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현(李齊賢)의 초명(初名)은 지공(之公), 검교정승(檢校政丞) 이진(李瑱)의 둘째 아들이다. 아버지 삼형제가 모두 문장으로 현달(顯達)한 문학세가(文學世家)에서 태어났다. 15세에 성균시(成均試)에 장원하고, 20대에 백이정(白頤正)을 사사(事師)하여 남먼저 정주(程朱)의 학(學)을 배웠다.
그러나 28세 때, 원(元) 나라에 머물고 있던 충선왕(忠宣王)의 특별한 부름을 받아 연경(燕京)으로 가게 되었으며, 그곳 만권당(萬卷堂)에서 충선왕(忠宣王)을 모시면서 요수(姚燧)ㆍ조맹부(趙孟頫)와 같은 당대의 석학들과 사귀어 학문의 깊이를 더할 수 있었다. 2년 뒤에 왕명(王命)으로 남촉(南蜀)에 주유(周遊)하게 되자 그는 가는 곳마다 시를 남기어 시인의 입에 오르내리게 했다.
33세 때에는 충선왕(忠宣王)을 따라 강남(江南, 浙江地方)으로 두루 여행을 하였으며 35세가 되던 해에는 토번(吐蕃)으로 귀양간 충선왕(忠宣王)이 타사마(朶思馬)로 이배(移配)하게 되어 왕을 만나러 1만 5천리의 장정(長征)을 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그의 인간과 문학의 폭을 크게 넓힐 수 있었으며, 이덕무(李德懋)가 말한 바와 같이, 중국에서 우리 선인(先人)의 족적(足跡)이 이렇게 넓은 지역을 편답(遍踏)하기도 처음 있은 일이 되었으며, 그 성예(聲譽)를 중국에서 자자(藉藉)하게 한 것도 최치원(崔致遠) 이후 처음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오랜 동안의 중국 생활을 통하여 그는 중국의 음률과 사곡(詞曲)을 익혀, 그 이전에도 시도된 일이 없었고 이후에도 변변한 작품을 창작해 내지 못한 사(詞)의 작가가 되기도 했다.
충선왕(忠宣王)의 특별한 지우(知遇)를 입은 그는 이후 오조(五朝)를 역사(歷仕)하는 동안 네 번이나 국상(國相)의 자리에 올라 안으로는 그릇된 정사를 바로잡기에 정(精)과 성(誠)을 다했으며, 밖으로는 원나라의 내정 간섭을 성신(誠信)으로 조정하여 고려왕조를 위기에서 구해 낸 것이 한두번이 아니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도 그는 임금이 인견(引見)을 청하면, 경사(經史)를 강론하고 치도(治道)를 진주(進奏)하여 세상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그러나 『고려사(高麗史)』에서 그를 가리켜 “성리(性理)의 학(學)을 즐기지 않은 까닭으로 정력(定力)이 없이 공맹(孔ㆍ孟)을 공설(空說)한다”고 한 것은 그가 불가(佛家)의 문자를 찬술(撰述)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폄척(貶斥)을 받은 것 같다.
이제현(李齊賢)의 모든 것은 그의 문생(門生) 목은(牧隱)이 그 묘지명(墓誌銘)에서 쓰고 있는 바와 같이 “이름이 온누리에 떨치고”, “도덕(道德)이 으뜸이요 문장의 정종(正宗)”이라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