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고독은 천재의 학교다?
지금 여기에서 칼 융과 존 내쉬의 때 아닌 접속을 시도하는 이유는 그들이 단지 세계를 뒤흔든 ‘천재’이기 때문만도, 풍부한 심리학적 요소들로 인생을 채우고 있기 때문만도 아니다. 물론 칼 구스타프 융의 이론으로 존 내쉬의 삶을 일방적으로 해석하기 위함도 아니다. 두 사람의 흥미로운 공통점은 바로 ‘무의식의 의식화’를 누구보다도 극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라는 점이다. 두 사람은 무의식의 카오스를 의식의 전면으로 불러내어 자신의 가능성을 극한까지 실험했고 그 결과는 양극단으로 나타났다. 존 내쉬는 무의식이 의식을 습격하는 강도가 해일이나 행성충돌의 충격에 육박하자, 의식의 활동 자체를 제대로 해낼 수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 그의 정신분열증은 무의식에 습격당한 의식의 처절한 실패처럼 보였다. 칼 구스타프 융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자기 무의식의 분열적 측면, 은밀한 광기를 차분하게 사유의 재료로 삼아 무의식이 뿜어내는 예측불허의 율동 자체를 필생의 과제로 삼았다. 자기 자신의 무의식을 연구 주제로 삼아 평생을 밀고 나갔던 칼 구스타프 융과 존 내쉬가 만났다면 얼마나 풍요로운 밤샘 토론이 벌어졌을까.
자신의 무의식을 속속들이 의식의 영토로 불러낸 사람이라는 것이 존 내쉬와 칼 융의 결정적인 공통점이 아닐까. 존 내쉬가 할리우드식 감동의 자기 극복 스토리로 연마되기에는 훨씬 용이한 대상이지만, 한 존재로서 자신의 무의식과 만나는 데 조금 더 성공적이었던 사람은 오히려 칼 융 쪽이 아닐까.
모든 수학자는 서로 다른 두 세계에 산다. 그들은 완벽한 플라톤적 형태를 갖춘 수정(水晶)의 세계에 산다. 얼음 궁전에. 동시에 그들은 모든 것이 덧없고, 애매하고, 영고성쇠하는 속세에 산다. 수학자들은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진퇴를 거듭한다. 그들은 수정 세계에 사는 어른이며 실세계에 사는 어린 아이이다.
-S. 캐펠, 쿠랑 수학 연구소, 1996
존 내쉬는 수학의 세계 속에서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재능과 열정을 보였다. 그러나 실생활 속에서는 ‘아이큐 12의 어린아이’라는 식의 혹평을 받으며 누구와도 지속적인 친밀함을 공유하지 못했으며 사랑도 우정도 동정심 비슷한 것조차도 느끼지 못하는 위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고독이 천재의 ‘학교’인 것은 맞다. 그러나 천재도 인간이며, 인간은 고독을 위무해줄 친구와 연인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천재도 비켜갈 수 없는 인간적 진실이다. 존 내쉬는 현실에서는 좀처럼 만들 수 없었던 진정한 인간관계를 어떤 방식으로 만들었을까. 존 내쉬의 삶은 영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단지 ‘천재-광기-노벨상’의 삼각 편대가 펼치는 화려한 휴먼 스토리만으로는 설명되기 어렵다.
이 영화는 그저 순순히 ‘따라 읽기’에는 존 내쉬의 너무 많은 ‘잉여들’을 삭제해버렸다. 흥미로운 것은 그 ‘삭제된 잉여’야말로 존 내쉬를 ‘바로 그 한 사람’이게 만드는 요소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이 글은 영화 『뷰티풀 마인드』가 삭제해버린 어느 한 천재 수학자의 내면에서 일어난 기이한 분열의 조짐들, 타인에게 이해받지 못했던 그의 각종 기행, 정신분열이라는 ‘장애물’을 뚫고 노벨상을 타냈다는 식의 할리우드적 감동의 휴먼 스토리에 미처 다 담지 못한 한 천재의 우울한 광기를 소중하게 다룰 것이다. 우리가 2주 동안 떠나볼 이번 여행은 한 천재의 머릿속, ‘수학적 논리’만으로는 설명되기 어려운 인간의 무한한 ‘모호성’을 향해 천천히 항해할 것이다.
존 내쉬의 삶이 ‘뷰티풀 마인드’라는 멋진 제목으로 형상화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정신 질환의 위험을 ‘극복’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좀처럼 엿보기 힘든 무의식의 소우주를 속속들이 ‘발견’했기 때문이 아닐까. 영화 『뷰티풀 마인드』는 방랑하던 오디세우스가 ‘결국엔 집에 돌아왔음’을 강조하기 위해 오디세우스의 방황이 지닌 다채로운 이미지와 상징을 삭제하거나 왜곡해버렸다. 집에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바다 한복판을 헤매고 있을 오디세우스의 또 다른 자아, 바다 위에 버리고 와야만 했던 오디세우스의 방황과 분열이야말로 오디세우스가 실현하지 못한 오디세이의 백미가 아닐까.
나는 나 자신을 일종의 악마 또는 돼지, 어떤 타락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 복음서에서 바리새인과 세리들에 관한 부분을 읽고는 그 타락한 자들이 선택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나는 다소 만족감을 느꼈다. (……) 나는 뭔가 나쁜 것, 뭔가 악하고 음울한 것에 빠져들었다. 그것은 동시에 어떤 영예와도 같았다. 나는 사실 무엇에 관해 말해야 할지 모르면서도 말하고 싶은 이상한 충동을 자주 느꼈다. (……)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그러한 체험의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자 나는 파문되었거나 선택되었다는 느낌, 저주받았거나 축복받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 오늘날에도 나는 외롭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들, 대부분 도통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들을 내가 알고 있고 그것을 암시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칼 구스타프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82~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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