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혜왕장구(梁惠王章句) 상(上) 1장
1. 하필 이익에 대하여 말씀하십니까
1a-1. 맹자께서 양혜왕을 알현하시었다. 왕은 기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노선생께서 추(鄒)나라에서 대량(大梁)까지 천리를 멀다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오셨으니, 또한 장차 내 나라에 무슨 이로움이 있겠나이까?” 1a-1. 孟子見梁惠王. 王曰: “叟不遠千里而來, 亦將有以利吾國乎?” 맹자께서 이에 대답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었다: “왕께서는 하필이면 이(利)를 말씀하십니까? 단지 인의(仁義)가 있을 뿐이오니이다. 왕께서, ‘어떡하면 내 나라를 이롭게 할꼬?’라고만 하시면, 대부들은 당연히, ‘어떡하면 내 집을 이롭게 할꼬?’라 말할 것이요, 사(士)와 서인(庶人)들도 당연히, ‘어떡하면 내 몸 하나 이롭게 할꼬?’라 말할 것이외다. 그리하면 윗 사람이건 아랫 사람이건 서로서로 이익만을 쟁탈하려 할 것이니 그렇게 되면 나라가 위기에 빠질 것은 뻔한 이치올시다. 孟子對曰: “王, 何必曰利? 亦有仁義而已矣. 王曰, ‘何以利吾國?’ 大夫曰, ‘何以利吾家?’ 士庶人曰, ‘何以利吾身?’ 上下交征利而國危矣. 만 대의 전차를 가지고 있는 대국의 나라에서 그 임금을 시해하려고 노리는 놈은 반드시 천승의 전차를 가지고 있는 대부(大夫) 정도의 가로(家老)일 것입니다. 천 대의 전차를 가지고 있는 나라에서 그 임금을 시해하려고 노리는 놈은 반드시 백승 정도의 전차를 가지고 있는 대부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만승의 나라에서 천승을 거느릴 강역을 차지하고, 또 천승의 나라에서 백승을 거느릴 강역을 차지했다면 그놈들은 이미 처먹을 대로 처먹은 놈들이올시다. 그런데 만약 공의(公義)를 뒤로 하고 사리(私利)를 앞세우는 풍조가 성행하면, 그런 놈들은 임금의 모든 것을 빼앗지 않고서는 못 배기옵나이다. 萬乘之國, 弑其君者, 必千乘之家; 千乘之國, 弑其君者, 必百乘之家. 萬取千焉, 千取百焉, 不爲不多矣. 苟爲後義而先利, 不奪不饜. 예로부터 인한 마음이 있으면서 그 어버이를 돌보지 아니 하는 자는 있어본 적이 없으며, 공의(公義)를 지키는 마음이 있으면서도 임금을 깔보는 자는 있어본 적이 없습니다. 왕께서는 단지 인의(仁義)를 말씀하시옵소서, 어찌하여 반드시 이익을 말씀하려 하시나이까?” 未有仁而遺其親者也, 未有義而後其君者也. 王亦曰仁義而已矣, 何必曰利?” |
저자에 관한 이론에 대해
『장자(莊子)』라는 서물을 역사적인 한 인간 장주(莊周)의 저서로 보는 것은 명백한 오류에 속한다. 마찬가지로 『순자(荀子)』라는 서물을 역사적인 한 인간 순황(荀況)의 저서로 보는 것도 명백한 오류에 속한다. 그것은 장자학파나 순자학파의 앤톨로지(anthology)일 수밖에 없다. 그 중에 핵을 이루는 어떤 부분이 장주나 순황 본인의 작품일 가능성은 배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맹자』라는 서물을 맹자학파의 앤톨로지로 보는 것은 명백한 오류에 속하는 일이다. 『맹자』 속에서는 맹자라는 인간이 살아 움직이고 있으며, 전편을 통하여 우리는 그의 분노ㆍ좌절ㆍ희망, 그 칠정(七情)의 얼굴표정과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우선 『장자』는, ‘북녘 바다에 물고기가 있다. 그 이름을 곤이라 한다[북명유어 기명위곤(北冥有魚 其名爲鯤)]’라는 말로 시작된다. 그것은 사실의 기술이 아니라 자신의 웅대한 철학체계를 과시하기 위한 알레고리적 기술이다. 그리고 『순자(荀子)』는, ‘청출어람(靑出於藍)’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권학(勸學)’에 관한 추상적 논문인 것이다.
그러나 『맹자』는 이와 같이 시작한다. ‘맹자가 양혜왕을 만났다.’ 이것은 철학적 체계를 구성하기 위한 추상적 논변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의 기술이다. 『맹자』는 전국시대에 실제로 있었던 ‘이벤트’들의 기술이다. 『맹자』는 『논어(論語)』와도 다르다. 『논어』는 공자의 말씀을 일방적으로 적어놓은 어록체의 로기온 모음집이다. 그러나 『맹자』는 어록이 아니라, 대화이다. 그것은 치열한 문답형식을 취한 것이다. 「양혜왕」 「공손추」 「등문공」, 이 첫 3편은 문답이 이루어진 역사적 상황설명이 친절하게 묘사되어 있다. 일종의 전기문학인 것이다. 그 뒤의 「이루」「만장」 「고자」 「진심」 4편은 어록 스타일의 짤막짤막한 기술도 있고, 내면적 유기적 관련성은 있으나 첫 3편에 비해 통일성이 부족하여 잡연(雜然)한 느낌을 준다. 현장성이 부족한 대신 심오한 역사논쟁ㆍ철학논쟁이 편집되어 있다. 그래서 앞 3편을 상맹(上孟)이라고 부르고 뒷 4편을 하맹(下孟)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체적으로 보면 상맹은 맹자가 15년간 유세를 하는 동안에 현지에서 이루어진 필기노트에 기초한 것이고, 하맹은 은퇴 후에 편찬된 자료라고 사료된다.
상맹(上孟) | 하맹(下孟) |
「양혜왕」 「공손추」 「등문공」 | 「이루」「만장」 「고자」 「진심」 |
15년간 유세기간의 필기노트 | 은퇴 후 편찬된 자료 |
어떤 사람은 『맹자』에서 기술된 열국 왕후의 이름이 모두 죽은 후의 시호(諡號)이며, 또 등장하는 문인들이, ‘악정자(樂正子)’ ‘공도자(公都子)’등 자칭(子稱)되어 있으므로 맹자의 제자의 문도들이 편찬한 것이며, 맹자 본인의 저술일 수 없다는 것이다. 맹자가 은퇴한 후 제자들과 함께 썼다는 것이지 이 『맹자』라는 저작이 맹가 본인의 단일 저작임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맹자가 은퇴했을 때는 양혜왕은 이미 죽은 후이므로 시호라 해서 이상할 것이 없다. 더구나 꾸어 뭐루이(郭沫若)의 『금문총고(金文叢攷)』에 의하면 그 시대의 시호(諡號)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생호(生號)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의 호칭문제도 맹자가 제자를 높여서 자칭(子稱)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진심」 하25에서 맹자 스스로 제자를 자칭하는 용례가 나온다】. 그러니까 그러한 사소한 문자상의 문제로서 맹자저작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맹자』 7편은 모두 맹자 본인과 제자들의 집필과 퇴고(推敲)를 중핵으로 하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니까 BC 300년 전후로 그 우르텍스트(Urtext, 원본)가 성립하고 그 후로 문인들에 의하여 계속 보완ㆍ재편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한 견해일 것이다.
이국문답장(利國問答章)을 첫편에 배치한 이유
맹자가 양혜왕을 만난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그것은 언제였을까? 그것은 주나라 신정왕(愼靚王) 원년(BC 320)의 사건이며 이때 맹자의 나이 53세였다. 양혜왕이 맹자를 ‘수(叟)’라고 부르기 때문에 독자들은 양혜왕이 젊은 사람이고 맹자가 나이 많은 노인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상황인즉 정반대다. 이때 양혜왕은 81세였다. 양혜왕은 햇수로 51년 동안 재위했는데(BC 369~319), 양혜왕이 맹자를 만난 것은 죽기 1년 전의 사건이다. 양혜왕은 맹자를 만난 그 다음 해에 세상을 뜬다(BC 319). 그리고 다음해에 그의 아들 양왕(襄王)이 즉위했는데, 만나보니 왕의 품격을 영 갖추지 못한 ‘같지 않은 놈’이라 생각되어 맹자는 양나라를 떠나 제나라로 간다(BC 318).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매우 정확히 추론될 수가 있다. 그러나 역사가들의 해석 여하에 따라, 양혜왕의 사적은 고정되어 있다 해도, 맹자의 나 이와 행보는 변경될 수가 있다. 맹자의 생년을 올려잡고【양 뿨쥔(楊伯峻)은 BC 385년, 치엔 무(錢穆)는 BC 390년】, 맹자의 유세역정(遊說歷程)을 양나라를 최초의 거점으로 잡는 것이 아니라, 여러 나라를 거친 후에 양나라로 간 것으로 보면, 맹자의 나이 72세 때 양혜왕을 만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면 ‘수(叟, 노인)’라는 표현이 그럴 듯하게 들린다는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맹순열전」에 보면 태사공 자신의 말로써 다음과 같은 탄식이 기술되어 있다: “내가 『맹자』서를 읽다가 양혜왕이 ‘어찌하면 내 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질문한 대목에 이르게 되면, 일찍이 책을 덮고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아~ 이로움이라는 것은 진실로 어지러움의 시작이로구나![余讀孟子書, 至梁惠王問何以利吾國, 未嘗不廢書而歎也. 曰: 嗟乎! 利誠亂之始也!]”
여기 ‘… 라고 질문한 대목에 이르게 되면’이라는 표현은 『맹자』라는 서물에 있어서 이국문답장(利國問答章)이 한참 어딘가 뒤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맹자』라는 책 첫머리에 나오는 장면에 대하여 ‘… 이르러’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맹자』라는 책을 즐겨 읽었는데, 한참 읽다 보면 맹자가 양혜왕을 만나 ‘하필왈리(何必曰利)’를 설파하는 대목에 이르게 되면 무릎을 탁 치게[擊節] 되는 깨달음과 감동이 매번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미상불(未嘗不)…’이라는 표현에는 그런 뜻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사마천은 맹자의 주유일정을 제선왕을 만난 후에 제선왕이 맹자를 기용하지 않자 양나라로 가서 양혜왕을 만나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 「양혜왕」편의 기술과는 정반대의 역정이다[道旣通, 遊事齊宣王, 宣王不能用. 適梁, 梁惠王不果所言, 則見以爲迂遠而闊於事情]. 사마천은 맹자의 최초의 유세의 대상이 제(齊)나라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마천의 이러한 역사기술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전에, 사마천의 개인적 진술을 어느 정도 진실하게 받아들인다면, 최소한 사마천이 본 『맹자』라는 텍스트에 있어서는 이국문답(利國問答)이 맨 앞에 있질 않고 어딘가 한참 뒤에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국문답의 내용이 너무도 맹자사상 전체를 대변하는 강력하고도 요약된 것이라고 생각되어 『맹자』라는 서물 전체를 관하는 프라그먼트(fragment, 파편)로서 모두에로 이동시켰다는 것이다. 코바야시 카쯘도(小林勝人)는 그 작업을 감행한 사람이 조기(趙岐)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외서(外書)」 4편을 잘라버리고, 7편을 상ㆍ하로 나누는 작업을 하고, 장구ㆍ주해를 만든 그의 형안이라면 충분히 그러한 작업을 감행했을 만하다고 말한다.
나는 단지 『맹자』 텍스트에 관한 이러한 이의제기가 있다는 것을 소개할 뿐, 하등의 견해를 첨가하고 싶지 않다. 사마천의 역사정보의 부정확성은 이미 소문날 대로 소문나버린 것이다. 그는 위대한 사가이지만 위대한 문학가이며 수사학자이다. 그의 붓끝에서는 픽션과 넌픽션이 자유자재로 융합된다. 사마천은 참고의 대상일 뿐 맹신되어야 할 우상은 아니다.
조기가 이국문답을 앞으로 옮겼다 해도 그것은 역사적 실황을 반영하여 그릇된 것을 바로잡았을 뿐이다. 맹자가 그의 주유일정을 양혜왕으로부터 시작한 것은 움직이기 어려운 역사적 사실이다. 「양혜왕」 편은 다음과 같은 시퀀스로 23개의 장들이 할당되고 있다. 양혜왕(梁惠王, 5장), 양양왕(梁襄王, 1장), 제선왕(齊宣王, 12장), 추목공(鄒穆公, 1장), 등문공(滕文公, 3장), 노평공(魯平公, 1장). 그러니까 맹자는 양(梁) → 제(齊) → 추(鄒) → 등(藤) → 노(魯)로 15년간 주유하였다(BC 320~305). 「양혜왕」 편은 이 15년간의 주유생활시기에 직접 필기한 자료들을 편집하여 구성한 것으로 맹자의 삶의 대강을 펼쳐놓은 것이다.
그 주요사상은 인의설(仁義說)과 그것을 발전시킨 왕도론(王道論)이다. 그리고 다음에 오는 「공손추」 장은 맹자의 제자로서 제나라 사람인 공손추와의 문답내용인데 그것은 제나라에서의 체재기간(약 7년) 동안에 일어난 대화들을 엮은 것이다. 아마도 공손추 개인의 제나라 현지 수록(手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등문공」장은 등나라에서의 기사이다. 따라서 「공손추」 「등문공」, 두 편은 양혜왕 편의 역정의 일부단락이 상술된 것으로, 양혜왕 편과 유기적 연속체를 이룬다. 역으로 말하자면, 「양혜왕」 편의 제나라 기사는 「공손추」에서, 등나라 기사는 「등문공」에서 발췌되어 온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양혜왕」 편은 맹자의 주유천하 전체를 보여주기 위한 특별한 편집인 셈이다.
전국시대 합리주의 대표주자 자하와 문인들
대강 상맹(上孟)의 편집체제와 그 성격에 관하여 일가견을 획득했을 것이다. 다음에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양혜왕과 맹자의 만남이 어떻게 이루어진 사건인가, 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양혜왕, 과연 그는 누구인가?
양혜왕, 즉 위혜왕(魏惠王)은 진(晋)이라는 대국을 삼진(三晋), 즉 한(韓)ㆍ위(魏)ㆍ조(趙)로 분립시킨 장본인이며 걸출한 전국 초기의 정치가였던 위문후(魏文侯, ?~BC 596)의 손자이다. 위문후가 공자의 제자 자하(子夏)【성은 복(卜), 이름은 상(商), 자(字)가 자하, 그래서 복자하(卜子夏)라고도 부른다】를 모셔다가 후대에 제나라 직하학파의 모델이 된 학단을 형성한 사실은 전국시대의 문화적 딮스트럭쳐(Deep Structure)를 출발시킨 상징적 사건이다. 자하는 공자의 학단 내에서 연소한 신진그룹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다. ‘문학(文學)’으로써 자유(子游, 언언言偃)와 함께 꼽히었는데(『논어(論語)』 11-2), 공자의 ‘회사후소(繪事後素)’라는 시(詩)에 대한 코멘트를 유발시킨 그의 질문(3-8)의 성격에서 볼 수 있듯이 탁월한 언어적 감각의 소유자였다. 문학이란 일차적으로 문자의 세계에 대한 다양한 감성을 의미하지만, 폭넓게는 시ㆍ서예ㆍ악 전반에 걸친 교양을 의미한다. 자하는 이러한 교양을 매우 착실하게 닦아 나갔다. 송대 『근사록』이라는 책이름의 출처가 된 ‘절문이근사비(切問而近思)’라는 유명한 문구(19-6)는 바로 자하(子夏)가 자신의 학문적 태도를 일러 말한 것이다. 자하는 학문이란, 대장장이가 대장간에서 쇠를 달구며 착실히 노력하는 과정 속에서 공구를 만들어내듯이, 배움의 세계 속에서 어김없이 지식을 달구어 도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학문을 장인의 세계에 비유한 첫 사람이라 말해야 할 것이다(19-7).
자공이 어린 후배인 자장(子張)과 자하(子夏)에 관해 공자에게 묻자, 공자는 자장 사(師)는 너무 튀고 빨리 가는 데 비해 자하 상(商)은 너무 느리고 착실하기만 하다고 평한다. 그러자, 자공이 그렇다면 자장이 더 훌륭하지 않겠냐고 반문하자, 공자는 과한 것은 불급한 것에 못 미친다고 말함으로써 자하(子夏)를 두둔한다(11-15). 공자는 자하를 큰 그릇으로 인식했다. 그리고 그의 너무도 소극적이고 착실한 성격을 염려하여 이와 같이 훈계한다. “너는 소인유(小人儒)가 되지 말고, 반드시 군자유(君子儒)가 되어라(6-11).”
자하의 이러한 착실한 이미지는 전국시대 합리주의(Rationalism in the period of Warring States)의 한 원형이 되었다. 위문후 본인이 자하의 제자가 되어 이러한 자하의 철학과 삶의 태도를 착실하게 배웠다. 『사기(史記)』 「유림열전(儒林列傳)」에 보면 자하의 문하에서 전국 초기의 탁월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기록해놓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위문후 주변에서 위문후의 창업을 도우면서 활약했던 사람들이다. 탁월한 농업경제정책가였으며 문후의 고문으로서 성문법을 제정한 이극(李克, 혹은 이회李悝), 청렴한 고사(高士)로서 문후의 훌륭한 고문 역할을 했지만 끝내 문후의 재상 제의를 거절하고 은거한 단간목(段干木), 희대의 병가 오기(吳起), 하백의 미신을 타파한 서문표(西門豹), 위나라 국보로서 칭송을 받은 인인(仁人)이며 문후의 스승이었던 전자방(田子方), 훗날 묵가의 대표적 인물이 된 금활희(禽滑釐) 등등 이 모든 사람들이 자하(子夏)의 문하생들이다.
자하의 제자 오기(吳起)의 치적
오기(吳起)는 본시 위(衛)나라 좌씨(左氏) 사람이다. 그는 노나라의 관직을 맡고 있었을 때 제나라가 침공해오자 장군으로 임명될 참이었다. 그러나 그의 부인이 제나라 사람이라서 신용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오기는 아내를 죽여버렸다. 그의 철저한 출세주의에 노나라의 유생들은 질려버려서 그를 배척했다.
오기는 위문후가 인재를 구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위(魏)나라로 간 것이다. 오기가 관직을 희망했을 때, 위문후는 이극(李克)에게 그의 사람됨을 물었다. 하문 받은 이극은 오기는 탐욕스럽기는 하지만 용병술이 뛰어나기로는 사마양저(司馬穰苴)도 그를 따를 수 없다고 평했다. 오기는 등용되었고 장병의 인망을 한 몸에 모아 진(秦)나라를 쳐서 그 다섯 성을 빼앗고 하서(河西)의 수(守)가 되었다. 오기는 장군이면서도 가장 신분이 낮은 사졸들과 같은 옷을 입고 식사를 같이 하고, 행군할 때도 말이나 수레를 타지 않고 자기 먹을 식량을 친히 가지고 다니는 등 사졸들과 수고로움을 함께 나누었다. 사졸 중에 독창으로 고생하는 자가 있었는데 오기가 그것을 친히 입으로 빨아 주었다. 그 사졸의 어머니가 훗날 그 소식을 듣고 통곡하였다는 유명한 이야기도 이때의 일이다. 그 사졸은 오기에게 충성을 다할 것이고 그러면 그의 죽음은 기약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위문후의 사후에도 그는 계속해서 위무후(魏武侯)를 도와 위나라의 강역을 넓혔다. 그러나 무후의 재상 공숙좌(公叔座)의 시기와 음모로 위무후에게 사양의 뜻을 밝히게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무후는 그 음모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오기를 말리지 않았다. 오기는 위나라를 떠났다. 그리고 그는 초나라로 가서 재상이 된다. 그는 초나라 도왕(悼王)을 도와 매우 시기적절한 변법의 정책을 폈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귀족세경(貴族世卿)의 세록제(世祿制)를 철폐시켜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그들을 변경지대로 이주시켜 광허(廣虛)한 땅들을 개간하게 했다. 불필요한 관직을 없애버리고 능력주의로 사람을 임용하고, 절약한 비용으로 병력을 증강하고 군공을 강화시켰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력이 충실해지고 진(陳)나라와 채나라를 병합해서 삼진(三晋)의 남하를 물리쳤다. 진나라에서 상앙(商鞅)이 변법을 시도한 것의 선구적 모범을 수십 년 전에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공신의 위훈(僞勳)을 삭제한 조광조(趙光祖)가 능주(綾州) 붉은 꽃이 되어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듯이 오기(吳起)의 죽음은 예정된 것이었다. 도왕이 죽자 반대파의 공족들은 오기(吳起) 타도의 그날이 왔다고 거병하였다. 오기는 달아나면서도 도왕의 주검 위에 엎드렸다. 그를 쫓아온 병사들이 잇따라 활을 쏘아댔는데, 오기는 물론 화살에 맞아 죽었지만 병사들의 화살은 도왕의 유해에도 꽂혔다. 이 사건 후 즉위한 태자, 곧 숙왕(肅王)은 선왕의 주검에 활을 쏘았다고 해서 궐기한 자들은 모두 주살하고, 연좌해서 일족을 몰살했는데 70여 가문이나 되었다. 오기는 죽는 순간에도 복수의 병법을 활용한 것이다. 오기는 각박하고 박복하기는 했으나 역시 철저한 합리주의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병가(兵家) 오기가 자하(子夏)의 제자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자하의 문인 서문표(西門豹)의 합리주의
자하(子夏)의 문인이면서 위문후의 치세정신을 크게 선양한 사람으로서 우리는 업(鄴)【지금의 하북성(河北省) 임장현(臨漳縣) 서남쪽】 땅의 령(令) 서문표(西門豹)를 꼽을 수 있다. 그의 이야기는 『사기(史記)』 「골계열전」에 실려있는데 그 시말이 통쾌하기가 그지없다. 그가 위문후에게 임명되어 업령으로 갔을 때, 그 지역이 매우 분위기가 스산하고 빈곤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까닭을 묻자 업의 삼로(三老)와 아전이 해마다 백성에게 돈을 수백만 전을 거두어 가는데 그 중에서 2ㆍ30만 전을 써서 하백이 아내를 취하는 제식을 올린다는 것이다. 하백의 아내로서 여자를 바치지 아니하면 물이 범람하여 백성들이 익사할 것이라 하면서 젊은 처녀들을 물위에 띄워 보내는 성대한 제식을 열흘이나 걸려 지내고 남은 돈은 무당과 함께 나누어 가지고 돌아간다는 것이다.
서문표는 삼로(三老)와 무축(巫祝)과 부로(父老)가 동네 처녀를 물에 띄울 때 알려달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물가에 가서 이들을 만나니 3천여 명이 모여 그 광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서문표는 하백의 아내로 바칠 여자를 불러오게 한다. 그리고 그 처녀의 미추를 살핀다. 그리고 왈: “이 여자는 못생겼다. 그러니 수고스럽지만 큰 무당 할멈이 하백에게 가서 고하라. 다시 아름다운 여자를 구하여 후일 보내마 하고.” 그리고 아전과 군사를 시켜 큰 무당 할멈을 물속에 첨벙 던져버린다. 그리고 좀 기다리다가 용타던 할멈이 왜 돌아오지 않느냐 하고 그 무당 할멈에게 열 명의 수제자가 있었는데, 한 명씩 첨벙첨벙 던져 버린다. 그리고 좀 기다리다가 왜 신과 내통하는 무당들도 소식이 없냐하고, 아마도 여자들이라서 하백이 잘 대꾸를 안 해주는 모양이라 하고, 고위관료인 늙은 삼로(三老)【제일 많이 해쳐먹던 놈】를 풍덩 던져 버린다. 그리고 한참 기다리다가 서문표가 돌아보며 말한다: “무당과 삼로가 모두 돌아오지 않는다. 이를 어찌 한단 말이냐? 이제 아전과 고을 유지들이 한 명씩 들어가서 하백께 아뢰어야겠다.” 모두가 머리를 조아려서 이마가 깨지고 피가 땅에 흐르며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이 일로 다시는 업 땅에 ‘종교적 사기’가 있을 수 없게 되었고, 그리고 일상생활 속에서도 사람들이 서로를 속일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서문표는 그 대신 강의 치수사업을 크게 일으켰다. 12개의 도랑을 파고 강물을 논에 대어 민생을 풍족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서문표의 지혜와 권한을 오늘 한국에 또 하나의 서문표에게 줄 수만 있다면, 하백에게 띄워 보내야 할 ‘대형교회 목사님(현재 통용되는 언어상의 상징체계로만 활용한 단어임)’또한 적지 않을 것이다. 서문표 또한 자하(子夏)의 제자이다. 공자가 평가한 자하의 신중함, 그리고 치밀함, 그리고 장인적 엄밀함은 위문후의 백업으로 당대의 합리주의적 시대정신을 진작시켰던 것이다.
법가의 원조, 자하학파
자하의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배우고 남음이 있다고 생각되면 벼슬길에 오르라[學而優則仕]”
『천자문』에 ‘학우등사(學優登仕)’라는 말이 실려있어 우리 조선조에서도
이 말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여러 맥락에서 회자되었는데, 이 말은 본시 공자의 말이 아니라 자하(子夏)의 말이다. 그런데 자하의 이 말 앞에 이 한마디가 또 있다. “벼슬하고서 남음이 있으면 학문에 정진하라[仕而優則學]” 사실 이런 말들의 정확한 함의를 다 알 수는 없는 것이지만, 하여튼 자하는 학문과 정치를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학문의 적극적인 정치참여, 정치의 적극적인 학문참여, 그러니까 일종의 ‘정학협동(政學協同)’을 주장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자하는 공자 밑에 있을 때 실제로 거보(莒父)의 읍재 노릇을 했다. 거보는 노나라의 읍(邑)이었으므로 곡부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 공자를 계속 뵈올 수가 있었다. 자하(子夏)가 공자에게 여쭌다. “정치는 어떻게 하는 것이오이까?” 공자는 타이른다. “속히 성과를 내려고 하지 말라. 작은 이익에 구애되지 말라. 속히 성과를 내려고 하면 전체적으로 통달할 수 없고, 작은 이익에 구애되면 큰일을 이루지 못한다[無欲速, 無見小利. 欲速, 則不達; 見小利, 則大事不成].” 자하는 위문후와 함께 성급하지 않게, 소리(小利)를 탐하지 않고 대의(大義)를 구현해 나갔다.
자하의 문도들의 성향을 보면 유가라고는 하지만, 이미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이나 수신의 내면성을 추구하는 수도(修道)형의 인간들이 아니라 철저히 현실세계를 경영하는 실무정치적 인간들이다. 오기나 금활희는 모두 병가로 분류될 수 있는 사람들이고 이극(李克)이나 서문표는 법률ㆍ경제ㆍ산업의 실무에 전념한 법가들이다. 꾸어 뭐루어(郭沫若, 1892~1972)는 자하의 그룹이 법가의 원조라고 보는 신선한 견해를 제출했는데, 일리가 있는 설이라고 생각한다. 제자백가가 그 본원에 있어서는 유가로 회통된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미 전국시대로 접어들면 유가의 사상도 법가적 트랜스포메이션을 안 일으킬 수 없었다. 한비는 당대의 현학(顯學)으로서 유(儒)와 묵(墨)을 들고 유의 조종으로서 공구(孔丘)를 들고, 묵의 조종으로서 묵적(墨翟)을 들었다. 그리고 공구는 8파로 나뉘고 묵적은 3파로 나뉘었다고 말한다. 유의 8분파를 한비는 자장지유(子張之儒)ㆍ자사지유(子思之儒)ㆍ안씨지유(顔氏之儒)ㆍ맹씨지유(孟氏之儒)ㆍ칠조씨지유(漆雕氏之儒)ㆍ중량씨지유(仲良氏之儒)ㆍ손씨지유(孫氏之儒)ㆍ악정씨지유(樂正氏之儒)로 들고 있는데, 여기에 그유니크한 ‘자하지유(子夏之儒)’를 거론치 않는다는 사실이다(『한비자韓非子』 「현학顯學」). 이것은 한비가 자하지유를 몰랐거나 중요시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자하는 유(儒)로서 여겨지지 않을 만큼 문호를 별립(別立)했다고 보았던 것이다. 자하(子夏)는 아마도 법가의 조종으로 받들어졌을지도 모른다【參看, 郭沫若, 『十批判書』 「前期法家的批判」】.
공손앙을 등용하지도 죽이지도 않은 위혜왕의 우유부단
하여튼 위문후는 자하(子夏)의 이념적 틀 속에서 전국시대의 새로운 합리주의적 정신을 개척하였고 제자백가가 노방하는 정학협동의 기풍을 열어 위국을 전국시대의 주축으로 만드는 기틀을 닦았다. 그리고 그의 아들 자격(子擊), 즉 위무후(魏武侯)는 25년(BC 395~370)의 재위기간 동안에 초나라ㆍ조(趙)나라ㆍ제나라를 꼼짝 못하게 대파하고 위나라의 강역을 최대로 넓힘으로써, 위나라를 합종의 중심축이 될 수밖에 없는 지위로 격상시켰다.
이 위무후의 아들 자앵(子罃)이 바로 위혜왕(魏惠王)이다. 위혜왕이 32세로 위나라의 군주로 등극했을 때 그는 거의 전국7웅 중에서 가장 촉망받는 리더십을 장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혜왕은 위문후와 무후가 닦아놓은 모든 물리적ㆍ정신적 기반을 물려받았으며 또 혜왕은 그러한 기반을 물려받을 정도의 역량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문제는 인재를 좋아해서 잘 기용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그 인재가 제시하는 청사진을 실천할 수 있는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데 있었다. 항상 이것도 저것도 아닌 채로 우유부단한 가운데 국운을 흥성시킬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의 집권 초기에는 매우 의욕있게 국가를 운영하고 왕성한 병력으로 국토를 지켰다.
그러나 그의 문제는 급변하는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국가 패러다임을 과감하게 실천하는 그러한 근원적 개혁 마인드를 갖지 못했다는 데 있다. 진효공(秦孝公)이 등장하기 이전에만 해도 위혜왕은 중원의 최강자였다. 그렇다면 왜 위혜왕은 진효공에게 최강의 이니시어티브(initiative)를 바치게 되었는가? 이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상앙(商鞅, BC 390~338)이라는 인물을 등장시키지 않으면 아니 된다. 우리가 보통 이 사람을 상앙이라고 부르는 것은 훗날 진나라에서 상(商)이라는 땅의 군(君)으로 봉해졌기 때문이다. 상군(商君)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 사람은 본시 위(衛)나라 사람으로 위왕의 서자였고 공손씨였다. 그래서 위앙(衛鞅) 혹은 공손앙으로 불린다. 공손앙(公孫鞅)은 어려서부터 형명지학(刑名之學)에 정통했고 위나라의 이극(李克)을 스승으로 모셨다. 그러니까 크게 보면 공손앙 또한 자하(子夏)계열의 사람이다. 공손앙은 위나라의 재상 공숙좌(公叔座)의 가신 노릇을 했다【중서자(中庶子)라는 벼슬을 함】.
공숙좌는 오기(吳起)를 내쫓았던 인물이다. 그러나 공숙좌는 공손앙이 시대를 변혁시킬 거대한 인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현실에 대한 생각이 너무도 래디칼(radical, 과격론자)했기 때문에 위혜왕에게 공손앙을 함부로 추천할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공숙좌가 병에 걸려 죽게 되었다. 위혜왕은 직접 찾아가 문병을 했다: “그대의 병이 회복될 길이 없다면 장차 이 나라의 사직을 어떻게 하겠소?” 이때 공숙좌가 정색을 하고 왕에게 말했다: “공손앙은 비록 나이는 적지만 특출난 재능의 사나이오니, 이 나라의 대사를 그에게 위임하십시오.”
이 순간 만약 위혜왕(훗날의 양혜왕)이 공숙좌의 말을 받아들였다면, 전국을 통일하는 패자는 위해왕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여튼 위나라가 요지부동한 패권을 장악했을 것이다. 그러나 위혜왕은 공숙좌가 죽음을 앞두고 정신이 혼미해져서 오락가락 황당한 말을 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묵묵히 서있기만 했다. 위혜왕이 떠나려 할 때 공숙좌는 주위사람들을 물러나게 하고, 위혜왕에게 간곡히 귓속말로 청했다: “대왕께서 공손앙을 기용하지 않으신다면 반드시 그를 죽여 버리십시오. 그가 이 나라, 국경을 넘게 해서는 아니 됩니다.” 공숙좌의 말대로 위혜왕 이 공손앙을 죽여 버렸다면 슬픈 패배의 고배를 계속 마시면서 몰락하는 위나라 역사의 주인공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공숙좌는 공손앙을 불러 말했다: “오늘 대왕께서 재상이 될 만한 인물을 묻기에 나는 그대를 추천하였소. 그러나 대왕의 안색으로 보아 내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소. 나는 신하로서 군주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 사람이오. 그래서 그대를 기용치 않으시려면 그대를 죽여야 한다고 말하였소. 그러니 하루속히 이곳을 떠나시오.” 공손앙은 대답한다: “대왕께서는 당신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기에 신을 임용치 못하는데, 어찌 또 당신의 말씀을 받아들여 신을 죽일 수 있겠나이까?” 공손앙은 비굴하게 도망치지 않았다. 위혜왕도 공손앙의 추측대로 공손앙을 죽이지 않았다. 위혜왕은 돌아와 주위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공숙좌의 병이 위중하여 슬프구나! 과인으로 하여금 나라를 공손앙 같은 피라미에게 맡기도록 하다니 어찌 제정신이겠는가!”라고만 하였다. 이 고사는 위혜왕의 사람됨을 너무도 잘 말해준다. 훗날 맹자와의 대화 속에도 유사한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공손앙과 진효공의 네 차례 면담
공손앙은 진효공(秦孝公, BC 361~338 재위)이 전국에 포고령을 내려 어진 이를 구하여 장차 진목공(秦穆公, BC 659~621 재위)【제환공ㆍ진문공(晋文公)과 함께 반드시 춘추오패(春秋五覇)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덕망이 높은 인품의 소유자로서 인재를 잘 썼고 강역을 넓혔다. 이오(夷吾)를 환국시켜 진체공(晉惠公)으로 만들었고, 또 공자(公子) 중이(重耳)를 환국시켜 진문공(晋文公)으로 만들어준 장본인이다. 진문공, BC 636~628 재위, 보다도 7년이나 더 오래 살았다. 『시경』에 나오는 「황조(黃鳥)」라는 전율의 노래는 그가 죽었을 때 훌륭한 자거씨(子車氏)의 세 아들을 순장하는 슬픈 장면을 묘사한 걸작이다. 목공(穆公)은 목공(繆公)이라고도 쓴다. 『사기(史記)』에는 목공(繆公)으로 되어 있다】의 위업을 계승하여 동쪽의 침략당한 땅을 탈환하려 한다는 것을 듣고, 당당히 진나라로 가서 효공의 총신 경감(景監)【성이 경(景)인 태감(太監)】의 주선으로 효공을 만난다. 제1차면담 시에 위앙(衛鞅)은 오제(五帝)의 도리를 말하였는데 효공이 졸았다. 닷새 후에 제2차면담이 이루어졌는데 그때 위앙은 삼왕(三王)의 도리를 말한다. 효공은 또 졸았다. 효공은 옛이야기는 너무 먼 세상이야기라서 실천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경감을 졸라 어렵게 제3차 면담이 이루어졌다. 그러자 위앙은 오패(五覇)의 도리를 진언하였다. 그러자 효공은 경감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그대가 소개한 손님은 더불어 담론할 만한 인물이요.” 여기서 위앙은 효공의 관심과 품격과 실천능력을 파악한 것이다. 위앙은 드디어 효공을 다시 만났다. 제4차 면담이 이루어진 것이다. 드디어 이 두 사람은 몇날 며칠 동안 열정적으로 담론에 빠져들어 무릎이 점점 앞으로 다가가는 것을 서로 눈치채지 못하였다.
이러한 사마천 열전의 드라마틱한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파악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상앙(商鞅)의 문제의식과 그 지식의 폭에 관한 것이다. 상앙의 지식세계에는 오로지 하나의 레시피만 준비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유가에서 말하는 선왕지도의 모든 통시적 가치를 상앙은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앙은 상대방이 어떠한 요리를 원하는지에 따라 근원적으로 그 레시피를 달리할 수 있는 다양한 가치관의 소유자였다. 이것은 맹자가 양ㆍ묵의 이단을 배척하고 오로지 ‘공자’를 머리에 이고 다니는 공문의 적통주의와는 매우 대조적인 것이다【공자의 사숙자로서 자임, 「이루」 하22】. 상양에 있어서 지식이란 적통의 문제가 아니라 변통의 문제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진효공이라는 캐릭터의 사람됨에 관한 것이다. 효공은 목공의 위업을 계승한다는 뚜렷한 문제의식이 있다. 그리고 상대방에게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끌어낼 수 있는 역량의 소유자이다. 상앙과의 일차면담에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그를 잘라버렸다면 역사를 개변시키는 위대한 계기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일차면담에서 조는 척하면서 이차ㆍ삼차면담을 유도하였고 드디어 자기가 원하는 사유의 틀을 상대방으로부터 끌어내었다. 다시 말해서 처음부터 효공은 상앙의 그릇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상앙이라는 그릇을 그릇으로 만들 수 있는 그릇이 효공에게 있었다. 이 두 사람의 만남은 『중용(中庸)』 20장에서 말하는 바 두 ‘기인(其人)’의 만남이었다.
전쟁은 전쟁으로만 종식시킬 수 있다는 상앙의 리얼리즘
그런데 과연 몇날 며칠 동안 이 두 사람은 무엇을 얘기했는가? 우리는 보통 상앙(商鞅)이라면 엄형을 주장한 법가라든가, 자기가 만든 형벌에 오히려 개죽음을 당하고 만 조롱거리처럼 가볍게 넘기고 말 수가 있다. 그의 열전 드라마가 던져주는 피상적 인상이 그의 본면을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유가중심의 역사가 그런 베일을 덮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상앙이라는 피 끓는 인간의 진면목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맹자라는 인물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상앙을 법가의 원조로, 맹자를 유가의 적통으로 이해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상앙은 결코 법가라 말할 수 없다. 그때는 아직 ‘법가’라는 개념이 있지도 않을 때였다. 그렇다면 상앙은 누구인가?
상앙은 비록 ‘법’이라는 것에 착안하여 세상을 개변시키려고 노력한 사람이지만, ‘법가(法家)’는 아니다. ‘법’이란 단지 그가 구상하는 국가체계의 한 주요한 방편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상앙은 무엇을 주장한 사람인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상앙을 극단적인 리얼리스트로서, 그리고 맹자를 극단적인 아이디얼리스트로서 생각해보면 훨씬 더 용이하게 이해의 실마리가 풀려나갈 수도 있다고, 상앙과 효공이 몇날 며칠을 두고 이야기한 내용은 매우 명백한 것이다. 그것은 ‘국가의 비젼’에 관한 것이다. 상앙은 이 국가의 비젼에 관하여 매우 래디칼(radical)한 리얼리즘을 견지한 것이다.
그렇다면 상앙의 리얼리즘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말하는 리얼리즘이란 서양철학에서 말하는 본체에 관한 리얼리즘(실재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 우리가 당면한 현실적 과제상황에 대하여 가장 실현가능한, 그리고 가장 문제해결에 도움을 주는 구체적 현실적 방안(realistic solution)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해결의 가장 초보적 첫 실마리는 ‘당면한 현실적 과제상황’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무엇인가? 전국시대의 국가들이 당면한 가장 시급한, 가장 중요한 문제상황이란 다름 아닌 ‘전쟁’이었다. 평화나 도덕이나 이상을 논할 겨를이 없다. 전쟁이 나면 말짱 황이다. 전쟁은 내가 안 일으킨다고 해서 안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전쟁은 강도처럼 밀어닥친다.
다시 말해서 전국시대의 국가는 전쟁을 아니 할 수 없는 나라들이었다. 그야말로 전쟁을 위해서 존속하는 국가들이었다. 국민들은 전쟁을 좋아하는가? 전쟁으로 피폐해지는 것은 국민의 삶이다. 국민이 전쟁을 좋아할 리가 없다. 국민들의 소망이란 전쟁 없는 삶을 사는 것이다. 전쟁이 없어지기를 염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전국시대 국가들의 최대의 염원은 전쟁을 없애는 것이다. 전쟁은 어떻게 없애는가? 전쟁은 오로지 전쟁을 통하여 없앨 수밖에 없다. 이것이 상앙의 가장 초보적인 현실인식이다. 전쟁을 통해서 전쟁을 없앤다는 것은 무수한 전쟁을 끊임없이 승리로 이끌어 천하를 통일하는 것이다. 상앙에게 있어서 왕도란 ‘왕천하(王天下)’를 의미하는 것이며, 그것은 전국을 하나로 통일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명료한 시대정신의 현실적 청사진을 가지고 있었다. 왕천하는 곧 전쟁을 이기는 것을 의미하고, 전쟁을 이기는 것은 다름 아닌 ‘힘’이다. 상앙의 철학은 한마디로 ‘힘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니체는, 쇼펜하우어가 칸트가 말한 물자체를 ‘삶에 대한 맹목적 의지(blinder Wille Tur Leben)’라고 새롭게 규정한 것을, ‘힘에로의 의지(Wille zur Macht)’로 대치시켰다. 힘에로의 의지를 우주의 근본원리로 삼아 인간세의 모든 가치를 새롭게 평가하고 변혁하자는 것이다. 맥락은 다르다 해도 상앙의 힘의 철학은 니체의 ‘힘에로의 의지’와 매우 상통한다. 니체는 신의 죽음과 동시에 인간에게 ‘대지에 충실할 것’을 권유한다. 마찬가지로 상앙은 힘의 원천을 땅에 둔다. 그것은 바로 ‘농본주의(農本主義)’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의 철학이 내세우는 가장 중요한 개념은 바로 ‘농전(農戰)’이다. 사실 ‘법’은 ‘농전’에 부수되는 방편이다. 그는 말한다. “국가가 힘을 기르는 가장 중요한 근본이 바로 농전이다[國之所以興者, 農戰也]. 『상군서』 3-1”
춘추시대와는 달라진 전국시대 전투양상
‘농전(農戰)’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농업과 전쟁을 유기적 일체로서 파악하는 것이다. 전쟁은 국가의 부(富)가 없이는 절대로 일으킬 수 없다. 일으켜서도 아니 된다. 얄팍한 병가전술의 차원에서 전쟁의 승패가 가름 나는 것은 아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은 압도적인 힘이다. 힘이란 전쟁에 참여하는 모든 물리적ㆍ정신적 요소의 호응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그 힘은 국가의 부에서만 나온다. 그런데 국가의 부는 농업에서만 나온다. 그가 부르짖는 중농주의는 상업이나 수공업이나 시ㆍ서를 암송하는 지식의 종사자들을 배제하는 의미를 갖는데, 그것은 전쟁과의 관련에서 가장 유리한 국가체제의 스트럭쳐(structure)를 의미하는 것이다. 상인이나 수공업자나 지식인들은 우선 땅에 대한 아이덴티티가 없으며, 삶의 성향이 순박하지 않으며, 또 국제적 감각의 소유자들이라서 유동성이 강하다. 이러한 문제를 좀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전쟁’이라는 것의 구체적 의미를 상고할 필요가 있다.
우선 춘추시대의 전쟁은 전차 즉 수레가 전투의 주체였다. 『논어(論語)』에 보면 공자는 평생 수레하고만 씨름한다. 수레(여행용) 타고 여행하며, 수레(전투용) 타고 전쟁하는 자신의 이미지를 그린다. 그리고 제자 장례식 때도 수레를 파냐 마냐(「선진」) 하고 실갱이 친다. 춘추시대 때에는 전투의 규모가 그리 크질 않았다. 당시 가장 큰 대국이었던 진(晋)나라가 대전(大戰)에 사용한 전차는 700대ㆍ800대 정도였다. 하나의 전차에 보병이 30명 정도 붙어다니니까 전체 군대규모는 2만여 명 정도였다. 그러니까 춘추 중기 이전의 대국의 병력은 2ㆍ3만 정도였다. 그리고 춘추시대 때는 병기가 청동으로 제작되었다. 그러나 청동이란 대량생산이 불가능하다. 동(銅)의 생산량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청동의 무기를 소유한 것은 소수의 귀족계급일 뿐이었다. 그러나 병기가 철로 제작되면서 온갖 병기의 공급이 대량화되면서, 자연히 전투는 전차중심에서 보병중심으로 옮아가게 된다. 그리고 사람의 완력(腕力)에 의존하는 활은 멀리 나가지 않는다. 그런데 기계적 힘을 활용하는 노(弩, 쇠뇌)가 발명되면서 다량의 화살이 일시에 멀리 나가며, 그 강력한 쇠촉은 방패를 뚫는 힘까지도 갖게 되어 전술이 일변하게 된다. 따라서 각국의 병력이 노부대(弩部隊)를 편성하게 된다. 그리고 공성(攻城)을 위한 높은 사다리 ‘운제(雲梯)’가 개발되면서 전쟁의 양상이 달라진다. 『묵자(墨子)』 「공수(公輸)」편에 보면 공수반(公輸盤)이 초나라에 고용되어 송나라를 공격하기 위하여 ‘운제’를 만들었다고 적혀있지만, 그것은 공수반이 발명한 것은 아니고 그 싸움을 말리고 있는 자묵자(子墨子) 자신이 발명한 것이다. 묵자는 ‘겸애(兼愛)의 평화주의’자로서 알려져 있지만, 그는 실제로 전쟁전문가였으며 용병집단의 우두머리였다. 운제는 자묵자가 발명한 것이다. 이와 같이 맹자의 시대에, 맹자가 배척하고 있는 사상가들 대부분이 명확한 현실진단 속에서 시류를 선도해나가고 있었던 인물들이었다.
전쟁의 근간은 국부이고 국부의 근간은 농업흥성
다시 말해서 춘추시대의 국가라는 것은 중원중심의 자연발생적인 성읍(城邑) 국가들이며 주나라 봉건체제 하에서 이념적으로 느슨하게 배열되어 있던 다양한 소국들이었다. 이러한 나라들간의 싸움이란 대평원에서 전차끼리 맞부딪히는 전투였다. 그러나 전국시대에는 이미 성읍국가, 즉 희랍세계에서 볼 수 있는 폴리스적인 도시국가의 모습은 점점 자취를 감추고 대규모의 영토국가로 변모하게 된다. 영토국가란, 성읍간의 위계질서를 인정하고 분봉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영토개념이 있고, 그 영토내의 모든 권력이 전제군주 하에 통합되고 일원화된다. 그리고 영토가 중원에서 변방으로 확장됨에 따라 산악지대에서는 전차는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따라서 대규모 민중 보병부대가 등장하게 되면, 농병이 원칙적으로 분립되고, 상비군이 생겨나며, 행정관료체계와 군대체계가 분리되며 전자는 재상이 통할(統轄)하고 후자는 장군이 통할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전국시대의 새로운 양상은 전차에 쓰였던 말들이 개별화되고 기동력이 강력한 기병(騎兵)의 수단으로 탈바꿈하게 된다는 것이다. 알렉산더대왕의 동정(東征)과 비슷한 시기에 이미 중원에는 기병부대가 등장한다. 이와 관련하여 유명한 사건은 조나라의 무령왕(武靈王)이 신진문물을 과감히 받아들여 ‘호복기사(胡服騎射, 오랑캐와 같은 기마복장을 하고 말을 타고 활을 쏜다)’를 추진한 역사적 사실이다.
알렉산더대왕이 인더스강을 건넌 것이 BC 326년 봄이었고, 무령왕이 등극한 것이 BC 325년이었고 이때 맹자의 나이 48세였다. 무령왕이 알렉산더 동정으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았다고는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북방 민족은 변방오랑캐가 아니라 서방의 문물을 적극 수용하는 선진문명이었다. 무령왕은 과감하게 북방민족의 문물을 수용한 것이다. 진(秦)나라가 강성해질 수 있었던 것도 북방의 융(戎)과의 끊임없는 접촉을 거쳐 융(戎)을 제압하고 융의 서방문물을 수용했기 때문이었다. 융은 인도ㆍ이란계의 민족으로서 고도의 문명을 지닌 나라였다. 진나라도 조나라에 뒤이어 기병제도를 도입했다. 말타고 활을 쏜다는 것은 진법에 있어서 새로운 기동력과 돌파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전국시대에 이르게 되면 민중 보병부대의 규모는 보통 춘추시대의 2ㆍ3만 규모의 10배 이상으로 불어나게 된다. 국력의 증강으로 초나라만 해도 전차를 4천 대 보유하게 되고 그에 따라 군사는 30만에서 100만에 이르게 된다. 지금 상앙이 효공과 무릎을 맞대고 머리를 조아리고 침을 튀기며 이야기하고 있는 상황이란 바로 이러한 전쟁의 현실을 놓고 토론하는 것이다. 이 군대의 막대한 보병을 동원하는 유일한 현실적 방법이 농업흥성국가를 만드는 길이라는 것이다. 농민만이 국가의 근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쟁의 근간은 국부이다. 국부의 근간은 농업이다. 그렇다면 농업은 어떻게 충성케 하는가? 농업을 흥성케 하는 길은 너무도 쉬운 일이다. 그런데 쉬운 것일수록 실행하기가 어렵다. 쉽다는 것은 특수한 사태가 아닌 일반적 사태라는 것이며, 일반적 사태는 전반적 개혁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정치에 있어서 가장 쉽고 명백한 부강의 원칙일수록 실행에 옮기기가 어려운 것이다.
봉건적 도시국가가 전제적 영토국가로 거듭나는 방법
우선 농지의 확보이다. 그런데 농지는 요즈음과 달리, 인구의 밀도가 높지 않았던 과거시대에 있어서는 개간하면 되는 것이다. 특히 섬서성 지역은 지대가 높고 배수가 잘되어 농업에 최적지였다. 지금은 섬서성 지역이 매우 건조하고 각박한 땅이 되어버렸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문명이 고도화될수록 대체로 그 지역이 건조하게 된다는 것이다. 고대사회에서 섬서성 지역은 오히려 비옥한 땅이었고, 수해에 자주 시달리는 중원의 저지대에 비해 훨씬 관개 등 모든 여건이 용이했다. 그리고 다양한 철제 농기구가 개발되면서 개간의 여건이 좋았다. 문제는 개간 인구의 확보이다. 개간 인구를 확보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대가족제를 무너뜨리고 끊임없이 소가족제도로 분가를 시켜 인구를 분산시키는 것이다. 대가족제도가 되면 인의염치(仁義廉恥)를 따지고 놀고먹는 불한당(不汗黨)들이 자연 불어나게 된다.
분가가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이루어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러한 목표를 위해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효율적 방법을 다음의 3개원칙으로 정리해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개간(開墾)의 인센티브를 주어야 하는데, 그 최대의 인센티브는 어느 한도 내에서는 개간한 땅의 사유를 허락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사유를 허락한다는 것은 땅을 매매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새로운 땅을 개간하려 할 것이다.
둘째는 그러한 개간의 사유를 허락하는 조건으로 작제(爵制)를 도입하고 작제를 군공(軍功)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전쟁에 나아가 군공을 세우게 되면 작위를 받게 되고 그에 따라 토지를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농민 청년들은 전쟁에 나아가 용감히 싸우는 것을 꿈으로 여기면서 살아가게 되고,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면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된다는 희망을 갖게 될 것이다. 전장에서 명예롭게 죽더라도 고향에 있는 가족들이 자기로 인하여 부귀를 누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지니며 원망 없이 죽어갈 것이다. 바로 이러한 농(農)과 전(戰)의 피드백 시스템이 상앙의 ‘농전(農戰)’ 개념인 것이다.
셋째로 이러한 농전개념을 진실로 효율적으로 실행하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원칙은 농민의 부의 축적을 빨아먹는 일체의 지배계급ㆍ특권계급, 그러니까 지방의 서리로부터 왕족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무위도식하는 무리들을 일소해버리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상앙의 개혁의 핵심을 이루는 ‘법’의 원리와 정신이 도입되는 것이다. 내가 상앙을 ‘법가’라고 단순히 말해서는 아니 된다고 주장한 것은 ‘법가’라는 개념의 선입견이 주는 너무도 피상적 이미지 때문인 것이다. 국가를 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단순한 이념이나 추상적 원리가 아닌 것이다. 상앙의 ‘법’은 오직 ‘농전’의 구체적 방법론이다. 그리고 그것은 농전의 부국강병을 실천하기 위한 보편적ㆍ제도적 원리이며, 그 원리의 객관성은 누구도 범할 수 없는 것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봉건적 도시국가의 윤리적 구태를 벗고 전제적 영토국가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객관적 치세의 원리(objective governing principle)가 필요하다는 것이며 그 원리를 상앙(商鞅)은 ‘법(法)’이라고 부른 것이다. 그리고 법은 반드시 제도적 보편성(institutional universality)을 지니는 것으로서 객관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법(法)은 단순히 민중을 괴롭히기 위한 형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애민(愛民)ㆍ리민(利民)의 요체이다. 법이야말로 국치(國治), 국부(國富), 병강(兵强)의 첩경이다.
빈자부(貧者富)ㆍ부자빈(富者貧)ㆍ국강(國强)
전통적으로 ‘형불상대부(刑不上大夫), 예불하서인(禮不下庶人)’이라는 말이 있다. 『예기』 「곡례(曲禮)」상에 나오고, 사마천의 「보임소경서(報任少卿書)」에 인용되어 있는 것을 보면 선진시대에도 꽤 보편화되어있던 관념으로 여겨지는데 결정적인 것은 이 문제에 관하여 염유(冉有)와 공자 사이에 매우 자세한 논의가 오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전말이 『공자가어(孔子家語)』 「오형해(五刑解)」에 자세히 실려있다. 간백자료의 발굴로 『가어』의 저작성이 『맹자』 이전으로 확실하게 올라갈 수 있으므로 이 논의는 상군, 맹자와 더불어 동시대의 담론이라고 확언할 수 있다.
염유는 묻는다: “선왕의 제법(制法)에 형(刑)은 대부 이상으로 올라가지 않고 예(禮)는 서인에게 내려가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과연 대부는 마음대로 범죄를 저질러도 되고, 서민은 예의에 어긋나게 마구 행동해도 되는 것이오니이까[先王制法, 使刑不上於大夫, 禮不下於庶人, 然則大夫犯罪, 不可以加刑, 庶人之行事, 不可以治於禮乎]?”
공자는 이 질문에 대답한다: “물론 그렇지 아니 하다. 형이 대부에게 올라가지 않고 예가 서인에게 내려가지 않는다는 것은 군자는 예로써 자기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니 이것은 염치의 절개를 소중히 여긴다는 뜻이다. 대부가 죄를 저질렀을 때는 바로 형벌을 적용하지 않고 에둘러 변명을 해준다. 그러나 본인은 직접 짤막한 갓끈에 흰 갓을 쓰고 소반에 물을 떠서 올려놓은 다음 칼을 쓰고 대궐 안으로 들어가서 스스로 자기의 죄를 청해야 한다. 그리고 대죄를 지었을 때도 임금이 형벌로 그를 죽이지 않는다. 본인이 북쪽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꿇어앉아서 자결해야 한다. 예가 서인에게 내려가지 않는다는 것은 서인들은 일상생활에 열중해야 하므로 예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어 일일이 예를 갖추어야 한다고 책망치 아니 하는 것이다.”
이것은 소위 도덕적 자발성에 기초한 유가적 관용주의(Confucian tolerationism)의 매우 합리적 논변이지만, 상앙은 바로 이러한 도덕주의의 함정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러한 도덕적 자발성이야말로 격조 높은 소수의 양심가들 사이에서는 통용될 수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것이 국가의 제도로서 정착된다면 온갖 부패가 발호하는 온상을 마련해주는 것일 뿐이라고 치열하게 배격한다. 법은 만민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단 한 명, 그 법을 만민에게 시행할 수 있게 만드는 권세의 상징적 근원인 군주 한 사람만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은 법에 복속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상앙(商鞅)이 군주 한 사람의 권력을 위하여 법치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궁극적 목표는 국가의 부강이며, 군주 또한 그 부강의 수단일 뿐이다. 군주에게조차 법이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생각까지 상앙의 생각이 진행되지 못한 것은 매우 유감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으나,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 AD 1215)가 제정되는 상황과는 매우 다른 역사적 정황이 있다. 마그나 카르타는 귀족세력이 어떻게 왕권을 제약하냐 하는 과제상황 속에서 탄생된 것이지만, 상앙의 변법은 귀족세력을 제거하여 어떻게 군권강화에 의한 대일통을 이룩하느냐의 문제였던 것이다.
법은 도덕이라는 인간의 내면에 기초하기보다는 행위의 결과를 더 중시한다. 상앙에게 있어서 법이란 상과 벌, 그 두 개의 칼자루일 뿐이다. 법은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심리에 기초하고 있다. 인간의 가장 보편적 정감은 벌을 싫어하고 상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법은 반드시 쉬워야 하며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백성이 법의 저촉을 회피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백성이 형벌을 피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때 국가는 강성해질 수 있다. 형벌을 통하여 겁약한 백성들을 용감하게 만들고, 형벌을 통하여 가난한 백성들을 부유한 백성들로 변모시킨다. 그리고 부유한 백성들은 마냥 부유해지도록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상을 통하여 그 부를 흡수하여(작위를 주어 부를 빼앗는 등의 여러 방법 동원) 가난하게 만들어야 한다[貧者益之以刑則富, 富者損之以賞則貧]. 상앙의 원칙은 세 마디의 말로 집약된다. ‘빈자부(貧者富)’, ‘부자빈(富者貧)’, ‘국강(國强)’ 가난한 자가 부유해지고 부유한 자가 가난해지면 국가는 강해지기 마련이라는 것이다(「상군서』 「설민說民」 편을 참고하라), 이것은 곧 신흥중산층지주계급을 형성시켜 이들을 새로운 영토국가의 근간으로 삼고, 이들의 자발적 준법정신에 의하여 병력을 강화하고 국가를 부강케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시인 신동엽은 남산에 올라 서울을 쳐다보며 보리밭을 보습으로 갈아엎듯 전부 갈아엎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실제로 상앙은 그러한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은 것이다. 무릎을 맞댄 두 사람, 상앙과 효공은 어떠했을까?
상앙의 2차 변법 개혁을 통한 진나라 개혁
상앙(商鞅)의 논리가 이쯤 이르렀을 때, 효공은 무릎을 쳤다: “좋소! 그대 말대로 전적으로 이 나라를 바꿔보리다. 유감없이 그대 꿈을 펼치시오!” 효공은 상앙을 좌서장(左庶長)으로 삼았다. 그리고 효공 3년 제1차 변법개혁이 시작되고 효공 12년에 제2차 변법이 시행된다. 효공은 재위기간 24년 동안(BC 361~338) 단 한순간도 상앙을 좌절시키지 않았고 전적으로 그의 아이디어를 확실하게 실천하였다. 제환공과 관중(管仲)의 관계도 진효공과 상앙의 관계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다. 유비와 제갈량의 관계나, 송 신종(神宗)과 왕안석(王安石)의 관계가 모두 이 두 사람의 의기투합의 실천력에 비하면 크게 괴색(愧色)이 있을 뿐이다.
우선 제1차 변법의 내용을 살펴보자.
1) 십오법(什伍法)
열 집을 십(什)으로, 다섯 집을 오(伍)라는 주민자치단위로 조직하였다. 이 조직을 밀고를 위한 연좌제라는 식으로만 왜곡하는데, 이것은 새로운 영토국가의 토대를 만드는 필수적 작업일 뿐이다. 전국민의 호구조사를 명료하게 하여 일정한 단위로서 묶어 법률시행에 관한 자체적 연대책임제를 만든다는 것이다. 전국민의 주민등록화이며, 이것은 연좌라는 부정적 이미지만 아니라 상호부조하고 상이나 작위를 공동으로 받는 긍정적 기능도 있는 것이다. 지방의 아전ㆍ서리들의 세력을 약화 시킬 경우 이러한 자치조직은 법시행의 건강한 기초가 될 수 있다.
2) 분가(分家)
한 집에 성인 남자가 두 사람 이상 있으면서 분가하지 않으면 세금을 두 배로 늘린다.
3) 군공(軍功)
싸움터에서 얻은 적의 목의 수로 결정한다. 우리가 보통 ‘수급(首級)’이라는 말을 쓰는데 적의 모가지 하나가 군공의 한 급에 해당된다는 뜻이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임란 때 머리 전체를 운반하기 어려우니까 코로 대치했다. 조선 민중과 명군(明軍) 수십 만의 코가 일본병사들에 의하여 토요토미 히데요시 앞에 군공으로서 제시되었던 것이다.
4) 사투(私鬪) 금지
진나라 사람들은 본시 성격이 거칠어 사적인 일로써 싸움을 많이 했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길거리에서 보통사람들이 피튀기게 쌈박질을 하는 광경은 다반사였다. 지금은 그것이 ‘고소’ 때문에 사라진 것이다. 상앙은 일체의 사투를 금지시키고 사안의 경중에 따라 엄하게 형벌을 내렸다. 사투로 인하여 습속이 악화되고 국력이 감퇴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5) 생산의 장려
남자는 밭을 갈고 여자는 베를 짠다. 곡식이나 피륙을 많이 수확하는 사람은 부역과 부세를 면제받았다. 그러나 말리(末利, 상업이나 수공업)에 종사하는 자나, 게을러 가난한 자는 전부 체포하여 관청의 노비로 삼았다.
6) 귀족의 특권철폐
군주의 종실이라 할지라도 군공이 없으면 국가의 호적에도 올라갈 수 없었다.
7) 이십등작(二十等爵)
전 국민을 작위제도 속에 집어넣었다. 군공이 없으면 높은 작위를 받을 수 없다. 높은 작위일수록 받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니까 이 작제는 서민과 병사의 의욕을 높이는 데 그 주안점이 있었다. 전국민의 작위화는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사회도 암암리 치작(齒爵)이라는 것이 있다. 실제로 나이가 많아질수록 대접을 높게 받는 것이다. 그래서 나이를 따지는 것이다. 상앙은 이러한 작위제도 군공 중심으로 철저하게 만들었다.
제2차 변법 때는 군현제도를 강화하고 도량형을 통일시켰다. 중앙집권
적 관료체제를 강화한 것이다.
하여튼 상앙의 변법은 매우 효율적인 사회개혁이었으며 처음에는 반발이 심했지만 국민 모두가 이러한 제도가 우리의 살길이라는 의욕과 비젼을 갖게 되었고, 불과 수년 안에 가시적인 효과가 있었다. 그리고 강력한 군대를 갖게 되었으며 출병하는 족족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직접 군대를 끌고나가 위혜왕에게 패배를 안겨주었다. 위혜왕은 수도를 안읍(安邑)으로부터 대량(大梁)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위나라가 안읍을 포기했다는 것은 진나라의 동진을 막고있는 가장 중요한 길목을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위혜왕은 안읍을 포기하면서, 그때서야, “과인이 공숙좌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한스럽다”라고 한숨을 내쉬었다고 한다. 위혜왕은 상앙이 국경을 넘도록 내버려둠으로써 양혜왕이 되었고, 진나라는 강성대국으로서 뻗어나갈 수 있는 모든 기초를 닦았다.
거열형으로 죽은 상앙이 남긴 희망찬 미래
양혜왕의 또 하나의 실수는 손빈(孫臏)을 알아보지 못하고 방연(龐涓)을 장군으로 삼아 그 유명한 마릉의 전투(BC 341)를 치른 것이다. ‘방연! 너는 이 나무 아래서 죽는다[龐涓死于此樹之下]’이것은 너무도 유명한 병가의 일화지만 실로 그것은 방연의 죽음일 뿐 아니라, 위나라의 몰락이자, 양혜왕 개인의 패업과 카리스마가 사라지는 역사적 에포크를 의미했다. 방연이 죽었을 때 맹자의 나이 32세였고, 맹자는 한참 왕성하게 노나라와 제나라에서 학업을 연마하고 있었을 시기였다. 마릉의 전투가 있은 지 3년 후에 진효공이 죽는다. 상앙(商鞅)의 죽음은 이미 필연의 종말을 향해 달려가는 드라마의 마지막 씬이 될 수밖에 없었다. 상앙은 태자(훗날의 혜문군惠文君)가 새로 반포된 변법에 저촉되는 행동을 하자 그를 직접 처벌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사부(其傅)인 공자건(公子虔)을 벌하고, 그의 태사인 공손가(公孫賈)를 경형(黥刑)에 처하였다(그의 얼굴을 찢고 죄인임을 표시하는 문신글자를 새겨넣는다). 그리고 후에 공자건이 다시 법을 어기자 요번에는 코를 베어버리는 의형에 처해버렸다.
상앙은 효공의 죽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운명이 어떠리라는 것도 잘 알았을 것이다. 조량(趙良)이라는 진나라의 현자가 상군의 가혹함을 지적하며 곧 공자건 등의 무리가 그를 죽일 것이라는 예언을 하지만 상앙은 그의 충고를 따르지 않았다. 상앙의 위대성은 자신의 신념의 일관성을 고수하고 자신의 삶 속에서 구차스러운 타협을 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만약 그가 그러한 타협을 했더라면 그는 얼마든지 사전에 보신(保身)의 길을 모색할 수 있었다. 나는 그가 거열형에 처해진 순간에도 그의 제도가 이미 어느 누구도 건드릴 수 없을 정도로 정착된 것을 확인하고 해피하게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상군이 도망치다가 함곡관의 객사에서 묵으려 할 때 여인숙의 주인이 “여권[驗]이 없는 사람에게 숙소를 제공하면 상군의 법에 의하여 연좌되어 형벌을 받습니다[商君之法, 舍人無驗者坐之]”라고 했다는 고사는 길로틴의 이야기처럼 코믹하게 회자되고 있지만, 실상 그것은 엄형주의의 비참한 말로가 아니라 객관적 법제질서 정착의 희망찬 미래를 예견하는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말해야 옳다.
태사공이 상군을 가리켜 천자(天資)가 각박(刻薄)한 사람이라 평한 것[其天資刻薄人也]은 결코 상군에 대한 정당한 평가일 수 없다. 후대의 유가적 가치에 의해 상군을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소위 ‘중국 (China)’이라고 말하는 대제국의 현실적 원형은 모두 상앙과 진효공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순자(荀子)』 「강국(彊國)」편에 보면 순자가 훗날 직접 진나라를 방문해보고 그 소감을 기술한 대목이 있다. 그 민속이 순박하고, 지방의 하급관리들이 한결같이 공손하고 검소하고 인정이 넘치며, 도성 안의 사대부 벼슬아치들도 아첨하거나 당파를 짓지 아니 하며 공평무사하며 퇴근하는 즉시 가정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조정을 들어가 보아도 깨끗하고 조용하며 백 가지 일들이 그때 그때 즉석에서 처리되어 너무도 한가롭고 편안한 모습이라 마치 정치를 하지 않는 태평한 나라라는 느낌이 든다고 회술해놓고 있다.
상앙의 패러다임이 그대로 지속되었음을 입증해주는 소중한 기록이라 할 것이다. 진나라에는 상앙의 시대가 끝나고 장의(張儀)의 외교적 활약이 시작된다. 그리고 결국 여불위(呂不韋)가 등장함으로써 상앙이 배제했던 상인계급들을 포용하게 된다. 진시황의 통일은 이러한 배경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스러진 위나라를 일으키려는 양혜왕의 노력
양혜왕은 마릉의 전투에서 대패한 후에도 끊임없이 당대의 인물들을 초치하여 쇠약해져가는 위나라의 패업을 다시 일으키려고 노력하지만 모두 상앙의 상황과 같은 패턴을 반복했을 것이다. 장자(莊子)의 절친한 친구 혜시(惠施)도 양혜왕 밑에서 재상을 하면서 입법(立法)을 했다. 『장자(莊子)』 「추수」편에 나오는 ‘봉황[鵷鶵]과 썩은 쥐[腐鼠]’의 이야기도 바로 혜시가 양혜왕 밑에서 재상노릇 하고 있을 때를 배경으로 한 것이다. 장자가 친구 혜시가 그리워 찾아오는데 혜시는 재상자리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했다. 그리하여 혜시는 삼일삼야 밤낮으로 국중을 다 뒤져 장자를 수색하게 했다. 장자는 그 소식을 듣고 불쑥 자진해서 혜시에게 나타났다. 그리고 말했다: “그대는 아는가? 저 남쪽바다를 박차고 드높게 솟아 북해로 날아가는 봉황을! 그 새는 오동(梧桐)이 아니면 앉지를 않고 연실(練實)이 아니면 먹지를 않고 예전(醴泉)이 아니면 마시질 않네. 이때에 올빼미새끼는 썩은 쥐 하나를 물고 있다가 봉황이 날아가는데 치켜보고는 캬악 소리를 지르는 거야. 그대 겨우 양혜왕 수상자리 하나 물고 나에게 캬악 하는 거냐[子知之乎? 夫鵷鶵發於南海而飛於北海, 非梧桐不止, 非練實不食, 非醴泉不飮. 於是鴟得腐鼠, 鵷鶵過之, 仰而視之曰: ‘嚇!’今子欲以子之梁國而嚇我耶]?”
어느 정도 희화된 고사이기는 하지만 상당히 진실된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라고 간주되는 것이다. 혜시가 양혜왕 밑에서 수상노릇 한 것이 바로 맹자가 양혜왕을 만나기 몇 년 전의 일이다. 혜시는 지대무외(至大無外)가, 지소무내(至小無內)를 말하며, 범애만물(氾愛萬物), 천지일체(天地一體)를 말한다. 그는 수상으로서도 평화주의적 입장을 취했을 것이라고 사료된다.
양혜왕은 맹자가 양혜왕을 만나기 두 해 전에 장의(張儀)를 수상으로 삼아 연횡정책을 취하면서 혜시를 해임한다. 그리고 또다시 장의는 본시 위나라의 모사인 합종파의 공손연(公孫衍)이 재상이 되면서 해임된다. 실로 맹자가 양혜왕을 만났을 때는 이러한 합종과 연횡으로 국론이 분열되어 있던 시기였다【전국시대 사건들에 관하여 정확한 연대를 묻기는 곤란하다. 사마천의 기사가 시간 순서에 따라 따져보면 마구 얼크러져 있기 때문이다. 양혜왕의 후원(後元) 1년이 양왕(襄王) 원년(元年)으로 오인되는 등 선후가 맞질 않는다. 요즈음의 학자들은 사마천의 「육국연표(六國年表)」보다는 진(晉)나라 무제(武帝) 태강(太康) 2년, AD 281 흡총(汲冢)[양양왕(梁襄王)의 무덤일 가능성]에서 나온 『죽서기년(竹書紀年)』을 기준으로 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죽서기년』도 고본 그 자체가 아니다】.
직하의 거물 순우곤(淳于髡)도, 음양가의 대표적인 인물 추연(鄒衍)도 다 양혜왕의 초빙을 거쳤다.
이제 맹자와의 만남은 그가 죽기 일 년 전에 이루어진 것이다. 맹자는 불행하게도 막차를 탄 셈이다. 그리고 양혜왕은 이미 치세 50년을 통하여 달관할 대로 달관한 인물이지만 더 이상 새로운 의욕을 가질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그의 나이 이미 81세였다. 맹자는 전국시대의 가장 먼저 칭왕(稱王)했고 가장 성대했던 맹주의 기울어져가는 황혼의 마지막 모습을 목격하고 있을 뿐이다.
‘맹자, 양혜왕을 만나다!’ 이 첫마디에서 우리는 이제 양혜왕이라는 인물에 관하여 대강의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우리가 반드시 던져야 할 질문은 맹자가 과연 누구인가 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맹자가 누구이길래 양혜왕을 만날 수 있었는가? 이 두 사람의 만남은 과연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가?
맹자의 53살 이전의 삶은 알 수 없다
맹자, 그는 누구인가? 이런 질문을 새삼 던지는 나를 독자들은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여태까지 말하지 않았는가? 우리가 여태까지 맹자라는 사람에 관해서 이야기한 것은 조기의 「제사」에 나타난 맹자기술을 상술하는 과정에서 『사기(史記)』 「열전」이나 『열녀전』 등등의 자료를 소개한 것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맹자라는 인간에 관해서 알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일차자료는 『맹자』밖에 없다. 『사기(史記)』 열전이나 한영, 유향의 기술은 모두 후대의 기술이며, 구전 등의 소문이나 추측에 의한 것일 뿐이다.
최근에 ‘정봉주(鄭鳳株) 깔때기’【‘나는 꼼수다’라는 팟케스트에서 시작된 것으로 어떤 주제의 이야기가 나오든 그걸 자신을 자랑할 소재로 치환하는 것】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는데, 『맹자』라는 문헌은 기본적으로 ‘맹자 깔때기’의 기록이라고 확언할 수 있다. 맹자라는 인간이 있고, 그 인간이 지속적으로 깔때기 까는 생생한 모습이 들어있다. ‘깔때기’라는 것은 자신의 신념이나 행보에 대한 확신이다. 한 사람이 일관되게 깔때기 까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는 것은 그 문헌의 신빙성을 높여주는 것이다. 즉 『맹자』는 맹가라는 역사적 인간이 자신의 신념이나 비견을 피력하기 위하여 모든 문답이나 어록, 그리고 당면한 주변상황을 자기중심으로 엮어놓은 문헌이다. 그런데 이 맹자깔때기의 첫 구절이 ‘맹자견양혜왕(孟子見梁惠王)’으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하드 팩트(hard fact)에 직면하게 된다. 즉 우리가 맹자에 관하여 알 수 있는 확실한 정보는 맹자가 양혜왕을 만난 시점 이전으로는 소급이 되질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맹자가 맹자 깔때기를 깐 후에 ‘나의 인생역정’이라는 소전(小傳)을 따로 써서 친절하게 부록으로 붙여놓았다면 얼마나 좋았으랴마는, 옛 사람들은 그런 친절한 짓을 하지 않았다. 맹자가 양혜왕을 만난 시점은 BC 320년이 확실하고 그 다음해에 양혜왕이 죽었으므로, 맹자는 53세의 나이였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맹자」라는 서물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맹가는 양혜왕을 만난 53세 이후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53세 이전의 맹자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어디서 뭘 하는 사람이었을까? 그 대답은 매우 확실하다. ‘모른다!’
실로 53세 이전의 맹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안다고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모두 ‘구라’다! 4복음서의 원형이라 말할 수 있는 마가복음은 이렇게 시작한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즉 예수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는 사건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때 이미 예수 나이 서른 살 정도였다. 서른 살 이전의 예수는? 그 대답도 똑같다. ‘모른다.’ 다시 말해서 예수이든 맹자이든, 그들의 공생애 활동을 기준으로 그들의 삶의 역사적 가치를 형량하는 것이다. 그 이전의 사생애는 기본적으로 후대에 형성된 설화의 반영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마가복음은 예수의 공생애의 기록이고 『맹자』는 맹가의 공생애의 기록이다.
맹자의 깔대기 수준
그렇다면 이 맹가의 역사적 공생애의 첫 장면에서 맹가와 양혜왕 이 두 사람의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우선 그 장면 그 자체를 섬세하게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맹자견양혜왕(孟子見梁惠王). 왕왈(王曰): 수불원천리이래(叟不遠千里而來), 역장유이리오국호(亦將有以利吾國乎)?’라는 첫마디를 잘 검토해보면 명료하게 기술되어 있지는 않지만, 초청한 사람을 양혜왕이 직접 나아가 마중하는 듯한 분위기가 있다. 그런데 맹자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예수는 혼자 터벅터벅 걸어가서 요단강 하류에서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사람들에게 물 세례를 베풀고 있는 광야의 사나이 요한을 만난다. 그것은 그야말로 뜨거운 사막의 뙤약볕 아래 광야의 두 헐벗은 사나이가 죄많은 시대의 울분 속에서 어떤 혁명을 모의하기 위하여 만나는 장면이다. 그러나 맹자는 혼자 가지 않았다. 그리고 상대는 썩어도 준치라고 당대의 최고의 패권을 누렸던 대왕이다.
「등문공」 하4에 보면 이런 장면의 실제정황을 묘사하는 매우 리얼한 문답이 있다. 맹자의 제자인 팽갱(彭更)이 좀 속이 캥겨서 묻는다: “일개의 선비로서 뒤에 따르는 수레가 수십 대요, 또 종자 수 백 인을 거느리고 다니면서 이 제후에서 저 제후에로 밥을 얻어먹는 것이 너무 지나치지 아니 합니까[後車數十乘, 從者數百人, 以傳食於諸侯, 不以泰乎]?” 이에 맹자가 대답한다: “그 도가 아니라면 한 그릇의 밥이라도 남에게 받아서도 안 되지만, 만일 그 도라면 순임금은 요임금의 천하를 받으시면서도 지나치다고 여기지 않으셨으니, 그대는 이것을 지나치다고 여기는가[非其道, 則一簞食不可受於人; 如其道, 則舜受堯之天下, 不以爲泰, 子以爲泰乎]?” 팽갱이 대답한다: “아니올시다. 선비가 별로 하는 일도 없이 남의 밥을 얻어먹는 것이 불가하다는 생각이 들 따름이오니이다[否. 士無事而食, 不可也].”
여기 중요한 것은 맹자가 양혜왕을 만났다는 사건이 맹자 혼자 만난 것이 아니라, 수레 ‘수십승(數十乘)’ 종자 ‘수백인(數百人)’ 거느리고 만났다는 사실이다. ‘수십’ ‘수백’을 어떻게 해석한다 해도, 최소한 20승, 200인은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보자! 한국의 여당 당수가 나 도올에게 치세의 경략을 묻기 위해 만나기를 청했다고 하자! 그의 저택에서 만나기로 되어있는데 내가 까만 에쿠스 리무진 20대와 200명 정도의 종자를 거느리고 나타났다고 하자! 누가 보든지 좀 과하다[泰]는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결국 대화인즉슨 사상가인 나와 정치가인 당수 두 사람만이 하는 것이다. 맹자의 경우도 동일하다. 그 맹자그룹에 끼어 있던 제자 한 사람이 스스로 캥겨서 반문했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상식적으로 지나친 상황이라고 하는 그 정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한 꺼림칙할 수도 있는 정황을 두고도 맹자는 당당히 변호한다: “나에게 치세의 방법을 묻는다고 하는 것은 순임금이 요임금에게 천하를 물려받는 것과도 동일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순임금은 천하를 받아도 과하다고 생각치 않았는데, 어찌 수레 수십 대 종자 수백 인 정도의 신세를 지나치다고 생각하는가!” 하여튼 그 ‘깔때기’의 수준이 우리가 상상하는 수준을 뛰어넘는다. 인류역사상 맹자처럼 별 볼일 없으면서도 ‘당당한’ 대장부(大丈夫)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또 그러한 대장부를 대접할 줄 아는 전국시대의 문화적 풍토에 관하여 우리는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 극도의 혼란과 전란의 시기였지만, 극도의 아이디얼리즘(Idealism, 이상주의)과 로맨스가 허용된 시기였다.
여기 ‘수(叟)’라는 표현으로 보아도 맹자는 별다른 관직이나 지위가 없는 평범한 선비에 불과했다. 그런데 여기 ‘불원천리(不遠千里)’라고 했지만 실제로 추나라에서 대량까지는 천리(千里)가 훨씬 넘는다. 수레에 탄 사람, 그리고 그 뒤를 따라 걸어가는 사람을 합치면 최소한 300명은 된다고 치자! 그 300명의 인원이 추 땅에서 대량까지 간다는 것은 엄청난 비용이 든다. 더구나 이 정도의 행렬이 가려면 방어용 군사를 고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최소한 한 달 이상의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이 비용은 누가 댔는가? 그것은 물론 양혜왕이 댄 것이다. 맹자는 평생 초청 없이 어디 가서 기웃거리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그는 원칙적으로 초청에 응해서만 움직였다. 그의 은퇴는 더 이상의 초청이 없었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은행에서 대출받으려고 하는 사람일수록 삐까번쩍 하는 외제고급 승용차를 굴리는 성향이 있다. 맹자는 이왕 초청받는 마당에 공자처럼 ‘상가집개[喪家之狗]’로 보이기는 싫었을 것이다. 맹자의 성격은 현시적이고 당당하고, 신세를 져도 그것을 신세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 몇 배의 이득을 상대방에게 주고 있다고 자신하는 것이다. 하여튼 우리는 『맹자』라는 문헌을 읽을 때 이러한 소소한 생활사적인 문제들을 곱씹어봐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상앙의 현실주의와 맹자의 이상주의
그렇다면 도대체 맹자가 뭐길래, 위나라의 찬란한 패업(霸業)의 꿈이 스러져 가는 판에 그 많은 돈을 들여서 그를 초청한단 말인가? 바로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는 맹자라는 인간을 추론할 수밖에 없다. 양혜왕에게는 전국시대 전반 당대의 최고의 지성인들이 거쳐갔다. 그렇지만 별 효험을 보지 못했다. 그가 효험을 보지 못한 것은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일차적으로 양혜왕 본인의 문제이다. 그렇지만 양혜왕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양혜왕을 거쳐 간 사람들을 일별해 보면 법가ㆍ병가ㆍ명가ㆍ음양가ㆍ종횡가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고, 이들을 탄생시킨 조종에 해당되는 공자의 적통을 이은 인물은 없었다. 아마도, 이것은 나의 소박한 추측이기는 하지만, 맹자가 추나라에서 태어났고 현모 슬하에서 성장하여 곡부지역에서 유학을 했다면, 50여 세의 맹자는 그 지역의 정통 유학을 대변하는 ‘추로(鄒魯)의 진신선생(搢紳先生)’으로서 확고한 학통과 학단을 장악하고 있는 대학자로서 명망이 높은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양혜왕은 죽기 전에 최후로 추로의 본향에서 대석학을 초빙한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맹자라는 인간에 관하여 말할 수 있는 전부다. 더 알고
싶은 사람은 『맹자』라는 텍스트를 통하여 추구해 들어갈 수밖에 없다.
양혜왕의 입장에서는 모처럼 거금을 들여 당대의 대석학을 초청한 마당에 ‘리오국(利吾國)’을 말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기대의 소산이다. 그런데 그러한 양혜왕에 대하여 다짜고짜 ‘하필왈리(何必曰利)’를 말하는 맹자의 배포는 요즈음 우리가 말하는 ‘깔때기’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거기에는 깔때기를 뛰어넘는 무슨 절박한 가치나 소망과 비젼의 고차원적 에너지가 맹자의 가슴에 들끓고 있지 않으면 아니 된다. 우리는 이미 상앙의 리얼리즘을 충분히 검토한 바 있다. 상앙의 리얼리즘은 양혜왕이 추구했어야만 하는 당대의 시의적절한 가치였다. 상앙은 말한다. 예와 법은 시세에 맞추어 정하고, 제도와 명령은 각각 오늘의 마땅함을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禮法以時而定, 制令各順其宜].’ ‘성인은 옛 것을 모범으로 삼지 않고 오늘날 것을 고집하지 않는다[聖人不法古, 不脩今]’ ‘시대상황에 따라 거기에 맞는 정책을 세우고, 백성들의 습속을 헤아려 거기에 맞는 법령을 제정하라[因世而爲之治, 度俗而爲之法].’
이토록 명료한 방편적 시대정신에 비한다면, ‘리(利)’에 대하여 ‘인의(仁義)가 있을 따름’이라고 외치는 맹자의 사고방식은 확실히 아둔하고 우활하기 그지없다. 맹자가 과연 상앙과 같은 현실적 감각이 없는 인물이었을까?
공자의 주유와 맹자의 주유
맹자는 과연 왜 양혜왕을 만났을까? 돈 대줘서 부른다고 그냥 간 것일까? 맹자의 입장에서 양혜왕을 만나야만 했던 이유, 그 이유를 우리는 맹자의 내면적 정신세계로부터 설명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조기는 맹자가 열국을 주유한 것이나 공자가 주유천하한 것이 모두 같은 동기에서 우러나오는 같은 패턴의 행동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양자는 성격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우선 명료하게 지적해야 한다. 공자가 주유천하한 것은 명료한 목적이 있다. 그것은 벼슬을 얻기 위한 것이다. 자신의 신념을 모국인 노나라에서 실현해보려고 했는데 그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노나라를 떠나 타국에서 대부의 자리를 얻고자 했다. 자기의 신념을 구현해볼 수 있는 이상향을 얻고자 한 것이다. 대부의 자리면 식읍(食邑)을 받기 때문에 그곳을 자기 마음대로 운영해볼 수가 있다. 공자의 꿈은 매우 소박한 것이다. 조그만 이상촌을 꾸려보고 싶은 것이다. 만약 공자에게 그러한 지위가 주어졌다면 공자는 매우 평범한 인간으로 죽고 말았을 것이다. 공자의 위대성은 대부의 지위를 얻지 못하고 노나라로 다시 귀국하여 뚜렷한 지위는 없지만 국부(國父)로서 만민만대를 위하여 시ㆍ서를 편찬하고 제자를 길렀다는 데 있다. 공자가 어느 나라에선가 확고한 벼슬자리를 얻었다면 춘추시대의 평범한 대부의 한 사람으로서 이국땅에서 소리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맹자가 열국을 주유한 것은 공자의 문제의식과는 매우 다르다. 맹자는 벼슬하기 위하여, 확고한 토지의 분봉을 받기 위하여 출유한 것이 아니다. 그럼 무엇 때문인가? 이미 전국시대는 공자와 같은 소박하고도 안정적인 꿈이 무의미한 시대였다. 벼슬자리 하나 해본들, 분봉을 받아본들, 그것은 어느 순간에 잿빛 무덤이 되어버리고 말 수가 있다. 전국시대의 유세객들은 대체적으로 개인의 상향이나 영달보다는 통일천하를 향해 달리는 시세의 격랑 속에서 어떻게 국가와 민중을 구원할까 하는 보다 긴박한 사명감을 지닌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전국시대에는 모든 로컬한 사건도 국제적 감각이 없이는 해결할 길이 없었다. 따라서 맹자는 벼슬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자기 말을 들어줄 수 있는 군주를 만나기를 원했다. 그런 의미에서 상앙과 진효공의 결합은 전국시대 지성인이 추구한 가치의 지고태(至高態)의 한 실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맹자는 항상 ‘왕의 고문’으로서 자처했다. 다시 말해서 왕 아래 있는 행정관료의 직책을 원하지 않았다. 그것은 왕의 명령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수동적 자리일 뿐이다. 자기는 왕 위에서 왕을 부리는 능동적 주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왕을 바라보는 태도는 야훼가 다윗을 바라보는 듯한 시각이 있다. 그러한 시각이 없으면 ‘혁명’이론은 탄생되지 않는다. 민중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항시 갈아치울 수 있는 것이 왕이다.
공자의 주유(周遊) | 맹자의 주유(周遊) |
벼슬을 얻어 신념을 구현함으로 조그만 이상촌 구현하는 것 | 왕 위에서 왕을 부리는 능동적 주체가 되는 것 |
상향의 공자와 하향의 맹자
『맹자』라는 서물과 『논어(論語)』라는 서물은 여러 가지로 성격이 다르지만, 가장 두드러지는 본질적 차이는 나는 ‘민중관’에 있다고 생각한다. 공자는 결코 ‘민중’을 생각한 사람이 아니다. 공자는 ‘민중’을 깔보지는 않았지만(약간 깔본 듯한 구석도 찾아보면 없지는 않다), 인간에 대한 보편적 사랑이 있지만, 가장 하층민의 일반대중을 위하여 자기생명의 가치를 전적으로 불사르겠다는 생각은 없다. 공자의 일차적 관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士)’의 전범을 창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사의 교양, 그 커리큘럼의 전범을 그의 삶 속에서 구현하려고 했다. 그것은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의 내면적 수양이다. ‘나는 하늘을 원망치 않노라. 나는 사람을 탓하지 아니 하노라. 나는 비천한 데서 배워, 지고의 경지에까지 이르렀노라. 이 나를 아는 이는 저 하느님이실 것이로다[知我者, 其天乎]!’그의 궁극적 관심은 하늘로 향하고 있다. 서구적 의미에서 종교적이지는 않지만 그의 삶의 지향처는 매우 형이상학적이다. 공자에게는 평생 ‘상향(上向)’의 갈망이 있었다. 공자는 그의 삶의 이상을 토로하는 자리에서도 다음과 같이 소박하게 말할 뿐이다. 늙은 이들을 편안케 해주고, 친구들에게 믿음을 주고, 젊은이들에게 끊임없는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그런 사람이 되고플 뿐이야[老者安之, 朋友信之, 少者懷之]’ 그 얼마나 소박한 이상인가! 여기에는 민중의 고난에 대한 열렬한 사명감 같은 것은 엿보이지 않는다. 시대적 문제의식이 근원적으로 다른 것이다.
공자가 ‘상향’의 발돋움을 한 사람이라면 공생애의 맹자는 철저한 ‘하향’의 사명감이 있다. 맹자에게 있어서 가장 두드러지고 있는 것은 당대 민중의 고초에 대한 열렬한 공감이다. 그의 민중의 삶에 대한 묘사는 『맹자』라는 텍스트에 즉하여 보면 너무도 처참하다. 민중은 일상적 삶 속에서도 약, 가뭄, 홍수, 한해(寒害), 기근에 시달린다. 이들은 이러한 악조건에도 굴하지 않고 경작, 제초, 관개 등의 노동에 전력을 다한다. 그러나 이렇게 괴롭게 달성하는 작은 평화도 군주의 학정에 항상 무너지고 만다. 청장년의 힘있는 농부들은 모두 노역에 끌려가고 농번기에 경작을 돕는 것이 불가능하다. 오직 반백(頒白)의 노인들만이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머리에 이고 힘든 행보를 할 뿐, 게다가 전쟁이 속발하면, 전사자가 너무 많아 한둘의 과부가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면 전 마을의 과부들이 통곡을 한다. 세율이 높고 착취가 심하다. 농민은 곡물과 직물을, 상인은 상품세와 시장세를, 여인(旅人)은 관세(關稅)를 와장창 뜯길 뿐이다. 식량ㆍ의료는 물론, 연료ㆍ재목도 없다. 따라서 기근이 들면 도랑이나 웅덩이에 노인과 어린이의 시체가 뒹굴고 여우와 이리떼가 달려들고 나면 파리와 구더기가 드글드글, 멀쩡한 청년들이 수천 명의 부랑민이 되어 도적으로 영락(零落)하기가 일쑤, 군주와 관료는 이런 참상에도 무위무책(無爲無策), 선심 쓴다는 것이 고작 강제이민 아니면 식량방출, 그러나 다음 해에는 엄청난 고리(高利)가 붙는다. 군주와 귀족이 대토지를 독점하고 그곳만이 초목이 번성하고 금수가 군서(群棲)하지만 그곳을 개방하여 민중에게 부식(副食)이나 연료를 보충해주는 사례는 있어본 적이 없다. 금령을 어기고 사슴이라도 죽이면 당장 사형. 궁정의 곳간에는 맛있는 고기가 치렁치렁 걸려있고 군주와 측근의 인물들만이 미식을 흠상하고 있다. 이런 학정에 시달리는 민중이 군주나 관료의 명령에 항거하며 하루 빨리 나라가 망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당연한 것. 폭군을 타도하는 해방자가 나타나면 누구인들 환영하고 참여하지 않을소냐!
맹자가 독특한 개념인 인의(仁義)
맹자나 상군이나 민중의 삶을 구원해야만 한다는 시급한 사명감은 동일하다. 그런데 왜 우원하게 인의(仁義)를 말하고 있는 것이냐! 맹자여! 자아~ 여기 잠깐만 ‘인의(仁義)’라는 말을 분석해보자, 공자는 ‘인(仁)’을 말했을 뿐, ‘인의(仁義)’를 말한 적이 없다. 여기 ‘리(利)’에 대하여 ‘인의(仁義)’를 말한 것은 맹자의 독특한 포뮬레이션(formulation)이다. 자사도 ‘인의(仁義)’를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 제1장에서 맹자가 ‘인의(仁義)’를 말한 것을 보면 결론부분에 ‘인(仁)’이 ‘친(親)’과 결부되고, ‘의(義)’가 ‘군(君)’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맹자는 양ㆍ묵과의 대결을 선언하고 나선 사람이다. 묵적은 겸애(兼愛)를 주장했는데 그것은 무부(無父)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맹자는 비판한다. 그리고 양주(楊朱)는 위아(爲我)를 주장했는데 그것은 무군(無君)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맹자는 비판한다. 다시 말해서 공자가 말했던 인간의 도덕적 심미안의 총체적 근거였던 인이라는 감성적 느낌이 맹자에 이르러서는 대학파(對學派)적 논쟁(argument)의 핵심개념으로서 개념적 분화를 일으킨 것이다. 즉 맹자의 ‘인(仁)’은 공자의 ‘인(仁)’이 아니다. 그것은 묵자(墨子)의 겸애설을 비판하기 위한 가족윤리로서의 ‘인(仁)’이다. 공자는 ‘의(義)’도 개념화해서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맹자는 ‘의(義)’를 ‘인(仁)’과 짝하는 가치로서 개념화시킨다. 그것은 양주의 아나킥(anarchy)한 위아설(爲我說)을 비판하기 위한 사회적 가치이며 군신도덕을 핵으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전국시대의 공리주의적ㆍ리얼리즘적 ‘리(利)’의 가치에 대하여 맹자가 말하는 대자적(對自的)인 ‘인의(仁義)’의 가치가 긴박한 현실을 개변하는 리얼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물론 대답은 명료하다. 맹자는 그렇게 생각한다. 인의설을 실천하는 패도(覇道) 아닌 왕도(王道)만이 전국의 현실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맹자는 무슨 근거 위에서 그렇게 생각하는가? 바로 이 질문에 해답을 주는 것이 맹자의 ‘민중관’이다.
인(仁) | 의(義) |
가족윤리 | 사회적 가치이자 군신도덕 |
묵적의 겸애(兼愛) 방어 | 양주(楊朱)의 위아(爲我) 방어 |
왕도론이 지닌 현실주의
맹자가 살았던 시대는 오늘날 트위터가 발달하고 온갖 엔지오 그룹들이 활약하는 시대양상과는 너무도 달랐기 때문에 민중이 스스로 역사를 개변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군중이 자율적인 정치력을 형성하기에는 너무도 장애가 많고 가야할 길이 멀다는 것을 그는 잘 안다. 전국시대의 어느 사상가도 이러한 신념을 갖지는 못했다. 이러한 신념은 인류사에서 산업혁명(Industrial Revolution) 이후에나 가능해진 것이다. 따라서 역사를 개변시킬 수 있는 힘은 군주에게서만 나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맹자는 그토록 왕의 멘토 노릇을 하려고 주유천하 한 것이다. 그러나 한편 오늘날에도 국민이 뽑은 대통령 한 사람이 잘하고 못하는 데 따라 국운이 그토록 좌우되는 꼴을 본다면 맹자의 믿음의 정당성은 만고에 통용되는 측면이 있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만은 없다. 유력군주의 천하통일과 민중의 평화갈망을 섬세한 이해득실이나 제도적 장치의 고려가 없이 막바로 일치시켰다는 것이야말로 전국시대의 사상가들이 범한 공통의 오류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맹자는 민중의 갈망을 인간 본연의 자리에서 분석하고자 하는 것이다.
상앙(商鞅)은 전쟁을 없애는 유일한 길은 전쟁뿐이라고 말했지만[이전거전(以戰去戰), 이살거살(以殺去殺)], 맹자는 그러한 패도의 길로서 전쟁이 없어지는 대일통의 세계가 온다고 해봤자, 그것은 잠정적인 현상일 뿐 인간 본연의 자리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진정한 평화로운 세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상앙은 전국의 혼란을 현실적으로 해결한 가장 위대한 사상가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가 만든 진제국은 순식간에 무너졌을 뿐 아니라, 그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도 심원한 악영향을 끼쳤다. 중국역사를 통하여 통일제국의 코스모스보다 전국의 카오스를 가치론적으로 우위에 두는 꾸준한 열망이 있다. 그렇다고 맹자가 우활한 이상향에 집착한 것은 아니다. 맹자는 상앙 못지않은 긴박한 시대의식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왕도론이야말로 가장 현실적 대안이라고 생각했다. 과연 어떠한 근거 위에서 맹자는 그렇게 생각한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맹자』를 읽을 때, 이러한 간단하지만 미묘한 문제를 건드리지 않는다. 맹자는 과연 무슨 근거 위에서 왕도론이 가장 현실적 대안이라고 믿은 것일까? 이 질문에 해답을 주는 것도 그의 민중관이다.
자기가 당면한 전국시대야말로 민중이 너무도 피폐한 상황에 놓여있기 때문에 현명한 군주가 조금의 ‘은혜’라도 베풀면 민중은 너무도 쉽게 감격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민중의 ‘심복(心服)’의 에너지는 법치보다 훨씬 더 효율적으로 국부를 이룩할 수 있는 방편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민중의 귀복권(歸服圈)은 메마른 야산의 들불처럼 번져나갈 수가 있다. 한 군주라도 진정한 왕도를 실현하기만 하면 천하가 다 그를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더구나 위나라 정도의 성세를 가지고 있는 나라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맹자는 계산하는 것이다. 이상적 군주의 왕도정치야말로 치자의 천하통일과 피치자의 평화갈망이 일치하게 되는 유일한 첩경이다.
이런 문제와 관련하여 맹자가 구상한 미래사회가 과연 상앙이 생각한 것과 같은 무력에 의한 획일적 제국의 꿈이었나 하는 것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맹자는 한 제국에 의한 획일적인 통일을 기대한 것 같지 않다. 그는 전국의 모든 나라들이 왕도를 구현하면서 서로가 전쟁을 포기할 때 느슨한 연방과도 같은 새로운 제국이 생겨나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주왕실은 이미 쇠퇴하였지만 그를 대치하는 새로운 왕도의 나라가 생겨나면, 각국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유지하면서도 서로 자유롭게 소통되는 그런 통일체가 형성되리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매우 미묘한 주제이며 『맹자』라는 텍스트 속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철학은 영원한 인간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럿셀은 『나의 철학적 발전(My Philosophical Development)』【제18장 비판에 대한 대답(Some Replies to Criticism)】이라는 책 속에서 20세기에 영국철학계를 지배한 가장 강력한 세 조류가 있다고 본다.
첫째는 『트락타투스(Tractatus)』를 중심으로 한 비트겐슈타인의 전기사상이고,
둘째는 논리실증주의자들(Logical Positivists)의 영향이며,
셋째는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를 중심으로 한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사상이다.
첫째는 럿셀 자신이 스승으로서 길러낸 사유의 세계이며 매우 명료한 사고와 열정이 엿보이는 좋은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둘째는 세부적으로 약간의 문제는 있다 해도 기본적으로 철학적 문제를 명료하게 만드는 데 공헌한 훌륭한 철학이라고 본다.
그런데 셋째의 비트겐슈타인 후기사상(WⅡ)은 도무지 흐리멍텅 하여 뭐가 뭔지 알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 따위를 철학이라고 말한다면 철학은 사전편찬자들을 위한 참고서 수준이나 다방에서 나누는 우스개담론(an idle tea-table amusement)에 머물고 말 것이라는 것이다. 도대체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사상에서 그토록 많은 지혜를 발견한다고 떠벌이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혹평한다.
나는 럿셀의 이토록 무지막지스러운 평론을 매우 사랑하고 존경한다. 솔직한 자기 느낌을 그대로 토로하는 것이다. 철학적으로 20세기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비트겐슈타인을 이렇게 폄하하는 럿셀의 자세는 비방 아닌 진정의 표시라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럿셀이 후기 비트겐슈타인을 그렇게 느끼는 것은 럿셀이 오직 자기가 생각하는 ‘철학’이라고 하는 문제의식의 맥락에만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추구해 온 분석철학 제문제 속에서 게임을 해야만 철학적 엄밀한 사유의 논리적 구조가 생겨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본시 철학을 공부한 사람이 아니다. 철학 밖에서 철학 속으로 틈입(闖入)한 사람이며, 그 속에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때 다시 뛰쳐나간 사람이다. 그는 철학자들이 철학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망상을 하루속히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철학을 위해서 철학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근원적으로 철학을 부정한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논리에 얽매여 숨도 못 쉬는 많은 사람들에게 자유로운 사유의 숨통을 틔워 주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영국철학의 인너 써클에서보다는 세계인의, 그리고 철학 밖의 분야에 종사하는 수없는 사람들에게 탁월한 예지의 혜망(彗芒)을 허락하였던 것이다.
맹자를 우리는 우활하다고 비난할 수도 있겠으나, 우리가 반드시 전제해야 할 사실은 맹자는 시대에 순응한 사람이 아니라 시대에 역행한 사람이며, 시대에 적절하기만 한 현실방안을 내놓은 사람이 아니라 시대를 초월하는 이상방안을 제시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철학은 반드시 현실적 문제를 대변해야 하지만 현실의 해결 그 자체만으로 만족할 때에는 그 현실을 제기한 시대적 패러다임이 바뀌면 꼭 폐기되어 버리고 만다. 철학은 영원한 인간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그리고 영원히 비판자적인 젊음을 유지해야 한다. 맹자가 어떻게 인간의 문제를 접근했는지, 이제 독자들 스스로 원문을 대하면서 궁금증을 풀어가야 할 것이다.
제1장의 언어에서 이미 우리는 당대 사회의 하이어라키(hierarchy, 계층)로서 ‘왕(王) - 대부(大夫) - 사서인(士庶人)’이라는 관념을 읽어낼 수 있다. 제후가 ‘왕’이 되었음을 알 수 있고, ‘사(士)’와 ‘서인(庶人)’이 같은 급으로 처리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만승지국 – 천승지가’ ‘천승지국 – 백승지가’의 대비도 전국시대의 현실적 언어라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이렇게 한 장 한 장 해설해나가다 보면 원고지 1만 매가 있어도 모자랄 것이다. 이제 『맹자』라는 텍스트의 분위기를 독자들이 파악했다고 보고 원문 중심으로 나는 텍스트를 읽어나갈 것이다. 독자들이 세밀하게 그 행간의 언어들을 분석하여 자기 스스로의 ‘관(觀)’을 만들어 나가야할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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