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샤헤일루와 미메시스와 브리콜라주
고고학은 수만 년 동안 현생인류의 마음의 구조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는 것을 밝혀왔다. 인류의 마음 밑바닥에는 야생의 꽃이 피는 들판이 지금도 존재하는 것이다.
-나카자와 신이치, 김옥희 옮김, 『대칭성 인류학』, 동아시아, 2005, 323쪽.
이 전쟁에 지더라도 ‘배신자’ 제이크만은 확실히 처단할 태세인 쿼리치 대령은 사력을 다해 제이크에게 돌진한다. 쿼리치는 ‘아바타’와 ‘원본’ 사이의 링크를 끊어버리고 원본의 제이크마저 판도라의 유독가스에 노출시켜 죽이려 한다. 제이크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 네이티리는 목숨을 걸고 쿼리치에 맞서 그를 죽이는 데 성공한다. ‘아바타’의 링크가 끊어졌지만, 네이티리는 ‘원본’인 제이크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한 낯선 얼굴을 본능적으로 알아본다.
그가 나의 제이크임을, 그가 나의 운명임을 알아본 네이티리는 다시 한 번 부족의 샤먼이자 어머니인 ‘모앗’의 힘을 빌려 더 이상 ‘아바타’가 아닌 이제는 원본 그 자체인 ‘나비족의 전사 제이크’를 살려낸다. 그 순간 네이티리는 죽어가는 예수를 품에 안은 마리아처럼 처연한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네이티리의 사랑으로 인해, 아니 나비족 전체의 기도와 믿음으로 다시 태어난 제이크. 이제 ‘인간의 육체’를 벗어던진 제이크는, 인간의 육신으로서의 제이크가 죽고 나비족으로 ‘부활’한 바로 그날을 평생 잊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나의 생일이다.”
마침내 인간들은 판도라의 ‘언옵타늄’을 포기하고 에너지 고갈 문제로 허덕이는 상처투성이 지구로 돌아간다. 하지만 인간들은 진심으로 나비족의 세계관에 동의한 눈치가 아니다. 나비족 ‘따위’에게 패배한 굴욕과 분노의 눈길은 이 초유의 전쟁이 잠시 휴전상태일 뿐임을 예고한다. 판도라처럼 머나먼 행성, 존재하지도 않는 행성까지 확장하지 않더라도 당장 현대인이 처한 자원 문제는 심각하다. 에너지 문제와 시장의 확장 문제로 인한 끝나지 않는 신제국주의의 행보는 영화 『아바타』의 총력전을 능가하는 처절한 장기전을 예고하는 것이 아닐까. 아직 빼앗길 것이 남아 있는 지구상의 모든 마이너리티들은 철저히 무방비상태의 또 다른 나비족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강자들은 언제든 갖은 명분을 조작하여 약자들을 원수로 만들고, 그들이 소중히 지켜온 ‘언옵타늄’을 빼앗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지구에 거주하지만 여전히 지구를 향하여 이방인인지도 모른다. 아직도 지구를 죽이지 않고 지구와 공존하는 방법을, 아니 지구를 비롯한 이 세계 전체의 거대한 시스템을 파괴하지 않고 그것과 교신하는 방식을 찾지 못한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희망은 그렇게 먼 곳에서 찾을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네이티리의 샤헤일루와 제이크의 미메시스.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한 영화감독의 머릿속에서 튀어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레비스트로스가 평생 동안 연구했던 ‘지구라는 별’의 온갖 신화들, 브라질 원시부족의 신화뿐 아니라 유럽이나 한중일의 신화 속에서도 발견되는 현생인류의 사유시스템이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화된 현대의 인간들은 점점 동물처럼 변해간다고들 말한다. 그런 경우의 동물이란 ‘가축화된 동물’을 뜻하므로, 결국 인간의 삶은 점점 가축의 삶과 비슷해지고 있다는 의미인 셈이다. 교육이나 미디어나 가정환경을 통해, 우리의 감각이나 사고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정한 관리 수준에 맞도록 길들여지고 있다. 따라서 자신의 감각이나 사고가 ‘야생’의 상태였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그러나 단지 잊었을 뿐, 그 야생은 생명과 연결된 무의식 속에 분명 여전히 살아 있다.
-나카자와 신이치, 김옥희 옮김, 『대칭성 인류학』, 동아시아, 2005, 322쪽.
신화적 사유, 혹은 대칭성의 사유는 아무리 작은 부분에도 전체를 투영하며, 그 어떤 대립과 불평등 속에서도 궁극적인 조화와 균형의 지점을 기어이 찾아내는 의지가 아닐까. 신화적 사유는 인간 조건을 침해하는 시간의 불가역성에 굴복하기를 거부하는 것, 타자에 대한 공감의 능력을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각자의 판도라를, 우리가 가진 모든 사유의 재료를 동원해 리메이크해내는 영혼의 교감능력이 아닐까. 레비스트로스는 바로 이 능력을, 우리 주변의 아주 사소하고 일상적인 재료들 속에서 우리 무의식에 여전히 생생히 살아 숨쉬는 신화적 사유를 발견해내는 힘을, ‘브리콜라주’라고 불렀다.
나는 『야생의 사고』에서 소위 원시인의 사고와 우리 현대인의 사고 사이에 간극이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주려 했어요. 우리 사회에서 상식을 벗어나는 이상한 신앙이나 관습을 목격할 때면, 사람들은 흔히 그것을 고대적 사고의 흔적 혹은 잔존이라고 설명하곤 했지요. 내가 보기엔, 그와 반대로, 이런 사고 형태들은 오늘날 우리 가운데도 여전히 현존해 있고 생존해 있습니다. (……) 나는 특유한 고유성을 지닌 사고방식의 예로서 브리콜라주를 제시했는데, 사람들은 그러한 사고방식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것이 무익하고 부차적으로 보이기에 고려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편이 옳겠지요. 그러나 사실은 그러한 사고방식이 정신 활동의 본질적인 메커니즘을 보여주고 있으며, 우리가 근대적 사고방식이라 믿는 것과는 거리가 먼 지적인 활동과 단도직입적으로 만나게 해줍니다. 사색의 영역에서, 신화적 사고는 브리콜라주처럼 실제적인 측면에서 작동합니다. 그것은 자연계를 관찰하면서 축적한 수많은 이미지들, 즉 동식물들과 그들의 서식 환경, 그들의 특징들, 특정 문화에서 그것들을 사용하는 이미지들을 활용합니다. 신화적 사고는 이러한 요소들을 결합해서 하나의 의미를 만들어냅니다. 이는 마치 작업거리가 생긴 브리콜뢰르(특정한 목적을 위해 준비된 연장이나 재료가 아닌 아무 것이나 사용해 자기 손으로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만드는 사람)가 가까이 있는 재료들을 사용해서 원래 의도했던 의미와는 다른 의미를 그 재료들에게 부여하는 것과도 같지요.
-디디에 에리봉 대담, 송태현 역,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 강, 2003, 172~1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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