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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의 장자수업, 프롤로그 - 바람이 붑니다, 이제 대붕의 등에 탈 시간입니다 본문

책/철학(哲學)

강신주의 장자수업, 프롤로그 - 바람이 붑니다, 이제 대붕의 등에 탈 시간입니다

건방진방랑자 2021. 5. 16.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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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로그

바람이 붑니다

이제 대붕의 등에 탈 시간입니다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그렇게 할 수 있는 권리나 지혜 혹은 덕도 없는 것들에 의해 감시되고, 사찰되고, 염탐되고, 지시받고, 법적 통제를 받고, 번호를 받고, 규제되고, 등록되고, 세뇌되고, 설교를 듣고, 통제되고, 제약되고, 평가되고, 가치가 매겨지고, 검열되고, 명령받는 것이다.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 1809~1865), 19세기 혁명의 일반 관념(Idée générale de la révolution au XIXe siècle)

 

 

1

 

장자(莊子)는 인류가 자랑하는 고전(古典)입니다. 지금 장자는 문자로 기록된 책들 중 교양인이 되려면 반드시 읽어야 할 텍스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학교 교육을 받는 동안 우리는 고전들의 제목과 저자, 혹은 그 고전들의 개략적 내용을 익히 들어왔을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누구도 고전들을 제대로, 꼼꼼히 읽어본 적이 없다는 겁니다. 고전도 좋고 필독서도 좋습니다. 시험에 통과하기 위해서든 교양인의 품격을 위해서든 반드시 읽어야 하는 것이 되는 순간, (book)은 텍스트(text), 즉 교재(textbook)가 되고 맙니다. 감동과 재미가 없으면 언제 읽기를 멈추어도 되는 것이 책이라면, 읽기 싫어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 하는 것이 교재입니다. 장자도 필독서나 고전의 아이러니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을 흔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책, 국가나 사회에 쓸모가 있어야 행복해지리라는 우리의 통념을 무너뜨리는 책, 사랑과 인정을 받아야 가치 있는 삶이라는 우리의 맹신을 뒤흔드는 책이 교재로 박제되고 마니까요.

 

장자의 세계에서는 명문대에 입학하거나 스펙을 쌓으려는 젊은이들 혹은 권력이나 부를 얻은 기성세대들은 소중한 삶을 허비하는 불행한 자들, 장자가 하염없이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반대로 경쟁에서 실패했거나 낙오한 사람들은 장자에서 자신의 삶을 새롭게 긍정하고 시작할 힘을 얻게 됩니다. 장자에 등장하는 거목 이야기는 말합니다. 쓸모 있는 나무는 베여 대들보나 서까래로 사용되지만, 쓸모없는 나무는 베이지 않고 거목으로 자랄 수 있다고 말입니다. 국가나 사회에 내가 어떻게 하면 쓸모가 있을지 고민하지 말고, 나 자신에게 국가나 사회가 쓸모가 있는지 고민하라는 장자의 도전인 셈입니다. 인재(人材), 즉 체제에 쓸모가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을 격렬히 거부하자는 것! 타인의 욕망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향유하자는 것! 크게는 국가나 사회, 작게는 회사나 가정에서 정의를 추구하지 말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몸 담고 있는 곳에서 쿨하게 떠나자는 것! 2,500년 전도 그렇지만 지금 시대에도 장자가 반체제적이고 혁명적일 수 있는 이유, 체제를 위한 교재가 아니라 우리 삶을 위한 책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미 금서가 되었을 법한 장자가 지금까지 우리에게 전해진 것은 천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중국의 국가주의가 강력하지도 완전하지도 않았던 탓입니다. 전국시대를 풍미했던 일곱 국가들도 그랬고 단명한 진나라를 이은 한나라도 제국 내부를 엄격하게 통제하기 어려웠습니다. 당시는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국가와 제국의 경계를 넘어갈 수 있는 시대였습니다. 천하(天下)라고 불리던 중원 대륙 내부에도 그리고 천하 바깥에도 국가주의가 미치지 않는 곳이 많았으니까요. 그 사이 다행히도 장자는 고대 중국인들의 마음을 울린 책이 되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겁니다. 물론 진나라나 한나라가 장자를 달가워 했을 리 없습니다. 그런데 체제의 노골적인 탄압도, 간접적인 무시도 장자라는 책을 없애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조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체제로서는 선택지가 별로 없습니다. 금서(禁書)로 만들지 못한다면 고리타분한 책, 혹은 지금 시대에 맞지 않는 책으로 만들면 됩니다. 중국에서 장자라는 고전은 바로 이렇게 탄생한 겁니다. ‘교재가 된 가장 강력한 첫 사례죠.

 

 

 

 

 

2

 

공자논어, 라이프니츠단자론이나 스미스의 국부론과 같은, 체제를 위한 텍스트만 고전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장자의 장자, 스피노자에티카마르크스자본론등 인간의 자유를 위한 책도 고전이 되니까요. 중세 시절 바티칸의 금서 목록에 들었던 에티카가 지금 서양 근대철학 합리론의 고전이 된 걸 생각해보세요. 근대 합리론의 또 다른 고전 단자론옆에 꽂히면서, 가장 급진적인 책 에티카는 곰팡이 냄새에 젖어들게 됩니다. 자본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경우만 보더라도 1980년대까지 자본론은 금서였습니다. 소지만으로도 국가보안법에 저촉되던 시절이니, 자본론은 그야말로 목숨 걸고 읽었던 책입니다. 그러나 지금 마르크스의 이 금서는 19세기 말 자본주의를 다룬 경제학 고전으로 스미스의 국부론옆에 나란히 꽂혀 있습니다. 자기 노동력을 팔아야만 먹고 살도록 저주받은 사람들, 한때 그들의 피를 뜨겁게 만들었던 책은 이렇게 먼지를 품은 채 서가에 방치된 겁니다. 장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논어옆에 놓이면서 장자도 무언가 삶의 격언이나 늘어놓는 경전이 되어버리니까요.

 

논어, 단자론그리고 국부론은 아무리 잘 읽어도 책이 되기는 힘듭니다. 체제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삶을 받아들이거나 정당화하는 데 도움이 될 뿐이니까요. 그렇지만 장자, 에티카그리고 자본론은 조금만 제대로 읽어도 교재가 되기는 힘듭니다. 우리의 마음과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 힘, 새로운 삶과 공동체를 모색하게 만드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전에서 책을 구출하기! 동시에 교재와 책, 혹은 텍스트와 북(book)을 구분하기! 고전이 필독서로 추앙받는 지금, 인문정신이 반드시 수행해야 할 과제 중 하나입니다. 이 책에서 제가 하고자 하는 건 바로 이 일입니다. 스피노자와 마르크스가 아닌 장자에 집중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스피노자와 마르크스가 정착 삶을 전제로 한다면, 장자의 사유는 정착민적 삶과 더불어 유목민적 삶도 아우르는 인류학적 안목과 사유의 폭을 자랑하기 때문입니다. 기원전 1000년 이후 장자가 살았던 시대까지 예속 복종을 강요하는 정착 농경생활을 떠나 자발적으로 유목생활에 뛰어들었던 자유인들의 전통이 있었습니다. 바로 유라시아를 풍미했던 유목민적 전통에 장자는 접속하고 있었죠. 스피노자와 마르크스가 부러워할 만한 장자의 운 좋은 상황입니다.

 

어느 동물도 같은 종을 지배와 복종이라는 관계로 길들이지는 않습니다. 국가의 탄생과 함께 인간 사회의 모든 측면에 관철되는 지배와 복종 관계를 국가주의(statism)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주인-늑대와 노예-늑대 혹은 주인-토끼와 노예-토끼를 보신 적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인간만큼은 주인-인간과 노예-인간으로 구분됩니다. -인간과 신하-인간이나 자본가-인간과 노동자-인간의 구분은 모두 이런 반자연적인 참담함의 변주일 뿐이죠. 최소한 장자에게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기보다 만물의 허접, 혹은 동물 중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끔찍한 돌연변이일 뿐입니다. 장자가 국가나 사회, 나아가 문명에 대해 냉소적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인간농장을 없애는 방법은 단순합니다. 정착민적 삶과 단절하면 되는 겁니다. 무엇보다 먼저 노예-인간, 신하-인간, 노동자-인간은 더 이상 주인-인간, -인간, 자본가-인간에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쓸모가 없어져 지배의 표적이 되지 않거나, 아니면 몰래 인간농장을 떠나는 겁니다. 장자의 소요유(逍遙遊)는 바로 이 문맥에서 그 자리를 잡습니다. 장자가 맹목적으로 정착생활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반대하는 것은 인간 가축화의 논리입니다. 농경국가보다 약하더라도 국가주의가 지배하는 유목국가도 이론적으로 가능하고 역사적으로도 가능했으니까요. 유목국가가 탄생해 또 예속과 복종을 강요하면, 유목민들은 또 다른 유목생활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장자의 속내입니다.

 

 

 

 

 

3

 

행성 충돌이나 극심한 기후 변화가 일어나거나 압도적인 포획자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인간은 자신의 목을 스스로 조르는 자기 파괴적 동물입니다.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진행되는 전쟁을 보세요. ‘우리는 같은 종이야라는 의식은 전혀 없습니다. 늑대나 토끼가 보았다면 당혹스러울 일이고, 인간을 전염 병균처럼 여기며 멀리 떠나려 할 겁니다. “인간들은 서로 거침없이 착취하려 하고 심지어 서로를 살육하니, 우리에 대해서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렇지만 늑대와 토끼마저도 동족의 피를 묻힌 인간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불행하게도 자신들이 도망할 곳마저도 인간에 의해 이미 잠식되어 버렸으니까요. 장자를 읽는다는 것은 인류학적 스케일에서의 안목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장자가 대붕(大鵬)이라는 거대한 새를 이야기한 이유입니다. 대붕은 천하를 벗어나 저 까마득한 북쪽에서 출발해 천하를 벗어난 저 멀리 아득한 남쪽으로 날아갑니다. 여기서 대붕은 주인-인간과 노예-인간이 구분되지 않은 공동체에 대한 꿈, 다른 인간을 지배하거나 다른 인간에게 복종하지 않는 삶에 대한 꿈을 상징합니다.

 

궁금증이 생깁니다. 구만리 상공에서 대붕은 천하로 상징되는 국가, 사회, 그리고 문명을 측은한 마음으로 내려다보았을까요, 아니면 무심한 마음으로 제 갈 길을 갔을까요? 이런 의문이 생기는 이유는 만물의 허점이 연출하는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참상이 장자로서도 여간 불쾌한 풍경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행스럽게도 대붕은 우리 삶에 무심하지 않습니다. 애틋하게 우리를 내려다볼 뿐만 아니라, 간혹 구만리 창공의 상쾌한 바람을 몰고 우리 곁으로 하강하기도 합니다. 어떤 때 대붕은 내 등에 타라! 그러면 너는 네 삶을 너의 것으로 향유할 것이라고 유혹하는 듯하고, 어떤 때 대붕은 작다고 체념하는 그대여! 너는 대붕보다 더 크다는 걸 알아야 한다고 죽비를 내리치는 것 같습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48편의 이야기들은 우리가 대붕의 등에 탈 수 있는 48번의 기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붕의 등을 타는 건 생각보다 만만한 일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먼저 대붕이 우리 곁 가까이 날 때 발생하는 그 섬광과도 같은 바람을 느껴야 하고, 이어서 그 바람을 타고 대붕의 등에 올라타는 방법도 알아야 합니다. 이 책에서 제가 시도하고자 한 건 바로 이겁니다.

 

대붕이 거침없이 나는 푸른 하늘, 그리고 전쟁과 갈등으로 흙먼지와 동족의 피를 흩날리는 인간 사회! 이 구만리의 차이, 이 아득한 공간에 머물지 않으면, 장자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거나 몽환적 관념의 세계를 다루고 있다고 오해될 수 있습니다. 20년전 장자로 박사학위를 마친 뒤 다시 장자의 사유를 숙고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를 지금까지 수권의 단행본으로 출간한 것도 구만리의 공간에 제대로 머물겠다는, 혹은 그 공간에서 장자만큼 자유롭겠다는 저의 무의식적 의지입니다. 마침내 이 책으로 과거보다 더 생생하게 대붕의 날갯짓을 포착하게 된 것 같습니다. 과거에는 주목하지 않았던 그의 많은 이야기가 새롭게 눈에 들어왔을 뿐만 아니라, 다루었더라도 애매했던 많은 이야기들이 이제 분명해졌으니까요. 그 사이 두 번에 걸쳐 동·서양 철학사를 정리했던 철학 VS 철학5권으로 기획되어 두 권이 먼저 출간된 강신주의 역사철학ㆍ정치철학이 없었다면, 구만리의 공간에서 자유롭게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 대붕을 따라잡기 힘들었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간절히 발원해봅니다. 대붕의 등에 타거나 혹은 대붕이 될 48번의 기회 중 한 번은 잡으시기를. , 이제 바람이 붑니다. 드디어 대붕의 등에 탈 시간이 되었네요.

 

 

 

 

인용

목차 / 책을 펴내며 / 1. 철학을 위한 찬가

장자 / 타자와의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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