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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시네필 다이어리,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조셉 캠벨[너를 찾으러 가는 길 끝에서 ‘나’를 발견하다] - 4. 신화적 통과의례의 첫 번째 관문 본문

책/철학(哲學)

시네필 다이어리,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조셉 캠벨[너를 찾으러 가는 길 끝에서 ‘나’를 발견하다] - 4. 신화적 통과의례의 첫 번째 관문

건방진방랑자 2021. 7. 25. 0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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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화적 통과의례의 첫 번째 관문

 

 

마라톤 선수의 모습을 보라. 난생 처음으로 경주에 참가한 사람과는 달리, 전문적인 마라톤 선수는 자신의 외모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여러분은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경주를 하는 것이다. 이기느냐 또는 지느냐가 아니라, 오로지 경주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마라톤에 참가하는 것은 그 자체가 사건이다. 모든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 여러분이 이기느냐 또는 순위 안에 드느냐는 그저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이것이야말로 구속 없는 참여인 것이다.

-조셉 캠벨, 다이앤 오스본 편, 박중서 역, 신화와 인생, 갈라파고스, 2009, 286.

 

 

이 무시무시한 귀신들의 온천을 지배한다는 마녀 유바바의 방. 치히로는 유바바가 풍기는 으스스한 첫인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뜸 자신의 요구사항부터 제시한다. “여기서 일하게 해주세요.” 치히로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유바바는 콧방귀를 뀐다. “비실비실한 애가 뭘 하겠느냐? 인간이 올 곳이 아니다. 800만 신들이 피로를 풀러 오는 온천탕이야!” 이제야 이곳의 정체를 조금 알 것 같다. 치히로는 온갖 귀신들이 모여 온천욕을 하는, 인간의 출입이 금지된 유바바 월드에 입성한 것이다. “그런데 네 부모는 뭐냐? 손님 음식을 돼지처럼 먹어치우다니! 너도 다시는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없어. 새끼 돼지로 만들어 줄까? 아니면 석탄으로 만들어 버릴까?” 유바바는 마치 치히로 가족의 행적을 낱낱이 감시해온 것처럼, 치히로의 속마음까지 꿰뚫을 듯한 커다란 두 눈을 번득인다.

 

 

 

 

유바바의 콧바람 한 번이면 훅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치히로는 두려움에 떤다. 정말 다시 돌아갈 수 없다면, 부모님을 다시 만날 수 없다면, 난 어떻게 될까. “떨고 있구나. 그래도 여기까지 잘 온 걸 보면 틀림없이 누군가가 도와준 게야. 칭찬받을 만해. 누구였어? 가르쳐 주렴.” 치히로는 자신을 도와준 하쿠의 선의를 기억해낸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 안의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기억해낸다. 나는 살아남아야 한다. 새끼 돼지로 변해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인간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부모님을 구하기 위해서는, 여기서 반드시 일을 해야 한다. “여기서 일하게 해주세요.”

 

유바바는 꿈쩍도 안 한다. “내가 널 왜 고용해야 하지? 굼뜬 응석받이, 머리 나쁜 울보한테 맡길 일 따윈 애초부터 없어.” 그때 아기 울음소리가 난다. 험상궂은 마녀 유바바는 갑자기 온화한 표정으로 돌변하며 아기를 어르느라 상냥해진다. 유바바가 아기를 달래느라 정신없는 사이, 치히로는 집요하게 부탁한다. “여기서 일하고 싶습니다! 꼭 좀 일하게 해주세요!” 유바바는 우는 아기를 달래느라 모든 게 귀찮다는 듯, 얼떨결에 알았다니까!”라고 대답해버리고 만다.

 

 

 

 

마녀의 음험한 협박에도 넘어가지 않는 치히로의 첫 번째 승리, 그것은 단지 살아남는 것이었다. 때로는 오직 살아남는 것이 그 어떤 영웅적 행위보다 존엄하다. “계약서다. 이름을 써라. 일하게 해주겠다. 대신, 싫다든가 돌아가겠다고 하면 새끼 돼지로 만들어 버릴 테다!” 새끼 돼지로 변해버리지 않고, 숯검뎅으로 변하지도 않은 채, 일단 살아남았다는 것만으로 치히로는 영웅의 첫 번째 임무를 달성한 것이다. “치히로라고? 이름 한번 거창하구나. 그 이름은 네게 어울리지 않아. 이제부터 네 이름은 센이다. 알겠느냐?” 센은 자신이 일할 목욕탕으로 배정된다. “이름이 뭐지?” “? 치히, 아니, 센입니다.” 신화의 세계에 입문하기 위해서는, 통과제의의 첫 번째 문턱에 오르기 위해서는, 가장 소중한 무언가를 희생시켜야한다. 그것이 엄마와 아빠, 그리고 치히로 본인의 이름이었다. 이제 그녀는 치히로가 아니라 센이다. 아니, 자신이 치히로였음을 잊어서는 안 되는 센이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신화적 통과의례의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한 것이다.

 

치히로는 신화 속의 성스러운 공간으로 진입했다. 그곳은 속세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공간이다. 일상의 자극으로부터 완전히 봉인될 때, 시간의 중력으로부터 해방될 때, 내면의 탐구는 시작된다.

 

 

성스러운 공간은 속세로부터 완전히 밀폐, 봉인되어 있다. (……) 여러분은 날짜나 시간이 주는 자극의 영향으로부터 보호받는 영원의 장소에 있게 되는 것이다. 명상을 할 때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즉 여러분 스스로를 봉인하는 것이다.

-조셉 캠벨, 다이앤 오스본 편, 박중서 역, 신화와 인생, 갈라파고스, 2009, 262.

 

 

일상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은 두려운 모험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시간의 장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 도저히 일상의 숨 가쁜 시곗바늘을 순순히 따라갈 수 없을 때, 문득 스스로 행방불명되고 싶었던 경험이 있는가.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곳으로 연기처럼 사라지고 싶었던 적이 있는가. 바로 그때가, 우리의 영혼이 내면의 탐구를 시작하는 때, 치히로(일상적 자아)의 행방불명이 센(신화적 자아)의 탄생으로 전이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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