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주인이 돌아올 때를 알지 못하니 깨어 있으라”
고통에 지쳐버린 사람들은, 혹은 작은 고통에도 쉽게 절망하는 사람들은, 가능한 한 고통을 빨리 없애고자 한다. 고통을 제거해야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다는 인간의 오랜 믿음을, 니체는 거부한다. 니체가 말하는 초인, 그는 이미 충분히 존재하는 고통을 더 높은 강도로, 더 힘겨운 것으로 부풀린다. 주어진 위험을 오히려 극대화하는 자, 이미 넘쳐나는 고통을 천 배로 부풀리는 자, 그리하여 불행을 기꺼이 짊어진 채 불행을 샅샅이 해부하고 마침내 불행을 영혼의 창조에 이용하는 용기를 지닌 자, 그가 바로 초인이다. 불행을 피하는 데 급급한 인간들이 추구하는 안락함, 그것은 니체가 보기에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인생의 ‘종말’이다. 현재의 불행은 단지 미래의 고통에 대비하기 위한 예방주사가 아니라, 영혼의 힘을 길러주는 창조적 긴장이다. 고통을 거부하는 자들이 도망쳐 가는 가장 흔한 도피처, 그곳은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세상’이 존재한다는 믿음이다.
아, 형제들이여, 내가 꾸며낸 이 신은 다른 신들이 모두 그러하듯이 사람들이 만들어낸 작품에 불과하고 망상에 불과했다. (……) 아무 것도 더 이상 바라지 못하는 저 가련하고 무지한 피로감. 이 피로감이 온갖 신을 꾸며내고 저편의 또 다른 세계를 꾸며낸 것이다.
-니체, 정동호 역,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 2002, 47쪽.
이 세계가 아닌 저 세계를 강조하며 이 세계의 고통을 합리화하는 사람들, ‘다음 세상에는 천국이 펼쳐질 테니, 지금의 고통을 묵묵히 인내하라’고 외치는 사람들, 너희가 고통스러운 것은 너희의 죄 때문이라고 외치는 사람들. 예를 들어 성경의 등 뒤에 숨어 현재의 속물적인 삶을 합리화하는 사람들. 평일에는 바지런히 타인의 삶 위에 군림하다가 ‘주일’에는 교회에 나가 ‘회개’함으로써 그 모든 만행을 말끔히 씻어낼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쇼생크 탈출』의 우두머리 노튼 소장은 그런 인물의 전형이었다. 그는 죄수들의 방을 불시 검열하다가 앤디의 방에 성경이 있는 것을 보고 무척이나 흐뭇해한다. 좋아하는 성경 구절이 있는지 묻는 노튼 소장에게 앤디는 대답한다. “주인이 돌아올 때를 알지 못하니 깨어 있으라.” 언제나 ‘그날’이 온 듯이 사는 앤디, 언제나 ‘그날’이 바로 지금인 듯이 사는 앤디에게는 이 문장이 더없이 잘 어울린다. 노튼 소장은 자신이 좋아하는 문장을 말하며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나는 이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그는 마치 이 세상의 빛이 자기 자신인 양 거들먹거린다. 자신을 잘만 따르면 마치 저 세상의 천국으로 입장하는 암표를 발급받을 수 있다는 듯. 현실의 삶으로 빛을 만들지 못하는 노튼은 성경의 빛에 의탁하여 도무지 빛나지 않는 자신의 삶을 빛내보려 한다. 사실 노튼의 속셈은 불시 검열을 핑계로 앤디의 의중을 떠보려는 것이었다. 신출귀몰한 세무 능력을 지닌, 과거의 은행 부지점장 앤디의 ‘이용가치’를 고민하는 노튼 소장. 그는 앤디의 방에 있던 성경을 무심코 가져가려 하다가 앤디에게 돌려준다. “이걸 뺏어서는 안 되지. 이 안에 구원이 있으니까.” 카메라는 앤디의 손때가 묻은 오래된 성경을 의미심장하게 비춰주고, 앤디의 눈빛은 이날따라 달빛을 비춘 칼날처럼 시리게 빛난다. 성경 안에 있는 구원, 그것은 노튼 소장에게는 ‘말씀의 빛’이었겠지만, 앤디에게는 ‘말씀 이상의 무엇’이었고, 이 비밀은 영화의 후반부에 밝혀진다.
자신의 재산을 부풀리는 데 앤디를 이용하기로 결심한 노튼 소장은 앤디를 쇼생크 감옥 도서관의 조수로 배치한다. 앤디의 잡무를 덜어주고 좀더 ‘손쉽게’ 앤디를 곁에 두고자 하는 속셈이었다. 도무지 ‘할 일’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쇼생크 감옥 도서관의 일인 사서이자 관장은 30여 년 동안 ‘죄수들의 독서’를 담당했던 터줏대감 브룩스였다. 브룩스는 30여 년 동안 혼자서 해도 충분했던 이 일에 ‘조수’를 붙여준 노튼 소장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한다.
도서관 업무보다도 밀려드는 간수들의 ‘재정 상담’에 바빠진 앤디는 비로소 노튼 소장의 의중을 눈치채기 시작한다. 소장보다 더 잽싸게 앤디의 능력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발 빠른 간수들이었다. 자녀교육 신탁예금을 계획하려는 간수에게 앤디는 묻는다. “아들을 보내고 싶은 대학이 어딥니까? 하버드입니까, 아니면 예일입니까?” 간수들은 앤디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왔지만 감옥의 간수 월급으로는 꿈도 꾸지 못할 대학을 금방이라도 보내줄 것만 같은 앤디의 듬직함에 환호작약한다. 이제 간수들은 물론 소장조차도 앤디를 무시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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