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세 친구: 나보다 더 아픈 나와의 만남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용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아에 속박된 ‘자기’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용 우리에 갇혀 있어요. 분석심리학은 용을 쳐부수고 무너뜨림으로써 우리를 더 넓은 관계의 마당으로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궁극적인 용은 우리 안에 있어요. 우리를 엄중히 감시하고 있는 우리의 자아, 이게 바로 용입니다.
-조셉 캠벨, 이윤기 역, 『신화의 힘』, 이끌리오, 2002, 273쪽.
난 역시 안 돼, 난 결코 꿈을 이룰 수 없을 거야, 내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난 도저히 저 사람을 따라갈 수가 없어…. 조셉 캠벨은 끊임없이 우리 자신의 가능성을 가로막는 우리 안의 또 다른 자아를 ‘용’이라고 불렀다. ‘늪의 생명력’을 상징하는 동양의 용이 때가 되면 그야말로 우렁차게 ‘용트림’을 하며 웅장하게 승천하는 존재라면, 서양의 옛이야기에 등장하는 용은 뭐든지 일단 잡아 가둬 자신의 통제권 안에 두려고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감시하고 있는 공주가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존재인지도 모르면서, 그렇다고 그 공주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저 고집스레 공주의 출입을 가로막으며 입구를 지키고 앉아 있는 용의 이미지. 그것은 우리 안의 재능이, 우리 안의 꿈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지 못한 채 평생 ‘아직은 때가 아니야’, ‘난 재능이 없어’라고 판단하며 ‘꿈의 승천’을 미루고 또 미루는 인간의 마음을 닮았다.
우리는 거대한 용과 싸우는 영웅의 이미지를 다룬 수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다. 성을 지키는 끔찍한 용과 싸워 공주를 구하는 이야기부터, 용과의 싸움이 끝나면 드디어 미션이 완성되는 각종 게임시나리오에 이르기까지. 조셉 캠벨은 신화적 모티브의 단골 메뉴인 이 ‘용(dragon)’과의 싸움이야말로 통과의례의 절정, 즉 ‘나를 가두고 있는 나’와의 싸움, ‘나를 감시하고 있는 나’와의 싸움임을 간파했다. 센의 친구 하쿠는 바로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이 거대한 ‘용’을 닮은 인물이다.
하쿠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센이 곤경에 처했을 때 곧잘 나타나주지만, 막상 센이 찾을 때는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유바바 온천 사람들조차 하쿠의 행방을 잘 모른다. “하쿠는 가끔 잘 없어져. 소문엔 유바바가 험한 일을 시켰대.” “하쿠를 조심해. 하쿠는 유바바의 하수인이야.” 온천 식구들은 하쿠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에 하쿠에 대한 위험한 소문을 더욱 편리하게 퍼뜨린다. 늘 비밀에 싸인 친구 하쿠, 그는 자신이 가진 놀라운 마력으로 센을 곧잘 도와주지만 센이 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던 어느 날 센은 바다 위에서 거대한 새 떼의 무리와 싸우는 아름다운 용 한 마리를 발견한다. 피투성이가 되어 새 떼와 싸우는 어린 용, 센은 그 용이 바로 하쿠임을 본능적으로 알아본다. 새 떼의 맹공에 밀려 온몸에 피를 흘리고 쓰러지는 푸른 용. 그런데 맹공격을 펼치던 새 떼가 센이 있는 창 쪽으로 따라와 떨어지자 그들이 그저 ‘종이 새’에 불과했음이 밝혀진다. “그냥 종이잖아?” 쓰러진 용을 쓰다듬으며 센은 젖은 눈으로 속삭인다. “하쿠가 맞지? 다친 거야? 종이 새는 갔어. 이젠 괜찮아.” 용이 된 하쿠는 사악한 마법에 걸린 왕자처럼, 자신의 고통을 남에게 들키기 싫어하는 특유의 자폐적인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괴로워한다. 센은 치명상을 입고 괴로워하는 하쿠를 구하기 위해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일단 하쿠를 이렇게 만든 것으로 의심되는 유바바를 찾기로 한다. 그런데 유바바를 만나러 가던 도중 예기치 않게 ‘가오나시’의 끔찍한 대변신과 활극을 맞닥뜨리게 된다.
센이 살짝 열어놓은 문틈으로 몰래 유바바 온천에 잠입한 가오나시. 가오나시는 가면 뒤에 얼굴이 없을 뿐 아니라 목소리도 없다.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그는 몰래 개구리의 몸을 먹어 개구리 목소리를 내며, 사금으로 온천 식구들을 유혹하고, 온천장을 휘저으며 닥치는 대로 폭식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오나시는 자신만의 얼굴을 갖지 못한 존재이며, 타인과의 접촉에 실패하고 늘 타인의 목소리에 올라타야만 말을 할 수 있는 존재다. 초대받지 못한 손님, 존재 자체가 불분명한, 있으면서도 없는 존재. 가오나시는 타인에게 말걸고 싶지만 자연스럽게 말을 거는 법을 알지 못해 ‘사금’이라는 유혹의 미끼를 쓴다. 그가 애타게 찾고 있는 것은 센이다. 자신에게 처음으로 ‘친절’을 보여준 유일한 친구, 센. 사람들은 몸에서 사금을 만들어내는 가오나시의 능력에 반해 “부자 나리가 납시었네, 금이 손에서 무한정 나온대.”하고 가오나시를 따라다니지만, 센은 이 황금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 센은 무심한 얼굴로 “전 필요 없어요, 됐어요.” 라고 말한다. 이런 센에게 더 큰 매혹을 느낀 가오나시.
우여곡절 끝에 가오나시를 피해 달아난 센은 유바바의 방에 몰래 잠입한다. 그곳에서 센은 유바바의 끔찍한 명령을 엿듣고야 만다. “하쿠를 처치해버려. 이제 그 애는 필요 없어.” 유바바는 부하에게 살벌한 명령을 내리자마자 안면을 싹 바꾸어 자애로운 어머니의 표정으로 돌아간다. “또 침대에서 안 자고! 미안해, 코오 자는데 깨웠구나! 엄마는 아직 일이 있단다. 잘 자렴, 착한 아가!” 그러나 이 아가는 전혀 착하지 않아 보인다. 엄마에게 떼를 쓰며 팽 토라지는 아기의 위용이 그제야 드러난다. 어른보다 더 큰 수퍼베이비. 몸은 어른보다 크지만 정신은 갓난아기에 머물러 있는 이 ‘귀엽지 않은’ 아기와 유바바의 관계는 캥거루족 아들과 헬리콥터족 수퍼맘처럼 서로에게 의존적이다. 모두에게 철저히 군림하는 유바바가 정작 아기에게는 쩔쩔맨다. 그리고 그 아기는 자라지 않는 정신 때문에, 엄마에게 고착된 정신 상태 때문에 엄마를 구속할 뿐 아니라 자신의 성장도 구속한다. 엄청나게 커다란 몸집을 자랑하지만 아직 영혼의 모유를 떼지 못한 수퍼베이비를 이렇게 만든 것은 물론 엄마다. “바깥은 병균으로 득실거려. 늘 엄마와만 있어라.”
이 수퍼베이비에게 센은 난생처음 맞닥뜨린 타자다. 아기는 엄마 아닌 사람과 처음으로 놀아보고 싶은 호기심을 느낀다. 수퍼베이비 덕분에 유바바에게 들킬 위험을 모면한 센은 말한다. “도와줘서 고맙지만 바빠서 가야 돼, 놔줄래?” 아기는 센에게 심술궂은 얼굴로 말한다. “병 옮기러 왔지? 밖엔 나쁜 병균밖에 없어.” ‘아가, 밖엔 무서운 것밖에 없어, 엄마를 떠나면 오직 위험뿐이야’라고 가르친 유바바의 교육철학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나가면 몸에 나빠. 여기서 나랑 놀자.” 절대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아기에게 센은 굳은 결심이 어린 표정으로 대답한다. “이런 곳은 병에 더 잘 걸려. 나한테 소중한 사람이 많이 다쳤어. 어서 가봐야 돼.” 센은 어느새 하쿠를 ‘나한테 소중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엄마, 아빠에게 찰싹 달라붙어 아무것도 혼자 해내지 못할 것 같던 소녀가 이제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기 시작했다. 센은 하쿠를 구하기 위해,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유바바의 카리스마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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