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내가 아닐 때, 가장 나답다?
저는 한 번도 제 개인의 정체성을 깨달았던 적이 없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제 자신이 무언가가 진행되고 있는 장소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든지 ‘나를’과 같은 것은 없습니다. 우리들 각자는 사건이 일어나는 일종의 교차로입니다.
-레비 스트로스, 임옥희 역, 『신화와 의미』, 이끌리오, 2000, 16쪽.
나비족의 여전사 네이티리는 평화로운 판도라를 침입한 외부자 제이크를 죽이려 하지만 불현듯 그를 죽여서는 안 된다는 계시를 느끼고 차마 제이크에게 활을 겨누지 못한다. 나비족의 여신 ‘에이와’의 계시는 그녀를 비롯한 모든 부족민들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 네이티리는 나비족 전체를 소집한 부족회의에서 제이크가 정말로 ‘에이와의 계시’에 적합한 인물인지 결정하기로 한다. 의심과 호기심이 반반 섞인 얼굴로 제이크를 나비족의 모임 장소로 데려가는 네이티리. 미묘한 적의와 야생적 관능이 동시에 깃든 네이티리를 묵묵히 따라가며 제이크는 가슴이 두근거린다.
나비족 전체가 모인 회의에서 제이크의 생사 여부가 판가름 나는 순간이 다가온다. 모두가 낯선 이방인의 침투를 달가워하지 않는 분위기이지만, 네이티리의 어머니이자 부족의 치유자역할을 하는 ‘모앗’만이 제이크를 살려두고 지켜보자고 말한다. 네이티리는 제이크의 개인 교습을 맡아 나비족의 문화와 야생의 밀림에서 살아남는 법을 가르쳐준다. 단지 ‘건강한 인간의 다리’를 얻기 위해 아바타 프로젝트의 일원이 된 제이크는 난데없는 스파르타 훈련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네이티리의 훈육은 나비족의 언어와 문화는 물론 야생의 삶에 적응하기 위한 온 몸의 감각구조 자체를 바꾸는 맹훈련이었던 것이다.
마지못해 아바타 프로그램에 투입된 제이크의 눈에서는 어느새 싱싱한 활기가 돌기 시작한다. 점점 더 ‘아바타에 링크되는 시간’, 즉 꿈꾸는 시간이 현실의 시간보다 매혹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아바타의 꿈속에서 그는 불편한 다리도, 형의 갑작스런 죽음도, 복잡한 세상사도 모두 망각하고 자신도 모르게 나비족의 푸른 꿈을 이식 당한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걱정스런 ‘세뇌’이겠지만 나비족의 입장에서는 바람직한 ‘동화’다. 지옥보다 더 지옥 같다는 루머의 진원지 판도라는 알고 보니 더 없이 매혹적인 비밀로 가득한 꿈의 놀이터였다.
제이크가 ‘아바타의 꿈’에서 깨어나면 삭막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 아바타 제이크처럼 마음대로 걸을 수도 없고 자신의 의지대로 미래를 계획할 수 없는, 꼭두각시 신세. 그는 점점 네이티리와 함께 하는 아바타 체험, 아니 나비족-되기의 시간이 현실보다 더욱 현실 같은 생생함으로 자신의 세계관을 바꾸고 있음을 깨닫는다. 제이크와 함께 아바타 체험을 하고 있던 과학자 그레이스는 이런 제이크의 미묘한 감정 변화를 눈치 챈다. 그레이스는 제이크가 쿼리치 대령에게 ‘건강한 새 다리’를 구실로 매수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 모든 것을 눈감아준다. 지금까지 그녀와 함께 했던 그 어떤 과학자들보다 빠르게 아바타 훈련에 적응하는 제이크를 바라보는 그레이스의 눈길이 점점 따스해진다.
한없이 ‘적대적’이기만 했던 판도라의 밀림은 점점 매혹적인 신비와 풍요를 상징하는 암호로 변해간다. 제이크의 임무수행지역에 불과했던 판도라는 제이크에게 때로는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추억처럼 따스한 노스탤지어를, 때로는 인류가 잃어버린 낙원의 기억처럼 신비로운 감성의 놀이터로 변모해간다.
아마 레비스트로스도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이었던 원시부족의 문명탐험을 하며 이런 과정을 겪지 않았을까. ‘위험하다, 야만적이다, 무모하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온갖 주변의 걱정들을 뒤로 하고 그는 브라질 대륙의 마투그로수를 탐사하며 카두베오족과 보로로족의 원시 문명을 체험했다. 아마도 선뜻 나서지 않는 위험한 여정 속에서 그는 자신의 ‘상상력’이 부족한 것이 원시 부족 탐험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위험을 상상하는 능력을 떨어졌기에 닥쳐올 위기를 모르고 지나친 것이 오히려 원시 문명 탐험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에리봉: 탐사 기간을 잘 견뎌내자면 상당한 용기와 육체적인 건강이 필요했을 텐데요. 당신은 접근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곳을 말을 타고 가거나, 강을 건너거나, 카누로 여행하는 등의 이야기를 『슬픈 열대』에서 하고 있더군요.
레비스트로스: 젊을 때는 누구나 그 정도 난관은 다 견뎌내죠.
에리봉: 그렇지만 당신 책을 읽으면서 난관을 헤쳐 나가는 당신의 힘이 각별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레비스트로스: 그렇진 않을 거예요. 하지만 병에 걸리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때 난, 내가 살아오는 동안 흔히 그랬듯이, 상상력의 결핍 덕을 톡톡히 봤죠.
에리봉: 위험에 대한 무감각 말인가요?
레비스트로스: 바로 그렇지요.
-디디에 에리봉 대담, 송태현 역,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 강, 2003, 40쪽.
레비스트로스는 신화를 구성하는 복잡한 코드의 조합을 발견해 그것들의 상호관계를 밝혀냈습니다. 신화는 다른 신화로 계속 모습을 바꾸어 변형해 가는데, 그 변형은 라벨이 작곡한 ‘볼레로’와 같은 걸음걸이로 진행됩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스스로 이 ‘볼레로’의 걸음걸이를 뒤쫓으며, 몇 백 개에 달하는 신화가 하나의 거대한 우주를 이루고 있는 모습을 묘사해냈습니다.
-나카자와 신이치, 김옥희 역, 『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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