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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시네필 다이어리,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조셉 캠벨[너를 찾으러 가는 길 끝에서 ‘나’를 발견하다] - 3. 미지와의 조우: 이제 나는 내가 아니다 본문

책/철학(哲學)

시네필 다이어리,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조셉 캠벨[너를 찾으러 가는 길 끝에서 ‘나’를 발견하다] - 3. 미지와의 조우: 이제 나는 내가 아니다

건방진방랑자 2021. 7. 25. 0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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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미지와의 조우: 이제 나는 내가 아니다

 

 

여러분이 어렸을 때 하던 일,

시간을 초월하게 만들고,

시간을 잊어버리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바로 거기, 우리 삶에 깃든 신화가 자리 잡고 있다.

-조셉 캠벨, 다이앤 오스본 편, 박중서 역, 신화와 인생, 갈라파고스, 2009

 

 

앨리스가 토끼굴에 빠져 느닷없이 추락하고, 페르세포네가 하데스에게 납치되어 지하세계로 낙하하고, 오르페우스가 아내를 찾기 위해 하계(下界)로 내려간다. 신화적 서사 속에서는 이렇게 본래의 자리에서 이탈하여 나락으로 추락하는, 돌아올 기약 없는 미지의 모험을 시작하는 주인공들이 있다. 치히로의 첫 번째 임무 또한 알 수 없는 심연으로 추락하는 것이다. 하쿠의 조언대로 일자리를 부탁하러 가마할아범을 만나기 위해서는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기나긴 통로를 향해 미끄러져 내려가야 한다. 겁에 질린 치히로는 돼지가 되어버린 부모를 구해내기 위해, 아니 지금은 단지 살아남기 위해, 끝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처럼 으스스한 통로를 향해, 무작정 낙하한다.

 

 

 

 

추락으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치히로는 뜨거운 불가마 곁에서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노동을 반복하는 가마 할아범을 만난다. 치히로는 아직 돈 한 푼 벌어본 적이 없는 어린 소녀지만 꼼짝없이 불가마에서 일을 해야 할 판이다. “가마 할아버지 맞으시지요? 하쿠가 보냈어요. 일을 하게 해주세요.” 치히로는 일단 다짜고짜 말을 뱉어놓긴 했지만 힘겹게 일하고 있는 가마 할아범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도저히 두 팔로는 해치울 수 없는 노동을 해내느라, 할아범은 거미처럼 여러 개의 팔을 갖게 된 것 같다. “내가 가마 할아범이야. 욕탕 가마에서 혹사당하는 늙은이야.”

 

 

 

 

할아버지는 말을 하면서도 한 번도 날렵한 손놀림을 쉬지 않는다. 할아버지의 조수들은 올망졸망한 검뎅이귀신들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연이어 일어나자 치히로는 도리어 차분해진 표정이다. 가마 할아범은 치히로가 전혀 필요 없어 보인다. “일손은 충분해. 여긴 온통 그을음이야. 대타도 넘쳐.” 일하지 않으면 검뎅이귀신들의 마법이 풀려 숯검정으로 돌아가 버린단다. 유바바 왕국의 냉혹한 생존 법칙을 눈으로 확인한 치히로의 눈빛은 두려움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치히로는 포기하지 않는다. 가마 할아범이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자 조용히 검뎅이귀신들을 도와 일을 하기 시작한다. 무거운 돌을 들어 가마로 나르는 치히로의 모습은 연약하지만 더 이상 어리광이 묻어 있지 않다. 그녀가 편안하게 엄마, 아빠의 울타리 안에서만 살았다면, 어디선가 이토록 힘겨운 짐을 지고 있는 가마 할아범과 먼지꼬맹이들의 삶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가족의 울타리, -가족-학교로 이어지는 일상적 공동체의 울타리를 벗어나자 타인의 삶을 만나게 된다. 안전한 일상의 DMZ 안쪽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타인의 삶을. 어쩌면 지금 곤경에 빠진 나보다 훨씬 더 오래전부터 고통을 겪고 있던 삶들을. 난생 처음 닥친 어려운 미션을 조용히 해내는 치히로. 묵묵히 일을 하고 있는 치히로를 지켜본 가마 할아범. 그때 마침 이라는 종업원이 할아범의 식사를 배달해준다. 할아범은 린에게 치히로를 맡긴다. “내 손녀야.” 졸지에 가마 할아범의 손녀로 불린 치히로는 깜짝 놀란다. “내 손녀가 일하고 싶대. 그런데 여긴 일손이 충분해. 유바바한테 데려다줘. 나머진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가마 할아범은 무뚝뚝한 사람이지만 치히로의 어리버리한 겉모습에 가려진 그녀의 진심을 알아본다. “어디서 일하든 유바바와 계약해. 가서 너의 운을 시험해봐.” 린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치히로를 데리고 유바바에게로 간다. 치히로에게 인간의 구린내가 난다며 힐끔힐끔 바라보는 유바바 온천의 귀신들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치히로는 간신히 유바바의 방에 도착한다.

 

 

여러 해 전 어느 초등학교 교실에서 일어난 일로서, 내가 잘 아는 가정의 아이에 관한 일화를 듣게 되었다. 선생님이 어린이들에게 질문을 했다. “신화가 무엇이지?” 그 중 한 소년이 답한다. “신화는 내면세계에서는 진짜인데 바깥 세계에서는 진짜가 아닌 거예요.” 불행하게도 선생님은 이 답을 이해하지 못했다. 종종 어린이가 어른보다 더 깊은 심리학적 지혜를 가지고 있다. (……) 신화는 꿈과 같다. 꿈은 무의식이 보내는 전령이다. 무의식은 꿈을 통해 의식의 관심사나, 무의식이 지니고 있는 내용에 대해 말 걸기를 시도한다.

-로버트 존슨, 고혜경 역, We-로맨틱 러브에 대한 융 심리학적 이해, 동연, 2008,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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