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센의 딜레마 vs 유바바의 딜레마
여러분의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모든 비판을 미루어 두어야 한다. (……) 비판을 미루어두는 것은 이른바 ‘너는 할지니’라는 용을 죽이는 것이다. 그놈을 죽여 버려라. 우선 글을 쓰도록 하라. 비평가는 잊고 그저 쓰기만 하라. 비판적 요소를 끌어안고 문장을 다듬는 것은 그 다음에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누가 과연 이런 걸 보려고 하겠어?” 하는 생각 때문에 괴로울 수도 있다. 그러면 여러분의 주장에 대해 공감할 만한 사람을 떠올린 다음, 그 사람을 위해 글을 쓰라.(……) 가령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한 소녀를 위해 쓴 것이었다.
-조셉 캠벨, 박중서 역, 『신화와 인생』, 갈라파고스, 2009, 386쪽.
센은 하쿠를 구하러 가고 싶지만 수퍼베이비 ‘보’는 좀처럼 센을 놔주지 않는다. 아기는 원하는 것을 손에 넣지 못했던 적이 없으므로, ‘센’이라는 새로 생긴 ‘장난감’도 결코 놓치지 않을 심산이다. “네가 가면 내가 울 거고, 울면 엄마가 널 죽여. 네 팔을 부러뜨릴 거야.” 센의 가느다란 팔을 콱 깨무는 아기(라고 하기엔 너무 커다란!). 타자와의 아무런 접촉이 없었던 아이의 폐쇄적인 성격이 드러난다. 이쯤 되면 후천적인 자폐 상태로 키워지는, 그리하여 타자에 대한 배려를 전혀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 떠오른다. ‘소황제(小皇帝)’라 불리며 오직 자기를 중심으로 우주가 돌아가야 마음이 놓이는 아이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사랑’의 이름으로 자식을 지배하고 독점하며 통제하는 어른들의 욕심 사나운 얼굴도 떠오른다. 센은 아기에게 물린 팔이 너무 아파 비명을 지른다. “아야, 아파! 나중에 와서 놀아줄게.” “지금 놀아줘. 봤지, 이건 피야!” 그때 피투성이로 몸부림치는 하쿠가 나타나자 센은 아기를 뿌리치고 하쿠에게 달려간다. 아직도 ‘용’의 모습을 한 채로 숨도 제대로 못 쉬는 하쿠.
하쿠를 돌보는 센에게 아직도 칭얼거리며 보채는 수퍼베이비. 이 못 말리는 아기를 혼내키는 어른의 목소리가 들린다. “조용히 좀 하거라!” 분명 유바바의 얼굴인데 갑자기 유바바가 인자하고 상냥해진 것 같다. 게다가 유바바의 얼굴을 한 이 할머니는 아기를 처음 보는 것 같다. “넌……. 꽤나 뚱뚱하구나!” 아기는 “엄마!”라고 소리 지른다. “엄마랑 나도 구별 못 하느냐?” 알고 보니 이 할머니는 유바바의 쌍둥이 언니인 제니바다. 제니바는 도저히 달랠 수 없는 이 골칫덩이 아기를 우선 작은 생쥐로 만들어버린다. “움직이기 좀 불편할 거야.” 생쥐로 변한 아기는 이제야 좀 잠잠해지고 귀여워졌다.
알고 보니 절대 권력자 유바바에게도 약점이 있다. 그녀의 약점은 바로 쌍둥이 언니 제니바와의 불화다. 그리고 자라지 않는 수퍼베이비 또한 유바바의 기쁨이자 슬픔이다. 자신을 괴롭히던 심연의 핵심에 점점 가까이 다가가는 센. 자신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모르고 그저 주어진 미션에 충실해야 했던 센은 점점 그들을 둘러싼 운명의 덫, 그 심연의 중심을 향해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어쩌면 센은 이 미궁을 빠져나갈 수 있는, ‘아리아드네의 실’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제니바는 유바바와 똑같은 외모지만 왠지 유바바보다 훨씬 인정 많고 지혜로운 분위기를 풍긴다. 그런 제니바가 센에게 말한다. “그 용을 나한테 넘겨.” 센은 화들짝 놀란다. “하쿠를 어쩌게요? 크게 다쳤어요.” 제니바는 그제야 하쿠가 다친 이유를 설명해준다. “내 동생의 부하인데 도둑 용이야. 그 용은 내 집에서 귀중한 도장을 훔쳤어.” 센은 도리질한다. “하쿠는 착해서 아무 것도 훔치지 않아요.”
제니바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한다. “용들은 다 착하고 어리석어. 하쿠는 마법의 힘을 얻으려고 동생의 제자가 됐어. 욕심쟁이 동생이 시키면 뭐든지 할 아이야.” 이것이 ‘용’의 양면성이다. 용은 착하고 우직하지만 ‘누구’의 지배를 받는가에 따라 완전히 다른 운명에 처한다. 제니바는 마음의 준비가 된 듯 센을 물리치려 한다. “비켜! 이 용을 돕기엔 늦었어. 도장에는 주문이 걸려 있어. 훔친 자는 죽게끔 말이야.” “안돼요!” 자신을 둘러싼 가혹한 운명에 어쩔 수 없이 순응하던 센은 이제 운명에 맞서 싸우기 시작한다.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센은 우선 자신과 부모를 구해야 한다는 의무도 어느새 뒷전으로 미루고 자신이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미션까지 도맡게 된다. 아무도 강제하지 않은 일, 하쿠를 구하는 일은 이제 그녀의 최대 과제가 되었다.
센은 하쿠를 대장장이 할아범에게 데려가 살려달라고 부탁한다. 할아범은 하쿠에게 온갖 약초를 먹이지만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몸 안의 뭔가가 생명을 집어삼키고 있어. 너무 강력한 마법이야. 난 손을 못 쓴다.” 다급해진 센의 머릿속에 불이 켜진다. 마지막 수단이다. 그리고 그녀가 이 무서운 유바바 월드에서 빠져나갈 유일한 탈출구, 바로 강의 신이 준 경단이다. “하쿠. 강의 신이 준 경단이야. 들을지 몰라. 먹어봐. 하쿠, 입 벌려봐 하쿠, 제발 먹어!” 센의 부모님을 구할 경단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하쿠는 온 힘을 다해 경단을 거부하고, 센은 자기 몸보다 다섯 배는 큰 하쿠를 끌어안고, 온 힘을 다해 경단을 먹이려 한다. 그 순간 부모님을 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상념 따윈 떠오르지 않는다. 하쿠에게 억지로 경단을 먹이자 드디어 하쿠의 몸속에서 검은 마력의 기운이 스르륵 풀려 나온다. 제니바의 도장이 튀어나온 것이다. “됐어, 나왔다 도장! 도망친다, 저기!” 강의 신이 준 경단의 위력은 엄청나다. 하쿠가 삼킨 제니바의 도장과 함께 강력한 마법도 함께 사라진 듯하다.
센은 대장장이 할아범에게 말한다. “유바바의 언니 도장이에요.” 할아범은 놀란다. “마녀의 계약도장? 이런 귀한 것을!” 유바바와 제니바는 동전의 양면처럼, 도플갱어처럼, 서로 같고 또 다른 길을 걸어간다. 유바바는 온천을 통해 거대한 부를 축적하고 마법을 이용하여 인간의 이름을 빼앗아 지배하지만, 제니바는 마법을 이용하여 자신의 부를 축적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고 물레질을 하며 작은 오두막집에서 자신의 노동으로 살림을 꾸려나간다. 유바바가 마법을 ‘권력’을 위해 사용한다면, 제니바는 고통받는 타인의 ‘치유’를 위해 사용한다. 유바바와 제니바의 관계는 『반지의 제왕』의 간달프와 사루만의 관계와 비슷하다. 간달프가 절대반지의 무서운 힘을 ‘해방’시키는 데 주력했다면, 사루만은 그 절대반지를 오직 자신만의 것으로 ‘독점’하려 몸부림치다가 파멸한다. 유바바가 하쿠를 시켜 훔친 제니바의 도장은 바로 절대반지와 유사한 기능을 한다. 주인이 누구인가에 따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세계를 해방시킬 수도 있고 세계를 파멸시킬 수도 있는.
센에게서는 이제 나약한 소녀의 이미지는 전혀 찾을 수 없다. 그녀는 이제 누구의 말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마음에 난 오솔길을 따라 조용히 걸어가도 그 길이 가장 옳은 길임을, 자신도 모르게 깨달은 듯하다. 하쿠가 정말 도장을 훔쳤는지도 알 수 없고, 강의 신이 준 경단이 과연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엇보다 강의 신이 준 경단은 부모님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인데도, 그녀는 하쿠를 구한다. 타인의 도움 없이는 하루도 버티지 못할 것 같은 치히로가 유바바 월드의 일상 전체를 바꾸어 놓는, 죽어가는 하쿠를 구하는 존재로 아름답게 비상한다. 유바바에게 절대복종함으로써 일사불란하게 굴러가던 이 거대한 세계는 센으로 인해 곳곳에 ‘틈새’가 생겼다. 센으로 인해 늘 문 밖에서 서성이던 외부자 가오나시가 잠입했고, 센으로 인해 수퍼베이비가 귀여운 생쥐로 변신했으며, 센으로 인해 하쿠의 운명과 유바바의 운명이 바뀌고 있다. 사실 센에게는 ‘부모님을 살릴 것인가’ vs ‘하쿠를 살릴 것인가’를 두고 저울질할 ‘틈’이 없었다. 하쿠는 눈앞에서 죽어가고 있었고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운명의 짐짝을 잊었다. 그녀는 하쿠와 자신을 더 이상 분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센이 하쿠였고 하쿠가 센이었다. 사람들은 이런 감정을 ‘사랑’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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