’이 위로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제2의 인격’이 남몰래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따로 만든 셈이었다. 그 인형이 ‘출입 금지’되어 있는 다락방,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져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는 고독하고 침울해질 때마다 그 인형과 매끄러운 돌을 생각했다.
‘현실 속의 나’는 상처받고 아파해도 그의 분신이었던 까만 인형은 든든하게 늘 그 자리에 있어준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그에게 인형과 만나는 일, 인형이 잘 있을 거라고 상상하는 일, 인형의 집을 관리하는 일은 아직은 잘 알지 못하는 무의식의 자아를 돌보고 가꾸는 ‘혼자만의 제의적 행위’였다. 엄격한 목사였던 융의 아버지가 만약 이 일을 알았다면 노발대발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 아이의 인형 놀이는 다분히 밀교적이며 신비주의적인 분위기로 가득 차 있으니 말이다.
나는 어떤 사람도 그 필통을 거기서 발견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아무도 나의 비밀을 발견하여 망가뜨릴 수 없었다. 나는 안정감을 갖게 되었고 나 자신과의 불화로 인한 괴로운 감정은 사라졌다. (……) 나는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 때만, 보통 일주일 간격으로 종종 몰래 꼭대기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 나는 미리 어떤 글을 써놓은 작은 종이 두루마리를 필통 속에 넣었다. 그 글은 내가 고안해낸 비밀 문자로 학교 수업시간에 적어둔 것이었다. 그것은 작은 종잇조각이었는데, 빽빽하게 글을 써서는 돌돌 말아서 그 남자 인형이 보관하고 있도록 그에게 전달되었다. 새로운 종이 두루마리 하나를 보탠다는 것은 항상 엄숙한 의식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고 기억된다.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49쪽.
소년 융은 ‘비밀 문자’까지 만들어 자신의 소중한 메시지를 인형이 보관할 수 있도록 하는 의식을 치르며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까만 인형은 그에게 있어 ‘무의식의 도서관’을 관리하는 사서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알지 못하며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그 무언가를 소유했다는 데서 오는 자신감과 충만함으로 소년 융은 행복했다. 융의 자신감의 원천이 바로 그 비밀 도서관, 즉 무의식의 각종 정보들로 가득 찬 데이터베이스에서 비롯된 셈이다. 까만 인형은 무의식의 비밀을 물질적으로 형상화하려는 최초의 시도였던 셈이다.
융에게 무의식은 기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조금씩 친밀해져야 할 내 안의 또 다른 나였다. 그 까만 인형은 자기 내부의 분열된 자아를 물질화하고 그리하여 그것을 의식의 장에서 시각화하는 행위였다. 융은 해결되지 않은 무의식, 재활용조차 불가능해 보이는 버려진 무의식에 불현듯 역습을 당한 내쉬와 달리,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보이지 않는 칸막이를 천천히 닦아내어 조금씩 투명해진 칸막이 너머로 보이는 무의식의 무늬를 관찰했다.
16. 의식의 보호관찰을 거부하는 무의식: 고독의 창조성
게다가 존 내쉬가 초기에 입원했던 미국의 정신병원은 환자를 ‘정상인’과 ‘비정상인’으로 구분하여 ‘정상적인 자아’를 되찾게 하는 모범적인 진료방식을 추구했으므로 무의식에서 긍정적 잠재력을 읽어내려는 탐험 따위는 가능하지 않았다. 융은 무의식의 요소들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으려 했다. 말하자면 융은 좀 더 고상한 무의식, 좀 더 천박한 무의식, 좀 더 추악한 무의식, 좀 더 아리따운 무의식 사이의 차별이 아니라, 무의식의 총천연색 별들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성좌’를 해독해내는 데 관심이 있었다.
융은 그리하여 카오스로 가득한, 때로는 부끄럽고 경박하며 대면하기도 싫은 무의식마저 자신의 존재를 응원해주는 ‘원군’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존 내쉬에게 무의식의 역습이 그가 억압했던 존재들의 때늦은 복수처럼 공포로 다가왔다면, 융의 무의식은 의식의 보살핌과 비호 아래 매번 더 활성화되는 존재의 무한한 잠재성이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글이 ‘무의식이 구술하는 메시지를 의식이 그저 조용히 받아 적은 결과물’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싸워야 할 대상은 자신의 무의식이 아니라, 누구도 들으려하지 않고 궁금해하지도 않는 것을 혼자 끊임없이 말해야 한다는 고독이었다. 스스로에게는 너무나 가치 있는 메시지가 타인에게는 황당무계한 것으로 여겨질 때, 그 고독은 말할 수 없이 무겁게 느껴진다. 하지만 융은 ‘고독의 창조성’을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었다.
나의 고독은 어릴 적 꿈의 체험과 함께 시작되었고, 내가 무의식에 대한 연구를 할 시기에 최고조에 달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알게 되면 그는 고독해진다. 하지만 고독은 반드시 공동체에 대립하는 것만은 아니다. 고독한 사람보다 공동체에 대해 더 호감을 느끼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모든 개체가 자신의 개성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과 동일시되지 않는 곳에서만 만개하게 된다.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624~625쪽.
나의 모든 저술은 말하자면 내부로부터 부과된 과제인 셈이다. 그것은 숙명적인 강요로 이루어졌다. 내가 쓴 것은 내부로부터 나에게 엄습해온 것들이다. 나는 나를 충동질하는 영혼으로 하여금 말을 하도록 허용했다. 나는 나의 저술에 대해서 어떤 뜨거운 공감을 기대한 적이 없다. (……) 나는 누구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들을 말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특히 연구 초기에는 완전히 외톨이가 된 느낌을 자주 받았다. 나는 사람들이 싫어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397쪽.
17. ‘새로운 아이의 놀이’로 무의식의 맨얼굴을 만나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이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비판적 이성이 우세할수록 인생은 그만큼 빈약해진다. 그러나 무의식과 신화를 의식화할수록 우리의 인생은 그만큼 통합을 이루게 된다. 과대평가된 이성은, 그것이 지배하면 개인이 궁핍해진다는 면에서 독재국가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무의식은 우리에게 뭔가를 알려주거나 영상으로 암시하면서 하나의 기회를 준다. 무의식은 어떤 논리로도 이해되지 않는 것들을 우리에게 때때로 전해줄 수 있다.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536쪽.
내가 차마 가지 않은 길이 나의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을 때가 있다. 우리는 그때 가지 않은 길 때문에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이 바뀌었음을 알고 있다. 내 앞에 놓인 길이 매끄럽고 탄탄한 도로이며 모두가 걷고 싶어 하는 대로(大路)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 길이 생각처럼 평탄하지도 않으며 게다가 어느 날 문득 그 길 위에 나 혼자 서 있음을 깨달을 때도 있다. 우리는 그제야 깨닫는다. 몇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여전히 그 길을 선택했을 것임을.
내 앞에 분명히 믿음직한 길잡이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 길로 접어든 경우, 우리의 절망은 더욱 깊어진다. 분명 그 사람을 믿고 따르면 외롭지도 두렵지도 않으리라 믿었는데, 알고 보니 우리는 ‘다른 길’을 ‘같은 길’이라 생각하며 걸었던, 서로를 향한 철저한 이방인이었다. 융이 프로이트와 결별했을 때도 그랬다. 융은 가장 존경하는 대상에게 가장 깊은 실망을 느껴야 했고, 자신이 ‘아버지를 따르는 아들’이 아니라 아직 아들조차 낳아본 적이 없는 ‘새로운 아버지’가 되어야 함을 깨달았다.
프로이트와 인연을 끊은 후 융은 절망적인 방향상실 상태에 빠진다. 아무 것도 붙잡을 것이 없는 상태에서 텅 빈 허공에 떠 있는 듯한 느낌, 생의 나침반을 영원히 상실한 듯한 아찔함, 환자들을 돌보다가 스스로 정신이상이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던 융은 차라리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진보의 욕망을 떨쳐버린다. 그는 그동안 공부했던 모든 것이 ‘내가 아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바로 그때 그는 내면에서 속삭이는 또 하나의 목소리를 듣는다. 이토록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니 그저 마음이 시키는 대로 내버려두자. 융은 의식적으로 자신을 무의식에 충동에 맡겨버린다.
나에게는 해방이란 것이 없다. 내가 소유하지 않고 내가 행하거나 체험하지 않은 그 어떤 것들로부터 나를 해방시킬 수 없다. 진정한 해방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행했을 때, 내가 온전히 나 자신을 헌신하여 철저히 참여했을 때 비로소 가능한 법이다. 내가 참여하지 않고 물러서면 거기에 해당하는 영혼의 부분을 그만큼 절단하는 셈이 된다. (……) 자신의 열정의 지옥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다. 그러면 열정은 집 가까이 있게 되고 그가 미처 대비하기도 전에 불길을 일으켜 바로 그의 집을 덮칠 것이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포기하고 내버려두고 겉으로 잊어버린 체하고 있을 경우, 그 포기한 것과 내버려둔 것이 두 배의 힘으로 되돌아올 가능성과 위험이 상존한다.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490쪽.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욕망을 내려둔 채 무의식에게 길을 묻자 무의식은 이렇게 대답했다. 어린 시절 가장 좋아했던 놀이를 떠올려보라고. 학문과 출세의 길을 거의 동시에 달리고 있었던 30대 후반의 융에게 불현듯 떠오른 이미지는 진흙과 벽돌을 오밀조밀하게 쌓아올려 ‘나만의 집’을 만들던 어린 시절의 자신이었다. 그때 그 시절 열한 살 소년이 이제 성인이 되어버린 나 자신을 부르며 ‘함께 놀자’는 메시지를 보낸 셈이다. 융은 깨닫는다. 열한 살 소년과 지금의 나를 이어주기 위해서는, 쑥스럽고 어색하지만 그때 그 소년의 놀이를 다시 재연해보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그 작은 아이는 여전히 벽돌로 집을 지으며 까르르 웃고 있는데, 성인이 된 자신은 인생의 방향타를 잃어 완전히 좌절하고 있음을, 융은 직시한다. 그 소년은 내가 완전히 잃어버린 창조적인 삶을 누리고 있는데, 나만 여기 남아 권태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니.
융은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마침내 그때 그 시절 열한 살 소년이 되기로 결심한다. 아이의 놀이를 하는 것밖에는 다른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느끼자 어쩔 수 없는 굴욕감이 덮쳐오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호숫가와 물속에서 돌을 찾고 흙을 퍼 나르는 동안 그는 놀이의 적합성을 ‘판단하는 의식’을 깡그리 잊고 다만 즐겁게 놀이에 몰두한다. 그는 날마다 조금씩 집을 짓기 시작했다. 환자가 찾아오는 시간을 빼고는 온전히 열한 살 아이가 되는 시간을 기쁘게 누렸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어느새 ‘길 잃은 나’조차 잊어버린 스스로를 발견한다. 그는 그렇게 자신이 차마 가지 못한 길을, 잃어버린 자신을, 늦었지만 생생하게 다시 체험하는 ‘혼자만의 통과의례’를 거친다. 그 과정에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욕망과 길잡이를 잃어버린 고독과 내 안의 또 다른 나와 싸우는 고통을 선뜻 넘어서 버린다. 그는 그때부터 인생의 어려운 고비를 맞을 때마다, 아내가 죽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떠나가고, 전쟁이 일어나고,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느낄 때마다, 매번 ‘새로운 아이의 놀이’를 시작함으로써 자신이 억압했던 무의식의 맨얼굴을 만난다. 유능한 정신과 의사이자 학자가 갑자기 모든 연구 활동을 접고 집짓기 놀이에 몰두하는 것은 자칫 어리석은 퇴행이나 부질없는 망상으로 보이지만, 사실 그는 처절한 전투와 망아의 희열을 동시에 경험하는 정신의 리모델링을 감행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기념비적인 저작이 탄생했고, 잊을 수 없는 발견이 잇따랐다. 그에게 어린이 되기는 무의식의 내밀한 무늬와 숨결을 올올이 체험하는 내면의 통과의례였다.
18. ‘아름다운 망상’과 ‘참담한 삶’
한편 내쉬는 서른 살 이후 거의 30여 년간 자기 안에서 타오르는 메피스토펠레스(Mephistopheles, 중세 서양의 파우스트 전설과 이 전설을 소재로 한 괴테의 희곡에 나오는 악마)의 속삭임과 씨름했다. 때로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달콤한 유혹에 정신을 잃기도 하고, 오직 메피스토펠레스만이 창조력의 고갈에 신음하는 자신을 구원해줄 수 있다고 믿기도 했으며, 그에게 메피스토펠레스를 빼앗아 가려는 정신병원과 가족과 친구들에게 저항하며 모든 사회관계로부터 단절되기도 했다. 그는 정신분열증의 회복과 재발을 반복하며 자신의 좌절된 무의식과의 힘겨운 조우를 계속했다.
‘신의 왼발’을 자처하는 내쉬의 사명감은 너무 거대해진 나머지 교수직도 버리고 아예 미국을 떠나버렸으며,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기 위해 전대미문의 소동을 벌이기도 했고, 생의 전부였던 수학도 버린 채 정치에 뛰어들어 ‘세계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낡은 정체성을 훌훌 벗어던지면 자신의 무의식이 인도하는 우주적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융은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무의식에 ‘잡아먹힐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신중함과 조심성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무의식의 광휘에 사로잡히거나 무의식의 난폭 운전에 의식이 희생될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기 때문이었다.
무의식은 ‘선악을 넘어서’ 존재하는 거대한 영혼의 마그마다. 무엇으로 부활할지 모르는,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의 덩어리. 이 무의식을 예술로, 학문으로, 또 다른 소중한 그 무엇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것은 의식의 힘이었다. 그 의식이 ‘통제’로만 기능하면 강박증에 사로잡히고, 거꾸로 의식이 무의식에 사로잡히면 광기로 치닫기 쉬웠다. 무의식의 바다 위에서 출렁이면서 의식에 고삐를 놓지 않는 것, 의식의 고삐를 잡은 것조차 잊고 무의식의 창조적 상상력에 몸을 맡기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칼 융과 존 내쉬의 과제는 같았다. 인간 무의식의 극한을 실험하면서 그 무의식의 광휘에 눈멀거나 그 불길에 타버리지 않는 것. 무의식의 무한한 가능성을 한 줌이라도 더 의식의 차원으로 불러내어 창조적 작업에 영감을 불어넣는 것.
내쉬는 오랫동안 무의식의 광휘에 압도되어 자신의 의식과 평범한 일상을 완전히 폐기처분하는 극도의 모험을 감행했다. 이혼과 실직의 고통보다 더 아픈 것은 둘째 아들마저 자신처럼 정신분열증에 시달리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때로 ‘강제 입원’과 ‘강제 치료’로 인해 증상이 ‘호전’되는 기미가 보일 때마다 내쉬는 안도하기보다는 오히려 분노했다. 그에게 ‘치료’는 우주와 교통하는 듯한 신성한 체험의 행운을 빼앗는, 거대한 폭력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무의식의 통찰을 간직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것이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게 되었음을 알았을 때의 걷잡을 수 없는 상실감. 그것이 그가 ‘치유’될 때마다 느끼는 고통이었다. 동료들이 그의 ‘명석한 판단력’이 돌아왔다고 안도할 때마다 내쉬는 스스로 ‘타락했다’고 느꼈다. 아직 완전히 정신분열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그의 고백은 ‘부분적으로’ 무의식에 대한 빛나는 통찰을 담고 있었다. 그는 합리적 사고를 할 때, 우주와 개인과의 소통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했으며, 증세가 완화되는 것은 ‘강제된 합리성의 막간극’이라고도 했다.
정신질환 자체는 고통스러웠지만 내쉬는 일상생활보다 훨씬 고차원적인 정신활동을 하고 있다는 ‘향유’의 유혹을 버리기 힘들었다. 그 향락이 끝나는 것이 곧 ‘치유’였기에, 그는 정상으로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안의 신비한 기운, 고차원적인 사고 능력이 박탈되었다고 느꼈던 것이다. 게다가 정신의학이 아직 고도로 발달되기 전의 미국 주립정신병원은 거의 ‘모든 검증되지 않은 치료법의 실험실’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내쉬 또한 스스로를 끔찍한 실험대상 중의 하나라고 느낄 만했다. 위험천만한 인슐린 요법과 전기 치료는 그에게 도움이 되기보다는 모멸감과 수치심을 남겼다. 증세가 잠시 호전될 때마다 내쉬는 ‘아름다운 망상’ 대신 ‘참담한 삶’과 마주해야 했다. 그는 투약을 거부했으며 ‘왜 약을 먹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이렇게 대답했다. 약을 먹으면 내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요.
내쉬의 고통을 바라보는 또 다른 고통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해 떠나간 아내 앨리샤. 그녀가 오랜 방황 끝에 다시 내쉬에게로 돌아온 것이 결정적인, 진정한 ‘치유’의 시작이었다. 발병 이후 거의 20년 만에 내쉬는 그토록 원하던 자유와 안전과 우정을 되찾게 되었다. 어머니와 여동생이 그를 또다시 입원시키려 하자 겁에 질린 내쉬는 이혼한 전처 앨리샤에게 구원요청을 했던 것이다. 앨리샤는 내쉬와 헤어진 이후 스스로도 심각한 우울증을 앓으며 ‘공격적인 치료’가 진정한 치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앨리샤는 지난 날 여러 차례 그를 강제 입원시켰던 것은 그의 치료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앨리샤는 오갈 데 없는 전남편을, 한때 천재로 명성을 날렸으나 이제 변변한 직업도 없이 옛 친구들의 도움에 의지해 살아가는 그를, 다시 받아들이기로 한다. 고통을 배제하려고 몸부림칠수록 고통의 늪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그녀 스스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고통으로부터 한사코 도망치다 고통의 올가미에 사로잡히느니 차라리 당당하게 고통과 더불어 살기로 마음먹는다. 태연하게 고통과 동거하기 시작하자 고통은 더 이상 예전의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발휘하지 못했다. 30년 이상의 고통스런 견딤의 시간이 지난 후 앨리샤는 내쉬가 치료된 원인을 이렇게 멋지게 해석했다. “그래요. 내 남편은 정신분열증을 앓다가 치유되었지요. 회복의 원인은 구구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저 고요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뿐입니다.”
19. 내 안의 메피스토펠레스를 만나다
물론 그 고요한 삶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수많은 동료 수학자들의 우정과 아내의 사랑, 그리고 빛나는 지적 성찰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는 내쉬 스스로의 노력이었다. 이례적으로 수학자에게 노벨경제학상이 돌아갔을 때, ‘정신병자에게 노벨상을 줄 수는 없다’는 편견을 관철한 반대파도 존재했으며, 설사 그에게 노벨상을 준다 할지라도 ‘그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과연 내쉬가 감당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들도 있었다. 내쉬의 평전인 『뷰티풀 마인드』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영화로 각색될 때 명장면으로 꼽힌 ‘만년필 세러모니’. 이 장면은 내쉬를 둘러싼 동료들의 우정을 형상화한 멋진 알레고리다. 존경하는 학자에게 자신이 늘 쓰는 만년필을 헌정하는 아름다운 세러모니. 그것은 실제 존 내쉬의 재능을 아끼고 그를 포기하지 않았던, 그가 아무리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려고 몸부림쳐도 끊임없이 미국 대학에 일자리를 주선하고 병원비를 모금해주었던 수많은 동료들의 우정과 기대를 압축한 상징적 장면이 아닐까.
실제로 노벨상 수상보다 더욱 감동적인 것은 내쉬가 그 화려한 월계관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의 전집조차 출간을 거부한 채, 과거의 성공을 뛰어넘는 ‘미래의 저작’을 준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집을 발간한다는 것은 곧 ‘평생의 연구가 완료되었음’을 인정하는 꼴이기에, 자신의 마지막 가능성을 열어놓고 싶다는 간절한 의지였던 것이다. 내쉬는 자신의 최고의 작업이 20대에 이미 완성한 게임이론이 아니라 ‘앞으로 살아가는 나날 동안’ 만들어질 미지의 작업이 되기를 바랐다. 물론 그의 병이 언제 다시 재발할지도 모르고, 그가 평생 게임이론을 뛰어넘는 연구를 해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노벨상을 받은 천재 수학자의 드라마틱한 삶’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조용히 지속되는 학자의 삶’을 살고 있다. 그는 자신이 정신분열증 환자와 의사들에게 ‘희망의 상징’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희망에 부응하는 달콤한 대답을 준비하진 않았다. 그는 자신의 노벨상이 ‘발병 이전의 성과’가 아니라 ‘발병 이후, 병을 극복한 후 낸 성과’였다면 훨씬 감동적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정신과의사들을 향한 강연에서 내쉬는 이렇게 말한다.
비합리적이었다가 합리성을 회복한다는 것, 정상적인 삶을 회복한다는 것, 그것은 멋진 일입니다. (……) 그러나 그것은 그리 멋진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의 환자 중에 화가가 있다고 칩시다. 그는 합리적입니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고 칩시다. 그는 정상적으로 활동합니다. 그것이 진정 치료가 된 것입니까? 그게 정말 구원입니까? 나 또한 모범적인 회복 사례일 수가 없다고 봅니다. 내가 앞으로 훌륭한 연구를 해내지 못한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아쉬워하는 듯, 거의 들리지 않는 낮은 음성으로 덧붙였다.) 내가 좀 늙었기는 하지만.
-실비아 네이사, 『뷰티풀 마인드』, 707쪽.
융은 무의식의 속삭임에 한껏 귀 기울이면서도 현실에 발 딛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에게 ‘이승의 발판’은 가족과 직업이었다. 의사 면허를 가지고 환자를 도와주어야 하고, 다섯 아이의 아버지와 한 여자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사실은 그가 내면세계의 목소리에 완전히 점령당하지 않을 수 있는, 소중한 일상의 무게중심이었다. 그러나 ‘일상의 중심’과 ‘세속적 열망’은 구분되어야 했다. 그는 무의식의 탐험을 좀 더 적극적으로 감행해야 한다는 내면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학문적 출세의 길을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교수직을 버린다는 것은 융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자신의 숙명에 분노하기도 했고, 상식적인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자신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평생에 걸친 ‘마음 만지기’ 끝에 무의식에 대한 어떤 믿음에 다다른다. 우리 안의 내적 인격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말하는지 진심으로 귀를 기울인다면 마음의 고통은 사라진다고. 그는 열정과 분노에 몸이 달아오르다가도 조금만 흥분을 가라앉히면 자기 안의 ‘우주적인 고요’가 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모든 세속적 열망을 되는 대로 다 추구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때부터 만다라 그림을 연구하고 연금술과 신화를 본격적으로 연구하며 아프리카 탐험까지 감행하여 ‘개인의 무의식’을 넘어 ‘인류의 집단 무의식’을 탐구하는 기나긴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물론 생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때마다 가뿐하게 ‘어린이 되기’ 하는 내면의 통과의례도 잊지 않았다. 그리하여 시간이 곧 어린이임을, 어린이처럼 놀며 주사위를 던지고 체스를 두는 것이 바로 시간임을 깨닫는다. 그는 어린이의 놀이에 몸을 맡겨 ‘아직 아무 것도 아니었기에 그 무엇도 될 수 있었던 자신의 무한한 잠재성’을 발견한다.
나는 고아, 혼자다. 그런데도 어디서나 발견된다. 나는 하나의 존재, 그러나 나 자신과 대립하는 존재다. 나는 젊은이인 동시에 노인이다. 나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모른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나를 물고기처럼 깊은 곳에서 끄집어 올려야만 하므로. 아니면 하얀 돌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므로. 숲과 산에서 나는 두루 쏘다니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다. 나는 누구를 위해서도 죽지만 시간의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408쪽.
융은 프로이트라는 거대한 스승이자 아버지이자 동료를 잃음으로써 세상 전체가 자신을 향해 등을 돌린 듯한 뼈아픈 고독을 경험했다. 하지만 그는 무의식과의 날카로운 조우를 통해, 말하자면 45년 이상의 학위도 수업도 스승도 교과서도 없는 처절한 독학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자신의 무의식을 ‘스승’으로 삼았다. 내쉬 또한 고통스러운 증상의 형태를 띠고 있었지만 결국 자신의 통제되지 않는 영혼의 불수의근, 즉 무의식을 자신의 진정한 스승으로 삼았다. 그들은 이 세상 모두가 자신에게 등을 돌려도, 끝내 살아남는 내 안의 스승, 내 안의 친구, 내 안의 연인이 있음을 자신의 삶으로 증명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성은 소중한 선물이다. 그러나 이성은 러닝머신처럼 이미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 이미 알고 있는 삶만을 살도록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는 의식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으며 살아가고 있다. 믿어지지 않는 사랑에 빠질 때,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될 때,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만들어낼 때, 영혼의 마지막 기름까지 쥐어짜내어 감동적인 연애편지를 쓸 때, 사랑하는 사람의 신변에 생길 위협을 미리 감지할 때, 왠지 이곳에서는 멋진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으로 이사를 할 때, 우리는 무한리필되는 무의식의 연료를 자신도 모르게 마음껏 활용한다. 우리의 영혼은 저마다 아직 알지 못하는 아름다운 노래 가사이며, 아직 지어지지 않은 아름다운 시이며, 아직 그려지지 않은 멋진 그림이며, 아직 인간의 발자국이 닿지 않은 미지의 우주 공간이며, 아직 시작되지 않은 세기의 로맨스인 것이다.
무의식의 깊은 곳으로 가는 불확실한 길에 자신을 맡기는 일은 위험한 실험이나 수상한 모험으로까지 여겨진다. 그것은 오류와 불확실의 길, 그리고 오해의 길이라고 간주된다. 나는 괴테의 다음과 같은 말을 생각한다. “외람되게도 저 문을 열어젖혀라. 사람마다 통과하기를 주저하는 저 문을…….” 『파우스트』 제2부는 문학적 시도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철학적 연금술과 그노시스파 사상에서 시작하여 니체의 『차라투스트라』에까지 이어지는 ‘황금사슬’의 한 고리다.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345~6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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