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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의 장자수업, 1부 대지를 뛰어올라 - 1. 철학을 위한 찬가(황천 이야기) 본문

책/철학(哲學)

강신주의 장자수업, 1부 대지를 뛰어올라 - 1. 철학을 위한 찬가(황천 이야기)

건방진방랑자 2021. 5. 16.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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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대지를 뛰어올라

 

 

1. 철학을 위한 찬가

황천 이야기

 

 

혜시가 장자에게 말했다. “그대의 말은 쓸모가 없네.”

장자가 말했다. “쓸모없음을 알아야 비로소 쓸모에 관해 함께 말할 수 있네. 세상이 넓고도 크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사람에게 쓸모가 있는 것은 발을 디딜 만큼의 땅이네. 그렇다면 발을 디디고 있는 땅만을 남겨두고 나머지 땅을 모조리 파고들어 가 황천에까지 이른다면, 그 밟고 있는 땅이 사람에게 쓸모가 있겠는가?”

혜시가 쓸모가 없지라고 대답했다.

장자가 말했다. “그렇다면 쓸모없음이 쓸모가 있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네.” 외물7

惠子謂莊子曰: “子言無用.”

莊子曰: “知無用而始可與言用矣. 夫地非不廣且大也, 人之所用容足耳, 然則廁足而墊之致黃泉, 人尙有用乎?”

惠子曰: “無用.”

莊子曰: “然則無用之爲用也亦明矣.”

 

 

장자, 무용의 철학자

 

장자를 읽다 보면 우리는 장자(莊子, BC 365? ~ BC 270?)가 항상 쓸모 있음보다는 쓸모없음, 달리 말해 소용(所用)’보다는 무용(無用)’을 중시한다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장자를 무용의 철학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맞는 말이지만 조심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장자의 무용 개념은 이를 강조하는 다양한 일화들마다 그 의미와 강조점을 달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무용 개념을 획일적으로 정의하려 하기보다는 무용을 강조하는 다양한 일화들의 문맥에 집중하는 편이 좋습니다. 처음으로 살펴볼 것은 황천 이야기에 등장하는 무용 개념입니다. 황천 이야기는 장자가 자신의 사유와 자신의 이야기가 무용해 보이지만 사실 엄청나게 쓸모 있음을 역설하는 대목에서 등장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쓸모를 기준으로 무언가를 평가하곤 합니다. 저만 해도 어린 시절에 가장 많이 듣던 소리가 그거 하면 쌀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라는 말이었습니다. 개발독재 시절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라고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도 바보야! 중요한 것은 경제야라는 슬로건이 여전히 통용되고 있으니까요. 2,500여년전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BC 403 ~ BC 221)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개인이든 사회든 아니면 국가든 생존과 경쟁이 최고의 화두이던 시절이었습니다. 이 점에서 부국강병(富國强兵)이라는 슬로건은 상징적입니다. 어떻게 하면 국가를 부유하게 만들고 군대를 강하게 만들까? 이 논리는 개개인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죠. 어떻게 하면 개인은 부유하고 강해질 수 있는가?

 

제자백가(諸子百家)라고 불리던 사상가들은, 기본적으로 자기들의 말을 따르면 국가나 개인이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역설했습니다. 바로 여기서 ’, ()’라는 말이 등장한 겁니다. 자신들이 주창한 길을 따르면 성공한다는 발상입니다. 유가의 도, 법가의 도, 묵가의 도, 도가의 도, 혹은 공자의 도, 맹자의 도, 묵자의 도, 노자의 도, 한비자의 도 등등은 이런 맥락에서 탄생했습니다. 결국 제자백가의 사상 대부분은 소용(所用)’, 쓸모 있음을 지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들의 도를 따르면 쌀도 나오고 밥도 나온다는 논리였죠. 이런 와중에 부국강병의 논리 자체를 문제 삼고 이를 극복하려 한 소수의 사상가들이 있었습니다. 그 대표 주자가 바로 장자였습니다. 쓸모가 사실은 우리 삶을 파괴할 수 있고, 쓸모없음이 오히려 우리 삶을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고 그는 역설했으니까요. 그래서인지 장자의 사유는 두 부류에게 환영받았습니다. 바로 생존과 경쟁의 논리에 의구심을 품었던 지적인 사람들, 그리고 패배했다는 자괴감에 사로잡힌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승자와 소용의 논리를 지향하던 대부분의 제자백가들은 당연히 장자를 비난했고 심지어 조롱하기까지 했습니다. 한마디로 경제적인 것을 부정하니 비현실적이고, 패자를 승자가 되도록 격려하지 않으니 무책임하다는 겁니다.

 

사실 생존과 경쟁의 논리는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동물 세계의 논리이자 승자독식을 인정하는 냉혹한 논리입니다. 그러나 동물 세계에서도 생존과 경쟁의 논리는 주로 다른 종들 사이에서 적용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생존과 경쟁의 논리를 인간이 같은 인간 종에게 적용하면서 비극은 발생합니다. 부국강병을 꿈꾸던 당시 국가를 생각해보세요. 개인의 쓸모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국가입니다. 쓸모를 갖추기 위해 오랜 시간 준비하고 마침내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쓸모 있음을 입증하면 국가는 우리를 고용하고 돈을 줍니다. 쓸모가 더 클수록 우리는 직급이 높아지고 더 많은 돈을 얻습니다. 그렇지만 이 과정을 통해 지배와 착취를 공고히 하는 것은 국가라는 사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우리는 국가가 원하는 인간으로 개조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우리는 상명하복 체제에 포섭되어 길들여집니다. 언젠가 지배체제의 최고 정점에 이르기를, 즉 재상이나 군주가 되기를 꿈꾸면서 말이죠. 같은 종에는 지배와 복종 관계를 강요하지 않는 다른 동물 종과 같은 품격을 인간은 회복해야 합니다. 당연히 경쟁이 양산하는 대부분의 패자들은 자신을 비하할 필요가 없습니다. 패배는 이미 구조적으로 예정된 것이니까요. 오히려 패자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기 위한 좋은 출발점에 서 있게 되죠. 상명하복, 경쟁과 승자, 그리고 쓸모의 논리에서 가장 멀리 있으니까요. 패자라는 절망을 딛고 꿋꿋하게 살아가다 보면, 생존과 경쟁의 가치 외에 삶의 다른 가치가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험에 떨어져도 따뜻한 밥을 먹이는 어머니, 혹은 실직을 해도 내 곁을 떠나지 않는 배우자를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명문대에 들어갔다는 이유로 어머니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내가 돈을 벌기에 배우자가 나를 사랑한 것도 아니었던 겁니다. 나의 쓸모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발견, 그것은 생존과 경쟁과 무관한 다른 가치가 있음을 증명합니다.

 

 

 

 

 

내가 밟은 땅만 남기고 모조리 파낸다면

 

소수의 지배자와 다수의 피지배자로 이루어진 것이 사회라는 궤변을 늘어놓는 사람들, 혹은 상명하복을 당연시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장자의 사유는 불온하기 이를 데 없죠. 그렇다고 해서 장자가 현실 지배체제를 전복시켜야 한다고 선동하지 않으니 그를 노골적으로 탄압하기도 곤란합니다. 탄압을 받으면 장자는 말 타고 다른 나라로 도망가면 그뿐입니다. 부국강병에 혈안이 된 국가들이 일심동체로 장자를 공격해도 장자는 국가와 국가 사이로 숨어 들어가면 그만입니다. 영토국가가 완성되기 전이었기에 국가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 많이 있었으니까요. 흔히 ()’라고 불리는 곳들입니다. 국가 입장에서는 야만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상명하복 체제가 작동하지 않는 인간적인 사회, 군주와 같은 지배자가 없는 사회였습니다. 결국 당시는 장자의 입을 막기란 거의 불가능한 시대였던 겁니다. 그래서 선택된 전략이 장자의 사유는 우리 삶에 필요가 없다는 쓸모없는 백일몽에 지나지 않는다는 흑색선전입니다. 장자는 이런 이념 공세에 맞설 필요가 있었습니다. 황천 이야기가 들어 있는 외물편의 일화는 이런 사정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혜시(惠施, BC 370? ~ BC 309?)라는 철학자의 무례한 도발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대의 말은 쓸모가 없네.” 장자보다 나이가 약간 많다고 추정되는 혜시는 논리학으로 무장한 형이상학적 사유와 함께 탁월한 현실적 정치 감각으로도 유명했던 동시대 최고 지성이었죠. 장자를 보면 혜시와 논쟁하는 일화가 많이 등장합니다. 장자의 사유가 혜시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예리해진 게 아닌가 하는 추론도 가능합니다. 어쨌든 장자는 혜시의 도발에 재기발랄하게 대응합니다. 일단 자신의 철학이 쓸모가 없다는 혜시의 말을 주저 없이 수용해버립니다. 혜시로서는 기대하지 않은 반응이었을 겁니다. 이어서 장자는 쓸모없음이 곧 인문학적 사유, 혹은 좁혀서 철학적 사유의 자랑이자 자부심이라고 이야기하죠. 쓸모 있는 사유란 결국 국가나 자본 등이 요구하는 사유에 지나지 않습니다.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게 해주는 사유야말로 쌀이 나오고 밥이 나오는사유, 즉 쓸모 있는 사유일 테니까요. 그렇지만 인간의 사유는, 국가나 자본을 위한 사유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 인간이 스스로 수행하는 사유여야만 합니다. 당연히 국가나 자본은 어용사유(御用思惟)가 아닌 인간의 사유에 무용하다는 딱지를 붙일 겁니다. 그러니 장자는 자신의 사유가 무용하다는 비난을 긍지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어용지식, 어용사유, 다시 말해 쓸모 있는 사유라고 해서 인간이 얻을 수 있는 모든 지식과 인간이 수행하는 모든 사유를 포괄할 수는 없습니다. 억압체제에서 벗어나 살아갈 방도가 없다 보니 불가피하게 배우고 수행하는 것이 쓸모있는 지식이자 쓸모 있는 사유일 테니까요.

 

어용지식과 어용사유는 생계만을 위한 것이죠. 당연히 자신의 이익을 넘어서는 인간적 가치들에 대해 무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해보세요. 경제학만으로, 법학만으로, 통계학만으로, 전자공학만으로 그리고 의학만으로 사랑의 의미를 제대로 사유하고 사랑을 근사하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할 겁니다. 쓸모없는 사유는 쓸모 있는 사유보다 더 포괄적입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쓸모 있는 사유가 쓸모없는 사유를 아무리 폄하하고 은폐하려 해도 쓸모없는 사유는 결코 은폐되거나 폄하될 수 없습니다. 이 점을 설득하기 위해 장자는 근사한 이야기를 하나 만듭니다. 혜시에게 들려준 황천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땅에 발을 딛고 선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게 쓸모가 있는 것은 발 디딜 만큼의 땅입니다. 지금 밟고 있지 않은 땅은 그가 서 있는데 아무런 쓸모가 없으니까요. 여기서 장자는 사유 실험을 하나 제안합니다. 쓸모 있는 땅, 즉 밟고 있는 땅을 제외하고 지금 밟고 있지 않은 땅을 저 지하 가장 깊은 곳 황천까지 파내보자는 겁니다. 쓸모가 없다고 판단했으니 없애도 지장이 없는 것 아니 나는 말이죠. 자신이 발 디디고 있던 쓸모 있는 땅을 제외하고 쓸모없는 모든 땅을 없애버린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수천, 수만 킬로미터 높이의 대나무 꼭대기에 서 있는 형국이 되겠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사람은 현기증을 느끼고 저 깊은 황천까지 추락하고 말 겁니다. 그가 밟고 있던 작은 땅, 그 쓸모 있다던 땅 마저 휑하게 비어 쓸모가 없어지는 아이러니는 이렇게 발생합니다. 마침내 장자는 역설합니다. 이렇게 쓸모없음은 알량한 쓸모 있음이나마 가능하게 하는 것 아니냐고, 그래서 어쩌면 쓸모없음이 쓸모 있음보다 더 쓸모 있는 것 아니냐고 말이죠.

 

 

 

 

 

쌀도 밥도 안 나오는 일들의 위대함

 

장자는 자신의 사유가 무용하다는 조롱에 맞서 당당하기만 합니다. 그는 무용함이야말로 자신의 철학이 체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억압받는 인간을 위한 것임을 입증하는 지표라고 기염을 토하죠. 수많은 철학을 위한 변명중에서 장자의 변명은 압권입니다. 철학을 위한 장자의 변명은 장자 본인의 철학을 넘어 인문적 사유 일반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시나 소설, 나아가 철학 저작마저 상품의 논리에, 다시 말해 소용의 논리에 포획되고 있는 시대입니다. 물론 그 핵심에는 판매량과 인지도 증대를 도모하는 자본주의적 욕망이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철학과나 사학과 등 인문계열 학과들이 인문콘텐츠학부나 문화 교양학부 등으로 흡수, 소멸되는 시대이니 말해 무엇합니까. 인문학이 자본의 논리에 포섭되는 현상을 저지하기는커녕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전공을 팔아버린 선생들도 많죠. 심지어 인문학을 지탱하는 양대 축이라고 할 수 있는 시인이나 철학자마저 자신들 저작의 쓸모를 고민합니다. 바로 이때, 장자의 당당함은 우리 시대를 향한 죽비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국가나 자본이 원하는 것을 행하는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원하는 것을 해야 합니다. ‘밥도 나오지 않고 쌀도 나오지 않는쓸모없는 일들을 많이 할수록 우리 삶은 행복하니까요. 시도 글도 그리고 사유도 그리해야만 합니다.

 

시인이나 철학자는 농산물을 생산해 판매하는 농부라기보다 텃밭을 가꾸는 사람과 같습니다. 물론 텃밭에서 나는 상추나 고추를 먹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생계를 유지해야 하니까요. 그러나 상추나 고추를 팔지는 않습니다. 남들은 농사를 제대로 지으라고, 생산성을 높이려면 농약을 쓰라고 유혹할 수도 있겠죠. 그러나 텃밭을 지키려는 사람은 이런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텃밭을 일구는 행위는 쓸모에 전적으로 종속된 행위가 아니니까요. 그저 땀 흘리는 것이, 땅 냄새와 풀 냄새, 혹은 짧은 시간 동안 풍기는 꽃 냄새가 좋을 뿐입니다. 이마의 땀을 근사하게 만드는 싱그러운 바람도 좋고요. 텃밭을 가꾸는 사람에게 밭에서 자라는 것들은 소용이 적고 무용이 많습니다. 시들어버리는 것도 많고 벌레의 공격을 받은 것들도 많습니다. 간혹 다른 사람과 나누기는 하지요.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시들고 말 테니까요. 누군가 맛나게 먹고 행복해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상추나 고추를 받고 그 대신 우유를 갖다 주는 사람도, 혹은 돈을 주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사양하다 안 되면 우유나 돈을 받으면 그만입니다. 시인의 시와 철학자의 글은 텃밭을 일군 사람이 이웃에게 건네는 상추나 고추 같은 겁니다. 좋아서 한 일의 결과이고, 그 결과물을 이웃들에게 건넨 것이니까요.

 

시인이나 철학자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닙니다.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철학을 위한 장자의 변명을 삶을 위한 변명으로 읽을 수 있으니까요. 우리는 성적이 좋은 아이여서, 품이 덜 드는 아이여서 우리 아이를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쓸모가 있는 아이, 동년배보다 쓸모가 더 큰 아이라는 것이 사랑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입시에 실패할 때, 취업에 실패할 때, 혹은 정리해고라도 당했을 때 여러분의 아이가 여러분을 떠나거나 자살하는 비극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요. 그냥 무용으로 아이를 사랑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쓸모가 없어지더라도 여러분의 소중한 아이는 죽지 않고 여러분을 찾아올 테니까요. 아무런 쓸모가 없어도 존재하는 것만으로 사랑받는다는 확신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지요. 아버지도 어머니도 남편도 아내도 무용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바람도 물도 그리고 새도 물고기도 무용으로 좋아해야 합니다. 생각해보면, 언젠가 병들고 나이 들어 쓸모는커녕 주변에 짐이 되는 때가 반드시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 때 주변에 여러분을 쓸모로 평가하지 않는 이가 한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해하는 사람이 있기를 바라는 것, 바로 이것이 무용을 강조했던 장자의 진정한 속내였을 것입니다.

 

 

 

 

인용

목차 / 프롤로그 / 2. 사랑의 비극을 막는 방법

장자 / 타자와의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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