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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시네필 다이어리,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조셉 캠벨[너를 찾으러 가는 길 끝에서 ‘나’를 발견하다] - 5. 영원에 발을 딛고 시간의 장(場) 위에서 춤추다 본문

책/철학(哲學)

시네필 다이어리,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조셉 캠벨[너를 찾으러 가는 길 끝에서 ‘나’를 발견하다] - 5. 영원에 발을 딛고 시간의 장(場) 위에서 춤추다

건방진방랑자 2021. 7. 25. 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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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영원에 발을 딛고 시간의 장() 위에서 춤추다

 

 

모이어스: 소년 시절에 원탁의 기사를 읽었는데요. 문득 저도 영웅이 될 수 있겠다 싶더군요. 정말 집을 떠나 용과 싸우고 싶었습니다. 어둠의 숲으로 들어가 악의 세력을 무찌르고 싶었습니다. 신화가 오클라호마주의 농투성이 아들을 꼬드겨 영웅이 되고 싶게 만들었는데, 선생님께서는 이 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캠벨: 신화에는 개인이 지닌 완전성과 무한한 힘의 가능성을 깨닫게 하고 그 세계를 날빛 아래로 드러내는 힘이 있어요. 괴물을 죽인다는 것은 우리 안의 어둠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신화는 우리를 사로잡되, 우리 심층에 있는 것을 거머쥡니다. 내가 인디언 이야기를 읽고 그랬듯이 모이어스 씨도 그랬군요. 그런데 나이를 먹을수록 신화는 우리에게 그만큼 더 수다스러워집니다.

-조셉 캠벨·빌모이어스, 이윤기 역, 신화의 힘, 이끌리오, 2002, 272.

 

 

린은 센에게 작업복을 주고 근무수칙을 일러주며 천신만고(千辛萬苦)의 고생길에 오른 것을 환영한다. 하쿠는 센에게 부모님을 만나게 해주겠다며 은밀하게 그녀를 불러낸다. 돼지들, 아니 부모님은 센이 온 것도 모르고 쿨쿨 자고만 있다. “엄마, 아빠! 아픈 거야? 다친 거야?” 센은 걱정 어린 눈길로 부모님을 부르지만 하쿠는 더욱 비극적인 소식을 전달한다. “배가 너무 불러서 자는 거야. 사람이었다는 걸 알지 못해.” 센은 기막힌 소식에 더 이상 놀라지 않고 차분하게 돼지-부모를 타이른다. “내가 꼭 구해줄 테니까 너무 살찌지 마, 잡아먹혀.”

 

 

 

 

걸핏하면 칭얼거리기 좋아하던 철없는 치히로의 모습은 이제 온데간데없다. 든든한 보호자였던 엄마, 아빠가 자신이 구해주지 않으면 언젠가 잡아먹힐 돼지로 변해 있다.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엔 너무 벅찬 미션이 눈앞에 있다. 어떻게 엄마, 아빠를 구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구하지 않으면 엄마아빠가 죽는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더욱 슬픈 것은 엄마, 아빠가 매일매일 보듬고 비비던 자식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 그들이 한때인간이었던 기억조차 잃어버렸다는 점이다.

 

 

 

 

치히로가 마음껏 슬퍼할 틈도 주지 않고 하쿠는 마녀 유바바의 지배전략을 일러준다. “치히로. 유바바는 누구든 이름을 뺏어서 지배해. 센인 척하고 진짜 이름은 숨겨. 이름을 뺏기면 돌아가는 길을 모르게 돼.” 하쿠를 바라보는 센의 눈빛이 반짝인다. 길 잃은 센에게, 이 끝을 알 수 없는 여행의 유일한 안내자가 되어준 하쿠의 표정이 우울해진다. “난 아무리 생각해도 내 이름이 생각 안 나. 하지만 놀랍게도 치히로란 이름은 까먹지 않았어.” 하쿠는 센이 된 치히로에게 먹을 것을 건네준다. 센은 돼지가 되어버린 부모님 얼굴을 떠올리니 입맛조차 없는지 풀 죽은 목소리로 거절한다. “힘낼 수 있게 밥에 주문을 걸었어, 먹어봐.”

 

 

 

 

먹을 것을 뱃속에 집어넣고서야 배고픔을 깨달은 센. 이 배고픔과 이 맛은 이 모든 당혹스런 현실 속에서 그녀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육체적 증거다. 더 이상 자신을 보살필 수 없는 엄마, 아빠의 존재를 확인하고 나서야,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엉엉 우는 센. 그녀는 자기 앞에 부과된 소명을 이제 완전히 받아들인다. 물러설 곳이 없다면 맞서는 수밖에 없다. 더없이 힘겨운 불행이 찾아온 그날, 더없이 아름다운 인연도 시작된다. 이제 센과 하쿠는 서로에게 소중한 친구이자 멘토가 된다.

 

 

 

 

센은 대형 욕탕 당번으로 배정되어 열심히 청소를 하기 시작한다. 센은 비오는 날 문밖에 서서 하염없이 어슬렁거리는 얼굴 없는 귀신 가오나시를 만난다. 센은 그가 누군지 알 수 없지만 비를 맞고 서 있는 처량한 모습이 딱해 말을 건다. “거기 있으면 비를 맞잖아요? 문을 열어두고 갈게요.” 친절한 센이 열어놓은 문틈으로 초대받지 못한 귀신 가오나시가 숨어 들어온다. 목욕탕에 급수하는 법을 어렵게 배운 센은 영차영차 목욕탕에 온천수를 공급한다. 그때 목욕탕의 첫 손님으로 오물신이 등장한다. 모두들 그 엄청난 냄새와 더러움에 구역질을 참지 못하며 오물신을 내치려 한다. 오물신을 받아들였다간 목욕탕 전체가 오염될 것만 같다. “슈퍼 울트라 초대형 오물신입니다.”

 

 

 

 

유바바는 손님이니 어쩔 수 없다며 초짜 종업원 센에게 오물신의 시중을 맡겨버린다. 입문자에게 주어지는 혹독한 신고식이다. 모두 오물신을 피해 도망가 버리고 센은 외롭게 혼자 남아 오물신의 시중을 들어야 할 판이다. 센은 우여곡절 끝에 가마 할아범과 가오나시의 도움을 받아 최고급 약수를 초특급 오물신에게 제공한다. 센은 엄청난 냄새와 오염물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물신을 시중들다 그의 몸에 깊이 꽂혀 있는 가시를 발견한다. 유바바는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센에게 말한다. “그분은 오물신이 아냐. 이 밧줄을 써라.” 좀처럼 빠지지 않는 커다란 가시를 빼내느라 이제 목욕탕의 모든 종업원이 힘을 모아야 할 차례이다. 유바바의 지휘 아래 센이 앞장서고, 모든 종업원이 밧줄을 끌어당기기 시작한다. “목욕탕 일동 마음을 모아서 당겨! 영차! 영차!”

 

 

 

 

센에게 인간의 구린내가 난다며 그녀를 멀리하던 종업원들, 그들은 모두 함께 힘을 합쳐 손님의 몸에 박힌 가시를 빼낸다. 공동체의 소중함, 함께한다는 것의 소중함을 깨닫는 센. 드디어 오물신인 줄로만 알았던 강의 신의 멋진 위용이 드러난다. 강의 신은 인간들의 부주의로 더럽혀지고 상처입은 자연의 알레고리가 아닐까. 자신의 본래 모습을 찾아준 센에게 강의 신은 밤톨만한 경단을 주며 고마움을 표시한다. 센으로 인해 원래 모습을 찾은 강의 신은 통쾌하게 웃으며 하늘로 날아간다. 마녀 유바바는 싸늘한 시선을 거두고 센을 마음껏 칭찬해준다. “, 잘했어. 큰 이익을 봤어. 이름 있는 강의 주인이야. 모두 센을 본받아라!” 유바바 월드의 첫 번째 미션을 성공적으로 마치는 센. 이제는 그녀를 아무도 무시하지 않는다. 그녀는 처음으로 낯선 공동체의 엄청난 텃세를 뚫고, 자신을 박대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시간의 장은 곧 슬픔의 장이다. 모든 삶은 슬픔으로 가득하다. 정말 그렇다. 여러분이 슬픔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한다면, 여러분은 그 슬픔을 다른 어디론가 옮겨놓기만 하면 된다. 삶은 슬픔으로 가득하다. 그런 삶과 함께 어떻게 더불어 살아갈 것인가? 여러분은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영원을 자각한다. 여러분은 해방되고, 또 그런 한편으로 다시 속박된다. 여러분은-바로 여기서 아름다운 공식이 나오는데-“이 세상의 슬픔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한다.” 여러분은 게임을 하는 것이다. 상처를 입을 수도 있지만, 여러분은 자신이 어떤 손상이나 성취조차도 초월하는 장소를 발견했음을 알고 있다. 여러분은 바로 거기에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조셉 캠벨, 다이앤 K. 오스본 편, 박중서 역, 신화와 인생, 갈라파고스, 2009, 171.

 

 

치히로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온몸으로 이해한다. 그녀는 시간의 장을 떠나왔지만 영원의 바다 위에 표류하기 시작했음을. 그녀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슬픔을 긍정함으로써 시간의 차원 안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영원의 차원으로 진입한다. 이 혹독한 입문식은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 또 하나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통과의례의 모델이다. 부모님은 돼지로 변해버렸고 나는 원래의 내 시공간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구루영혼의 스승를 만났다. 내가 미처 투시하지 못했던 내 안의 어둠을 밝혀줄 영혼의 친구 하쿠를. 너와 함께라면 이 슬픔의 시간을 견딜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녀는 치히로를 죽여 센을 얻었고, 부모님과 생이별하여 다시 없을 멘토를 얻었다. 이제 영원의 품 안에서 시간의 춤을 출 마음의 악보가 필요하다. 이제 슬픔의 악보를 연주할 기쁜 춤의 리듬이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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