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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시네필 다이어리,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조셉 캠벨[너를 찾으러 가는 길 끝에서 ‘나’를 발견하다] - 2. ‘미션 임파서블’과의 조우: 내 안의 중심을 잃어버릴 때, 여행은 시작된다 본문

책/철학(哲學)

시네필 다이어리,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조셉 캠벨[너를 찾으러 가는 길 끝에서 ‘나’를 발견하다] - 2. ‘미션 임파서블’과의 조우: 내 안의 중심을 잃어버릴 때, 여행은 시작된다

건방진방랑자 2021. 7. 25. 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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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미션 임파서블과의 조우: 내 안의 중심을 잃어버릴 때, 여행은 시작된다

 

 

제 막내아들 녀석이 스타워즈를 스무 번 아니면 서른 번쯤 본 것을 알고는, 제가 너 그 영화를 왜 그렇게 많이 보느냐고 물었습니다. 녀석 대답이, “이유는 아빠가 평생 구약성서를 읽는 것과 같지, 였습니다. 그러니까 제 막내아들은 새로운 신화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빌 모이어스, 이윤기 역, 신화의 힘, 이끌리오, 2002, 54.

 

 

만약 인어공주가 바다를 떠나 왕자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웬디가 피터팬을 따라가지 않았더라면, 포르도가 반지원정대와 함께 길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안락하게, 이미 주어진 시스템 속에서 살아갈 수는 있었겠지만, 우리의 유년을 풍요롭게 만들어준, 언제든 기억의 서랍 속에서 꺼내볼 때마다 가슴 떨리는, 아름다운 이야기의 주인공은 될 수 없지 않았을까. 끊임없이 영화나 드라마로 리메이크되는 옛이야기나 판타지물들은 저마다 드라마틱한 영웅서사의 플롯을 갖추고 있다. 이 영웅의 내러티브는 성인군자나 위인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잠자고 있는 통과의례의 원형이다. 센과 치히로의 모험의 도입부 또한 이런 영웅의 전형적인 모험의 서사를 품고 있다. 치히로는 헐리웃 블록버스터식 슈퍼히어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내면에 웅크린 채 잠들어 있는 어린 소녀를 깨워낸다.

 

 

 

 

치히로는 엄마, 아빠와 함께 이사를 가던 중 길을 잘못 짚어 낡은 터널을 지나게 된다. 자동차 뒷자석에 누워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엄마, 아빠에게 심심하면 칭얼거리는 평범한 어린 소녀 치히로. 그녀는 낯선 학교로 전학 가기가 싫어 심술이 잔뜩 난 상태다. 터널 저편에 어떤 세계가 있을까, 호기심이 일긴 하지만 아직은 새로운 세계가 마냥 두렵다. 엄마, 아빠와 함께 터널 저편으로 걸어가자, 폐허가 된 테마파크처럼 보이는 거대한 공터가 나타난다. 아버지는 무서워하는 치히로에게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가지라는 듯,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한껏 잘난 척을 한다. “이건 테마파크 잔해야. 90년대 초 우후죽순같이 생기더니 거품경제 때문에 전부 망했지. 그 중 하나일 거야.” 그러나 왠지 괴기스럽고 음산한 분위기가 감도는 공터의 분위기가 싫어, 치히로는 빨리 돌아가자고 한다.

 

 

 

 

이때 아버지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유혹의 손길이 다가온다. “맛있는 냄새가 나는 걸!” 모퉁이를 돌아보니 음식점들이 빼곡히 도열해 있다. 주인도, 종업원도 없는데 음식 냄새의 유혹을 참지 못해 허겁지겁 먹기 시작하는 아빠와 엄마. “주인 오면 그때 돈 내지 뭐!” “그러지 뭐! 정말 맛있어. 너도 먹어봐.” 부창부수(夫唱婦隨)로 죽이 잘 맞는 엄마, 아빠는 치히로의 마뜩찮은 표정은 전혀 개의치 않고 마구 음식을 먹어댄다. 불안해진 치히로는 엄마, 아빠를 설득한다. “돌아가, 주인이 화낼 거야.” 아빠는 음식 맛에 취해 이미 정신이 없다. “괜찮아. 아빠가 있으니까. 카드도 있고 지갑도 있어. 너도 어서 먹으렴!” 게걸스레 주인 없는 음식을 먹어치우는 어른들의 탐욕에 놀란 치히로는 혼자 되돌아가겠다며 음식점을 나선다. 하지만 혼자서 돌아가기가 무서워진 어린 소녀 치히로는 다시 엄마, 아빠에게 돌아오는데.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엄마, 아빠의 얼굴이 돼지로 변해버린 것이다. 말도 안 돼, 이건 꿈일 거야, 빨리 깨어나자, 치히로는 스스로를 다그치지만 본래의 엄마, 아빠는 어디에도 없다.

 

 

 

 

공포에 질려 엄마, 아빠에게서 도망치는 치히로 앞에 낯선 소년이 나타난다. 치히로를 보자 깜짝 놀란 소년이 외친다. “여긴 오면 안 돼! 어서 돌아가! 곧 어두워져, 그전에 돌아가!” 엄마, 아빠는 돼지로 변하고, 난생 처음 보는 아이는 이곳은 출입 금지야라는 메시지를 다급하게 보내고, 돌아가는 길은 알 수 없어져버린 치히로. 겁에 질려 정신을 잃을 지경인 치히로의 손을 잡고 소년은 일단 달린다. 그러나 허둥지둥하는 동안 이미 해는 져버리고, 낯선 소년은 치히로에게 무언가를 먹이려 한다. “입 벌려. 이걸 빨리 먹어. 이 세계의 것을 안 먹으면 넌 사라져.” 치히로는 도리질하지만 소년의 눈빛에서 진심을 읽어낸다. 모든 게 꿈이라고 믿고 싶지만 목구멍을 넘어가는 음식의 뻣뻣한 질감을 느끼며 비로소 이게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지만 설마 엄마, 아빠가 돼지로 변한 것은 아니겠지,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닐까. “우리 부모가 돼지로 변한 건 아니지?” 소년은 전혀 놀라지 않고, 이 세계에서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듯, 소녀를 위로한다. “지금은 힘들지만 꼭 만나게 돼.”

 

 

 

 

소년은 이곳이 인간에게 금지된 구역이며 유바바라는 마녀가 지배하는 영토임을 알려준다. 여기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조건 일을 해야 한다고. 가마 할아범을 찾아가 일을 시켜달라고 부탁하라고, 힘들어도 참고 기회를 기다리라고. “그분께 일하고 싶다고 부탁해. 거절해도 끝까지 졸라. 일 안하면 유바바가 너를 동물로 만들 거야.” 소년의 말은 하나같이 알아듣기 힘들지만 치히로는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자신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엄청난 시련이 닥쳐왔으며 이 혼란스러운 미궁을 지금은 결코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이 세상의 가장 편안한 울타리였던 부모님에게도, 이사 오기 전의 그리운 친구들에게도 연락할 수 없다. 게다가 이 소년은 나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내 이름을 부른다. “치히로. 내 이름은 하쿠야. 난 널 알아.” 우리는 정말 만난 적이 있었던 걸까. 의지할 곳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세계에서 이 소년만은 이상하게 낯설지 않다. 나처럼 어리고 작지만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의 비밀을 알아버린 듯한, 서늘하면서도 외로운 인상을 풍기는 이 소년은, 마치 어떤 소중한 메시지를 전달하러 날아온 전령 같다. 치히로 앞에는 어떤 모험이 기다리고 있을까.

 

 

영웅의 여정은 항상 부름으로 시작된다. 인도자는 이런저런 방식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아라. 너는 지금 잠든 땅에 있다. 깨어나라. 여행을 떠나라. 저곳에 너의 의식의, 또한 너의 존재의 온전한 측면이 있건만, 아직 한 번도 손댄 적이 없었다. 그러니 너는 여기서 그냥 머물 것이냐?” (……) 그렇게 해서 여정이 시작된다. 모험에의 소명(부름)을 알리는 전령관 혹은 고지자는 어둡고, 징그럽고, 무섭고, 세상의 버림을 받은 존재인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 소명에 다르면, 낮의 장벽을 통과해 보석이 빛나는 밤으로 가는 길이 열린다. 부름은 곧 어떤 사회적 지위로부터 떠나라는, 즉 여러분 자신의 외로움 속으로 들어가 보석을 찾으라는, 즉 여러분이 사회적으로 속박되어 있을 때에는 찾기가 불가능한 것을 찾으라는 것이다. (……) 영웅이 뭔가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고, 그걸 찾으러 갈 때, 그게 바로 출발인 것이다. 여러분은 문턱을 넘어 새로운 삶으로 나아간다.

-조셉 캠벨, 다이앤 오스본 편, 박중서 역, 신화와 인생, 갈라파고스, 2009,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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